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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삶의 지혜20: 니느웨의 이사악의 제1모음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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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9 ㅣ No.149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20) 니느웨의 이사악의 ‘제1모음집’에서

 

 

애틋함


[본문]

 

순결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창조된 모든 것에 애틋해하는 마음이다. … 그렇다면 애틋한 마음이란 또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들, 새들, 짐승들, 심지어 마귀들까지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이 애틋한 나머지 불타오르는 마음이다. 크나큰 측은지심으로 말미암아 억누를 수 없는 연민의 힘에 압도된 나머지, 이 모든 피조물을 기억하거나 볼 때에 눈물을 쏟으며 녹아내리는 그런 마음이다. 그런 이는 어떤 피조물이 제 아무리 작은 상처나 아픔이라도 겪는 것을 보거나 듣게 되면 견딜 수 없어한다.

 

그리하여 그는 이성이 없는 존재들이나 심지어 진리에 적대하고 맞서는 자들을 위해서까지 눈물의 기도를 바치게 된다. 그는 한도 끝도 없이 샘솟는 애틋함으로 말미암아 심지어 뱀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바친다. 이렇게 그는 하느님을 닮아간다.

 

니느웨의 이사악, 「제 1 모음집 74」

 

 

“창조된 만물은 우리의 피붙이”


[해설]

 

근자에 시리아 교부들의 중요성이 재발견되고 있는 가운데, 니느웨의 이사악의 깊이있고 아름다운 가르침도 속속 현대어로 소개되고 있는 추세다. 대체로 고대 시리아어권 교부들은 중동 지방 특유의 비 서구적 체질과 사유로 말미암아 특히 우리 아시아 사람들에게 큰 매력을 행사한다. 7세기에 살았던 니느웨의 이사악의 음성 역시 엄청난 깊이와 감동의 힘으로 오늘날 사람들에게 큰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는 한없는 연민과 자비로 끓어오르는 하느님의 밑모를 자비의 심연에 깊이 잠긴 나머지, 한 평생 하느님 사랑의 애틋함을 노래했던 뛰어난 스승이다. 그래서 그는 비단 당대에 그를 따르던 소수의 제자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가장 깊은 의미에서 「영적 아버지」였다.

 

사막 교부들의 전통을 서방으로 옮겨 심었다는 평가를 받는 요한 카시아누스(360~435)를 위시하여 보통으로 교부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마음의 순결」(puritas cordis)이란 일편단심으로 하느님을 찾는 통합되고 단순한 마음, 즉 내적 지향의 순수함을 뜻한다. 이것은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가 말한 「아파테이아」와 종국에는 같은 뜻이고, 후대에 로욜라의 이냐시오에게 가면 어디 한 군데에 특별히 애착하지 않는다 하여 이른바 「불편심(不偏心)」으로 불리게 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니느웨의 이사악은 이 대목에서 「순결함」이 바로 연민의 마음, 다시 말해 애틋해 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풀고 있다. 얼핏 보기에 이사악이 선배들의 전통에서 좀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다. 하느님은 오직 한 마음으로 찾을 때에만 스스로를 드러내신다. 두 마음을 품은 이는 하느님을 뵙지 못한다. 모든 욕심과 충동들로부터 내적으로 자유로워진 사람만이 깨끗해진 마음 자리에 도달하게 되고, 그제야 비로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느님을 뵈올 것이다』는 말씀대로 하느님을 뵈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교부들은 순결한 처녀의 몸이 첫날 밤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듯이, 순결한 마음도 하느님에게서 이른바 「사랑의 상처」를 입는다고 본다.

 

니느웨의 이사악이 말한 「애틋함」으로서의 마음의 순결이 이전의 수도승 체험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유는, 순결한 마음이 하느님에게서 사랑의 상처를 입으면 그 첫째 결과가 사람에 대해 애틋해하는 마음을 품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당신을 찾는 순간에는 거개 크나큰 측은지심에 마음이 움직이셨다고 기록하고 있거니와, 보는 인생들마다 애틋해서 눈에 눈물이 마르는 날이 없었던 성인들은 그 후에도 허다했다. 그래서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던 또 다른 시리아 교부 요셉 하자이는, 사람의 마음 안에 성령께서 계실 때 생기는 일곱 가지 열매 중 하나로 「형형한 눈빛」과 함께 「애틋함」(혹은 연민)을 꼽은 바 있다.

 

그런데 니느웨의 이사악은 이 대목에서 얼핏 과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실상에 있어서는 참으로 예언적인, 다시 말해 자기 시대를 훨씬 앞지르는 생태학적 통찰을 남겼다. 자식 걱정으로 늘 애틋할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애틋한 마음에 감염된 사람은 단지 사람들에게만 애틋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 심지어 상처 입은 뱀들에게도 애틋한 마음이 된다는 것이다. 고대의 동방 교부들에 따르면 온 창조계는 성령의 깊은 흔적과 표징으로 각인된 나머지 결국 하느님과 그분의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돈만 된다면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수님도 팔아먹고 불자들은 부처님도 팔아먹는』 세대라고 한다. 참으로 그렇다. 돈 몇 푼 때문에 하느님께서 우리 겨레에 주신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산하가 개발 논리의 무서운 대세에 밀려 형편없이 살이 뜯기고 형체도 없이 잔인하게 파괴되어 가고 있다. 몇 년 지나지 않으면 이 땅에 도로와 골프장밖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겠다는 우려가 과장만은 아니다.

 

이사악 압바께, 창조된 만물이 성령 안에서 우리 모두의 형제요 피붙이임을 깨닫도록 전구해 주십사 청하고 싶다. 그분은 이 땅과 하늘과 바다에, 그리고 그 안에 사는 모든 것에, 우리가 얼마나 깊이 이어진 「피붙이」인지 느낄 줄 아는 감각을 지니고 계셨던 것이다. 이사악 압바는, 신음하는 산하의 아픔에 애틋해 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 한낱 환경론자들의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임을 상기시켜주고 계시다. 나아가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하느님이 되어가는」 표지 중 하나임을 일러주고 계시다.

 

[가톨릭신문, 2005년 8월 14일, 이연학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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