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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교육을 고민하는 부모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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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27 ㅣ No.92

[경향 돋보기] 자녀교육을 고민하는 부모들에게

 

 

“풀 나무에게 햇빛과 비가 필요한 것만큼이나 성장기의 나에게는 어머님의 환한 얼굴과 사랑 가득한 눈길이 필요했고, 바로 그것을 흠뻑 받은 것이 내 삶의 가장 큰 축복 가운데 하나다.” 자녀 신앙교육을 고민하는 부모들에게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4월 13일은 성소주일, 자녀들의 사제 ? 수도 성소도 부모의 표양에서 비롯된다.

 

“김치에서도 하얀 부분에는 양분이 별로 없고 파란 부분에 많대.” 초등학교 때, 김치에서 파란 잎을 한 젓가락 집으며 학교에서 선생님께 배운 것을 말하면, 어머님은 나를 아주 대견해 하시는 눈길로 쳐다보셨다. 한글을 깨쳐 교회 책은 상당히 읽으셔서 우리에게 들려주실 얘기를 많이 가지고 계셨지만, 정규학교라고는 초등학교도 못 나오신 어머님께는 내가 학교에서 배워오는 것 하나하나가 신기하고 자랑스러우셨던 같다. 그래서 아주 사소한 것도 그분에게는 감탄의 대상이었고, 내가 배운 것을 말할 때마다, 환히 웃으시며 사랑을 가득 담아 보내주시던 눈길은 내 몸과 마음 깊이 스며드는 햇빛이며 자양분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부모들이 이른바 일류라는 학교에서 고등교육을 받으시고 사회적으로도 출세라는 것을 한 집안에서 자란 동료들에 비해 내가 훨씬 행운아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학교교육 분야에서뿐 아니라, 어머님은 매사에 그런 얼굴, 그런 눈길을 보여주셨다. 지금도 어머님을 생각하면 그런 모습이 떠오른다. 노인이 되시고 중풍으로 몸이 불편하게 되셨을 때 그 표정이 많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나는 큰 슬픔을 느꼈으나, 그때는 내가 이미 성인이 되고 난 뒤였기 때문에, 나의 성장에는 지장이 없는 일이었다. 풀 나무에게 햇빛과 비가 필요한 것만큼이나 성장기의 나에게는 어머님의 환한 얼굴과 사랑 가득한 눈길이 필요했고, 바로 그것을 흠뻑 받은 것이 내 삶의 가장 큰 축복 가운데 하나다.

 

 

인간의 최종 목표, 마땅히 도달해야 할 지점

 

대부분의 서양 언어에서 교육이라는 말은 “이끌어내다”라는 뜻을 가진 말뿌리에서 나왔다. 서랍에서 물건을 꺼내듯이 사람 속에 이미 있는 것을 밖으로 나오게 한다는 의미이다. 과연 인간에게는 거의 무한대의 잠재력이 숨어있어서 그것을 끌어내기만 하면 누구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태어날 때 천재가 아닌 인간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천재라고 하면 주로 머리 쪽의 능력을 생각하게 하지만, 정신 됨됨이 전체를 두고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머리뿐 아니라 마음의 됨됨이도 교육에 따라 악당에서 성인까지 모두 될 수 있는 것이다.

 

참된 교육자란 사람 속에 있는 좋은 것들을 잘 이끌어내는 사람을 가리킨다. 부모, 특히 아기를 오랫동안 몸속에서 키우고 밖으로 나온 뒤에도 제일 가까운 곳에서 가장 많이 접촉하는 어머니는 교육자 중에서도 첫 자리에 서신 분이다. 그분의 솜씨에 따라 무한한 가능성 중에 특정한 부분이 밖으로 나와 실제의 그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인간교육이든 종교교육이든 조금의 차이도 없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고서는 종교교육도 제 역할을 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따르면 인간교육과 종교교육이 최종 목표에서는 하나로 모아진다. 결국 무엇이 인간의 최종 목표, 마땅히 도달해야 할 지점인가 하는 문제에서 둘은 일치하는 것이다. 그 지점은 바로 사랑이다.

 

인간 최대의 행복과 보람은 사랑에 있다. 아무리 이런저런 분야에서 이른바 성공이라는 것을 했다 해도, 사랑을 주거나 받지 못하면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종교의 최종 목표 역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과 하나 되는 것이다. 이것을 요한은 그의 첫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공동번역 1요한 4,12).

 

이런 목표를 생각하며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는 정반대의 흐름이 거대한 세력을 이루어 우리와 맞서 움직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다시피 한 경쟁이라는 말이 그런 분위기를 잘 대변한다. 국가도 개인도 경쟁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면 이사회에서 밀려나고 사람들의 무리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다. 그래서 심하면 유치원에서부터 경쟁의 심리가 자라고 고등학생이 되면 그것은 거의 전투적인 색깔을 띠게 된다. 내신성적은 반 친구들 사이에서 비교 우위를 가려 매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두고는 친구가 따로 없고 모두가 경쟁대상일 뿐이다.

 

그렇게 해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일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렵다. 전국에서 제일 머리 좋은 학생들이 몰려드는 일류라는 대학일수록 변별력은 점점 더 모호해져서 그야말로 머리카락 한 올의 차이마저 분명히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학생에게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또 그런 상황에서도 경쟁을 요행히 뚫고 원하는 대학, 원하는 과에 들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직장을 얻고, 돈도 벌고, 출세도 한 사람은 있다. 그런 행운은 몇 만분의 일이라고 할 만큼 극히 적은 일부에게만 주어진다.

 

 

경쟁의 끝에 이르러 깨닫게 되는 것

 

그런데 여기서 가장 슬픈 사실은 이 숨가쁘고 힘겨운 과정을 거치면서 탈락하는 사람뿐 아니라, 경쟁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마저 참된 행복을 얻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정신없이 달려갈 때에는 그 길의 끝에 원하던 모든 것이 다 있겠거니 하고 모든 것을 무릅쓰며 달리지만, 일단 길의 끝에 이르고 보면 자신이 머릿속에 그리며 꿈꾸던 행복은 거기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행복은 그렇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을 누르고 올라서는 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은 그와는 정반대 쪽에 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인가? 남을 위하는 쪽, 상대방을 위해서 내가 손해 볼 각오를 하는 쪽,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가 무엇인가를 해줄 마음을 가지는 쪽에 있기 때문이다. 한때, 목숨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남보다 한 발짝이라도 앞서려 하고,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남을 이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던 사람도, 삶의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 참된 기쁨, 행복이 그 방향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궤도수정을 할 수 있어야만 그 삶이 아름답고 행복할 수 있다.

 

 

세계의 부자 빌 게이츠의 어머니가 가르친 것

 

머리 하나로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된 빌 게이츠가 금년 1월 24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세상의 100대 부자 가운데 70% 정도가 참석하여 해마다 가지는 세계 경제 포럼에서 한 연설 가운데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노력했고, 그러는 과정에서 큰 기쁨도 맛보았고, 성공을 하기도 했다. 앞으로도 이런 방향으로 계속 뛰고 사업을 번창시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분야에서 일하고 살았든지,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지나간 삶을 되돌아보고, 다른 방향도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금년 7월부터는 직업을 바꿔 마이크로소프트 회사의 실제 경영은 모두 다른 동료나 후배들에게 맡기고, 나 자신은 아내와 함께 설립한 자선기금을 통해서 세계의 기아와 질병,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작은 힘이나 보태는 일에 진력할 생각이다.”

 

그가 어떻게 이런 정신을 가지게 되었는가? 2007년 7월, 30년 만에 모교인 하버드에 돌아가 오래간만에 졸업장을 받는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하버드에 합격했을 때 어머니께서는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그러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남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성공해서 돈을 상당히 벌어 결혼을 앞두고 있을 때, 어머니께서는 간소한 약혼식을 열어주시고 그 자리에서 저의 배우자가 될 멜린다에게 보내시는 글을 큰 소리로 읽어주셨습니다. 그 끝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내어 놓아야 한다.’”

 

이처럼, 빌 게이츠의 어머님은 아들에게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인간교육과 종교교육을 하나로 만들어 아들의 정신을 형성해나갔고, 그것이 오늘날 열매를 맺고 있다. 그래서 빌 게이츠는 금년 7월부터 자신의 말대로 직업을 바꾸어 마이크로소프트 회사 회장직은 명의만 유지하는 정도로 하고, 우선 300억 달러를 들여 설립한 자선재단을 통해 세계의 빈곤, 질병,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투신할 예정이다. 선은 선의 물결을 일으켜 이런 그의 행보는 다른 이들에게도 서서히 확산되고 있다. 그래서 예를 들면, 그의 뒤를 이어 세계 제2의 부자로 알려진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은 빌 게이츠의 이 자선 재단에 310억 달러를 흔쾌히 헌납하였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 재산가 서열이 바뀌어 워렌 버핏이 1위로 올라섰다는 보도가 있었다.)

 

 

종교교육만으로 안 되는 세상

 

이런 일은 이렇게 큰 재산가들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 2월 2일자 한겨레신문에는 전주시 인후동 전북은행 지점 앞에서 구두 닦기와 수선 일을 하는 조규완(62세)이라는 분의 이야기가 실려있었다. 그분은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고, 네 번씩이나 큰 수술을 하여 대단히 불편한 몸인데도 어렵게 번 돈을 더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데 써달라며 설이나 한가위 등 의미 있는 기회마다 동의 주민 센터에 익명으로 기증하는데, 그 액수가 한 해에 4-5백만 원에 이른다고 한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 저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예물로 바쳤지만 이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가진 것을 전부 바친 것이다”(공동번역 루카 21,3-4). 헌금궤에 동전 두 닢을 달랑 넣는 과부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눈에는 빌 게이츠, 워렌 버핏, 그리고 조규완 씨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을 가졌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있으면, “남을 도울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고, 남에게서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부자도 없다.”는 말을 깨닫게 된다.

 

종교교육만으로는 안 되는 세상이 되었다. 자기 나름대로는 신심 깊은 사람이 아무리 많고 종교인구가 절대 다수를 차지해도 우리 사회가 실제로 따뜻해지고 좀 더 인간다운 세상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그런 종교는 허상에 불과하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네 반에 아주 어려운 친구는 혹시 없니?”

 

자녀의 수가 하나나 둘로 제한되어 있는 현실 속에서 그들과 부모는 모두 이기적이고 자신만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속에 잠겨버릴 위험이 많다. 어려서부터 남을 배려하고,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게 하는 쪽으로 교육을 시킨다면 그런 부모는 자녀를 참으로 행복한 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가 어떤 자리에서 체험담 발표를 하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새 학년을 맞아 반이 바뀌고 선생님과 친구들이 모두 다른 얼굴로 바뀌었을 때 하루는 엄마가 묻더라고 했다. “네 반에 아주 어려운 친구는 혹시 없니?” 그래서 그 어린이는 입은 옷이 눈에 띄게 초라하고 누가 잘 돌보아주지 않아서 헝클어진 머리 그대로 학교에 와서 반 친구들이 모두 왕따를 시키는 남학생이 생각나서 그 아이 이야기를 했다.

 

“저도 처음에는 그 남학생 편을 들면 친구들이 저마저 왕따를 시키고, 그 남학생을 좋아한다고 놀릴 것 같아서 많이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특히 어려운 이웃을 잘 돌보아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용기를 내어 그 아이에게 가까이 가서 도와주고 친구가 되어주기도 하며, 양말도 못 신고 실내화도 없는 그 아이를 위해서 엄마가 마련해 주신 예쁜 양말과 슬리퍼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사물함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다른 친구들도 차츰 그 학생에게 가서 친구가 되어주고 도와주었습니다.”

 

반이 바뀌었을 때, “반에서 너를 괴롭히는 학생은 없니? 선생님은 너한테 친절하게 잘 대해주시니?” 이렇게 묻지 않고, “네 반에 아주 어려운 친구는 혹시 없니?” 하고 물은 엄마는 자신의 자식을 참으로 행복한 사람, 위대한 인간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 이병호 빈첸시오 - 주교. 전주교구장, 1969년 사제품을 받고 1990년 4월 3일 주교가 되었다.

 

[경향잡지, 2008년 4월호,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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