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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신앙교육, 누가 책임져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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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5-24 ㅣ No.95

[경향 돋보기 - 청소년 신앙교육] 청소년 신앙교육, 누가 책임져야 하나?

 

 

‘매일 밤 11시가 넘은 시간, 어두움을 무대 삼아 군무를 추는 듯, 한 무리가 안개처럼 거리로 밀려든다. 같은 복장에 같은 머리 스타일,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메고 흐느적거리며 도시를 가득 메우는 무리이다. 하루의 고된 노동을 마친 육체노동자들보다도 더 처진 어깨를 가지고 나오는 이들의 모습은 애달프고,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섬뜩하기조차 하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어디를 향해서 저렇게 달려가야만 하는 것일까?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몰고 가는 것일까?’

 

얼마 전 밤늦게 사제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거리를 가득 메운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몇몇 사제들과 모임을 가진다. ‘청소년 사목 활성화를 위한 모임’이다. 모임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스스로 커다란 질문에 부딪히고 말았다. ‘청소년 사목 활성화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었다. 주일 학생미사에 아이들이 많이 나오는 것이 청소년 사목 활성화가 잘된 것인가? 공부도 잘하고 신앙도 좋은 아이들만 있는 것이 청소년 사목 활성화가 잘된 것인가? 도대체 청소년 사목 활성화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가지고 몇 시간을 이야기했다.

 

우리나라 모든 교구에서 발표한 교구장 사목교서들을 보면 청소년이란 단어가 들어가지 않은 교구가 거의 없다. 그만큼 청소년에 대한 관심과 걱정이 큰 모양이다. 하지만 여전히 청소년 사목이 잘된다고, 좋은 모습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내세우는 교구는 없는 것 같다. 청소년이 교회의 미래라면 정말 커다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청소년 신앙교육의 주체들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하는 글을 쓰려고 하는데 오히려 이런 현실들이 주제보다 더 먼저 생각의 자리를 잡는다. 오늘날 교회의 ‘청소년 신앙교육’이라는 중요한 주제가 어쩌면 이런 상황 안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거의 모든 교구와 본당에서 청소년 신앙교육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을 두고 ‘작동불능’이라는 표현이 나오기도 한다. 한국 교회에서 신앙교육의 핵심이라는 주일학교 시스템은 거의 중 · 고등부로 올라가면 마치 몸이 굳어가는 병에 걸린 것처럼 점차 그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 주일학교를 대신하는 여러 가지 동아리나 다른 여타의 프로그램 역시 엄청나게 잘 작동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프로그램 저런 프로그램을 다 들여다 써도 여전히 효과가 없다면 문제는 그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청소년 신앙교육의 주체들은 누구인가?

 

‘청소년 신앙교육의 주체들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주 명료하다. 무엇보다도 청소년들 자신이다. 그들은 신앙교육의 대상들로서 일차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는 피교육자들이다. 신앙교육에서 피교육이라는 말을 쓰기는 싫지만 개념을 명확하게 하고자 할 수 없이 쓴다.

 

두 번째는 청소년들의 친구 청소년들이다. 친구들은 또래 청소년들에게 교육자이자 피교육자의 역할 두 가지를 모두 함께 하는 주체들이다. 이런 청소년의 특성을 잘 아는 교회는 “청소년들이야말로 청소년을 직접 만나는 첫째 사도”(평신도교령, 12항)라고 가르치고 있다.

 

세 번째는 청소년들이 속해있는 가정이다. 무엇보다도 가정은 청소년 신앙교육의 첫 번째 학교이다. 부모는 청소년 신앙교육의 첫 번째 교사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네 번째는 청소년들이 가장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학교 현장의 교사들이다. 수많은 가톨릭 교사들이 학교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정작 그들이 학교가 청소년 신앙교육의 가장 효과적인 현장이고, 그 현장 안에서 자신들이 청소년 신앙교육의 가장 훌륭한 주체라고 자각하는지는 의심스럽다.

 

다섯 번째는 청소년 신앙교육이 조직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본당과 그 본당의 구성원들이다. 여기에는 본당신부와 보좌신부, 수도자 그리고 교리교사들과 자모회와 본당의 청소년분과들이 속한다.

 

여섯 번째는 교구와 한국 교회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교구는 가정과 본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청소년 교육을 조직적으로 지원하는 기구의 역할뿐 아니라 교구 내에서 이루어지는 청소년 신앙교육의 전반에 관한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한국 주교회의로 대표되는 한국 교회 전체는 우리나라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에 대하여 복음적 길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한국 사회의 복음화와 이에 따른 청소년의 복음화를 위한 총체적인 노력을 함께 기울이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청소년 신앙교육의 주체인 것이다.

 

 

청소년 신앙교육의 주체로서 한국 교회와 사회

 

“그러므로 이 거룩한 공의회는 모든 신자들 특히 교회의 희망인 청소년들이 이러한 그리스도인 교육을 받도록 모든 조치를 강구하여야 할 중대한 책무를 영혼의 목자들에게 일깨운다”(그리스도인 교육선언, 2항).

 

어떤 잡지의 청소년과 관련한 기사의 내용을 말하고 싶다. 우리나라 고등학교에는 5개의 계급이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카스트 제도가 있는 인도도 아닌데 웬 계급?’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 다섯 개의 계급은 가장 최고의 부자를 위한 자사고, 보통 부자를 위한 특목고, 일반서민을 위한 일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전문계고, 그리고 학교 밖 아이들이다.

 

우리 성당의 아이들이 살아가는 못자리가 되는 교육의 현장이 이렇게 비복음적인 공간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우리 교회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성당의 아이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 자리가 이렇게 나누어지고 불공평해진다면 과연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그러하기에 무엇보다 먼저 교회가 청소년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청소년 신앙교육을 위해서 고민한다면 이런 한국 교육의 현실을 먼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더욱이 통계청에서 발표한 청소년 통계자료에 따르면, 2004년 한 해 동안 15세에서 24세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점은 아이들이 느끼는 그 현실이 얼마나 살벌하고 비교육적이며 반생명적인가 하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렇게 청소년 사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반생명적인 사회 현상에 대한 근본적인 한국 교회 전체의 대응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일전에 청소년국장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골자의 제안을 했다가 회의 의제로도 선택되지 못한 적이 있다. 적어도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우리 사회 전체의 흐름을 바꾸려면 이런 작은 제안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사회가 요청하는 학교 봉사활동 점수, 가톨릭계 학교 특차전형 등에서 교회에서의 학생활동 경력이 인정되도록 제 학교 및 관련 기관들과 협력하고, 이에 필요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도록 한다.”

 

 

가장 핵심적인 신앙교육의 주체로서 본당과 그 구성원들

 

“사목구 주임은 자기 사목구에서 청소년들의 교육과 신심활동을 위한 계획을 마련하고, 그들이 이러한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촉구하여야 한다”(“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 제180조 2항)

 

청소년이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결코 작다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각 본당의 현실을 감안하면 청소년 신앙교육은 그 중요성에 반해서 본당사목 활동의 중심 영역이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 것 같다. 그 단적인 예로, 많은 경우 본당 사목구 주임의 임기와 사목적 방향에 따라 가장 예민하고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고 있는 주일학교의 현실을 들 수 있다. 이는 본당 내에서 청소년 사목의 일관성과 중요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당 사목구 주임의 가장 우선적인 임무 가운데 하나가 청소년 신앙교육에 있음을 감안할 때 이러한 현상들은 조속히 시정되어야 할 부분이다.

 

특별히 신앙교육이 단순히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나눔을 통한 삶의 전달이라는 전인적 교육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다음의 설문조사 결과에서 보이는 사실은 사목자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할 수 있다.

 

서울대교구에서 시노드를 준비하면서 ‘청소년 의안 작성을 위한 설문조사 결과 보고서’를 내놓았다. 청소년 신앙교육과 직접적인 관련은 아닐 수도 있지만 의미 있게 살펴볼 대목이 아닌가 싶어서 언급한다. 설문지에서 두 가지 질문과 그 결과를 발췌하였다.

 

첫 번째는 ‘문제가 생겼을 때 상담하는 대상자는?’이라는 질문과 답이다.

 

친구가 28.7%로 가장 많고, 다음은 어머니(25.0%), 혼자 스스로(17.1%), 형제 자매 (10.6%), 아버지(8.9%)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항목에는 신부님 수녀님도 있지만 신부님 수녀님과 고민을 상담한다는 청소년은 1.4%뿐이었다. 응답자 3,864명 가운데 20명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주일학교 선생님(3.5%)에도 미치지 못했고, 유일하게 할아버지 할머니(1.4%)보다는 높았는데 한 명이 더 많을 뿐이었다.

 

두 번째 질문은 이런 내용이었다. ‘자신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사람은?’

 

자신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사람은 부모님(33.4%)이었고, 다음은 학교 친구들(33.0%), 형제들(9.3%), 성당 친구들(5.1%) 순으로 나타났다. 여기에도 역시 신부님 수녀님이 답의 항목에 있었지만 1.3%로 꼴찌로 나타났다. 주일학교 교사들이 1.8%였고 그 위에 스포츠 스타, 연예인, 사이버 공간에서 만난 사람이 더 높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 안에서 본당을 구성하고 있는 기타 다른 신앙교육의 주체들(보좌신부나 수도자들이나 교리교사들이나 청소년분과 위원들 등)은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본당에서 이루어지는 노력들이 헛된 것인가? 전부가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이토록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면 거기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아이들이 성당에 바라는 것은 사목자가 바라는 것과 다른 것은 아닐까?

 

 

가장 직접적인 신앙교육의 장이 되는 학교와 교사들

 

가톨릭 계통의 학교에 다니지 못하거나 또는 다른 이유로 이러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청소년들의 양성은 부모들과 영혼의 목자들과 사도직 단체들이 더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기 직업과 직무로 탁월한 형태의 평신도 사도직을 실천하고 있는 교사들과 교육자들은 이러한 교육을 더욱 효과적으로 실시하는 데 필요한 교육이론과 교수법을 터득해야 한다(평신도교령, 30항 참조).

 

우리 아이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어디일까? 우리 아이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는 가정이나 놀이터가 아니라 학교이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불행하다고 말하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지만 아이들에게 결코 학교는 즐거운 장소만은 아니다. 어렵고 힘들고 경쟁해야 하는 또 하나의 생존을 위한 정글이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나누는 관계는 그 어떤 관계보다 친밀하고, 치열하다. 이런 상황에서 던져지는 하나의 도움은 진정 그들에게 복음으로 다가온다. 이런 의미에서 가톨릭 교사들이 각자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신앙교육은 그 방법과 기회에서 아주 다양하고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신자 교사가 신자 학생을 파악하고 그 학생에게 작은 관심을 쏟아주어도 그 학생은 얼마나 큰 용기와 힘을 얻는지 모른다.

 

그러나 가톨릭 학교를 제외한 일반 학교 안에서 이런 신앙교육 활동을 벌이고 있는 교사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실제로 현직 교사로서 본당에서 주일학교 교리교사를 하고 있는 경우는 필자가 본 바로는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다. (어떤 교사는 이렇게 말한다. “일주일 내내 아이들에게 시달렸는데 성당에 와서까지 아이들에게 시달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자신을 못살게 구는 존재들인가?)

 

가톨릭 신앙을 가진 교사들에게 학교가 단순한 생계유지를 위한 직업의 차원에서 머무는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학교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람을 낚는 갈릴레아 호수가 되어야 한다. 교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가장 훌륭하게 실천할 수 있는 부름을 받은 성소자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청소년 신앙교육의 또 하나의 교사 청소년 자신

 

“사회에서 청소년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가는 오늘, 사도직 분야에서도 거기에 상응하는 사도적 활약이 기대되는 바이며, 사실 그들의 자연적 성격은 그들을 사도적 활동에 적합하게 만들어준다”(평신도교령, 12항).

 

그들의 자연적 성격은 무엇일까? 발달심리학에서는 청소년기의 특징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로 또래 문화를 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청소년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주는 것은 청소년 친구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청소년은 또래에게 가장 훌륭한 복음의 전파자가 될 수 있다. 그들은 또래의 삶과 그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사건들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이해자일 뿐 아니라 가장 훌륭한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이 가진 이런 장점은 청소년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바꾸게 한다. 곧 그들이 단순히 신앙교육의 대상이자 피교육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사목자들과 함께하는 청소년 신앙교육에서 가장 탁월한 협조자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청소년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들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가?’라는 관점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들과 함께(with), 그들 안에서(in), 그들을 통해서(through) 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그들을 위하여(for), 그들을 향해서(to) 무언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바람직한 청소년 신앙교육을 위해서

 

“교회는 미래의 인류이고, 미래의 교회일 수밖에 없는 청소년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배반되는 인간의 판단기준, 가치관, 관심의 초점, 사상의 동행, 사상의 원천, 생활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받아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잡을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켜야 한다”(“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의안”, 제9안 특수사목 I, 청소년(학생) 사목 5항)

 

우리 아이들은 성당에서 무엇을 바랄까? 우리는 아마도 여기에서부터 아이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아이들이 성당에서 바라는 것이 세상의 것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아이들이 바라는 것이 가장 복음적인 것이라면? 다시 말하자면 신앙을 바라고, 하느님을 바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바라고,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바라고, 기도하기를 바란다면?

 

교회는 교회가 가장 잘하는 것을 주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주지 않아도 되는 것들 - 흔히들 이것을 방법이라고 한다. - 에 매여있는 것은 아닐까? 무슨 프로그램이 어떻고, 무슨 책이 어떻고, 어떤 방법이 좋고, 유행이 무엇이고 하면서 정작 아이들은 신앙을 바라고 있는데 그것을 주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더 심각하게 어쩌면 청소년 신앙교육의 주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신앙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람직한 신앙교육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교회가 가장 잘하는 것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을 가장 복음적인 방법으로 아이들에게 보여줌으로써 함께 공유하는 것.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5).

 

* 양윤성 다윗 - 신부. 1994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청주교구 청소년 사목국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0년 5월호, 양윤성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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