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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삶의 지혜19: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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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9 ㅣ No.148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19)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


[본문]

 

힘자라는 데까지

임께서 주신 힘 자라는 데까지

임이 누구신지 물었습니다

믿는 바를 이치로 알고 싶어서

따지고 따지느라 애썼습니다

임이시여 저의 주님이시여

제게는 둘도 없는 희망이시여

제 간청을 들어주소서

임을 두고 묻는데 지치지 않게 하소서

임의 모습 찾고자 늘 몸달게 하소서

임을 두고 물을 힘을 주소서

임을 알아뵙게 하신 임이옵기에

갈수록 더욱 알아뵙게 되리라는 

희망을 주신 임이옵기에

임 앞에 제 강함이 있사오니

임 앞에 제 약함이 있사오니

강함은 지켜주소서

약함은 거들어주소서

임 앞에 제 앎이 있사오니

임 앞에 제 모름이 있사오니

임께서 열어주신 곳에

제가 들어가거든 맞아주소서

임께서 닫아거신 곳에

제가 두드리거든 열어주소서

임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임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임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이 모든 염원을 제 안에 키워주소서

임께서 저를 고쳐놓으실 때까지

고쳐서 완성하실 때까지

 

- 「삼위일체론」 15권 51항

 

 

“두드리면 열어주소서”


[해설]

 

북아프리카 히포의 성인 주교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는 수많은 교부들 가운데서 사상으로나 필력으로나 가장 빼어난 분이시다. 그는 학문적으로 완숙한 시절 약 스무 해에 걸쳐(399~420년) 「삼위일체론」을 썼는데, 자신의 역부족을 절감한 나머지 결론을 맺지 못하고 앞에서 소개한,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로 마무리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생각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위격(位格)으론 세 분이시오 실체(實體)로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더는 논할 수 없는 막막한 순간에 저 간절한 기도를 바쳤다.

 

이 기도문과 어울리는 전설이 전해온다. 어느날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론을 쓰다가 너무도 막막해서 히포(지금의 알제리 공화국 안나바 항구) 앞바다 지중해변을 거닐고 있었는데, 어떤 아이가 모래사장에 작은 구덩이를 파고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서 그 구덩이에 붓고 있었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괴이하게 여겨 아이에게 그 연유를 물으니까, 『이 구덩이에 지중해 물을 다 담을 작정이에요』라고 대꾸했겠다. 이에 아우구스티누스가 『그건 당치도 않다』고 하니까, 『주교님께서 궁리하시는 삼위일체 신비는 더 어렵지요』 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이 기도문을 풀이할 필요가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하는 대문호인지라 글을 쉽고 분명하고 구수하게 쓸 줄 안다. 그래서 굳이 해설할 필요가 없겠지만 노파심에서 사족을 달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에서 배운 신조를 맹목적으로 믿지 않았다. 그는 『믿는 바를 이치로 알고 싶어서 따지고 따지느라 애썼다.』 그는 신앙과 지성 중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골라잡지 않고, 둘 다 보듬을 줄 아는 지각있는 신앙인이었다. 그는 믿고 알고, 알고 믿으려는 신앙인이요 지성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을 생각할 때면 지성의 한계를 절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느님은 초월이시니까. 불도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느님은 공(空)이시니까. 하느님을 생각할 때면 조금 아는 것 말고 온통 모르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애절히 간구했다.

 

『임 앞에 제 앎이 있사오니 / 임 앞에 제 모름이 있사오니 / 임께서 열어 주신 곳에 / 제가 들어가거든 맞아주소서 / 임께서 닫아거신 곳에 / 제가 두드리거든 열어주소서 / 임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 임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 임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기도문은 분도출판사에서 청춘을 바친 고 정한교씨가 초역했는데, 나는 그 기도문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여러 번 다듬었다. 나는 이 기도를 하느님 아빠께 바치기도 하고, 하느님 아빠의 화신이신 예수께 바치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께는 바치지 않는다. 나의 주보성인 사도 바울로를 눈여겨보고 흉내 내고 싶기 때문이다. 사실 기도의 대가이신 바울로는 노상 하느님 또는 예수께 기도를 드렸다. 그렇지만 그가 성령께 기도를 드린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요즘 성령기도가 유행이라지만 나하고는 거리가 멀다.

 

[가톨릭신문, 2005년 8월 7일, 정양모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 성공회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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