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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삶의 지혜22: 테르툴리아누스의 호교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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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9 ㅣ No.151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22) 테르툴리아누스의 ‘호교론’에서

 

 

측정할 수 없는 하느님


[본문]

 

그리스도인들에게 흠숭의 대상은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다. …

 

하느님께서 인간의 눈에 보여질지라도, 인간은 하느님을 눈으로 볼 수 없다. 또한 하느님께서 은총에 의해 드러날지라도, 인간은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인간의 감각에 의해 측정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하느님을 측정할 수 없다. 하느님은 가장 진실하시고 위대하시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감각으로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은 볼 수 있는 눈과 만질 수 있는 손과 발견할 수 있는 감각들이 있다는 것인데 하느님은 이런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분이 결코 아니다. 무한한 것은 단지 알려진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든 측정 한계를 넘어서 있다고 할지라도 하느님은 측정될 수 있다. 그리고 하느님의 위대하심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게도 하고, 여전히 모르게도 한다. …

 

영혼이 육체의 감옥에 의해 억눌려지고, 기본적인 제도에 의해 제한되고, 강한 욕망과 색욕으로 약해지고, 거짓된 신들에게 노예가 될지라도, 영혼은 다른 아무런 이유 없이, 오로지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 도취.마비 또는 어떤 병의 상태로부터 회복된다. 그리고 영혼은 활력을 다시 갖게 된다. 하느님 홀로 참되기 때문이다. 「좋으신 하느님!」, 「전능하신 하느님」, 그리고 「하느님! 이루어 주소서」라는 말은 모든 인류에 의해 사용되어 온 표현들이다.

 

또한 하느님께서 재판관이라는 사실은 다음의 간결한 구절들로 증명된다.

 

「하느님께서 보신다」, 「나는 하느님께 맡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보답하실 것이다」

 

영혼의 증명은 그리스도인의 자연적인 본능에 의해 이루어진다. …

 

영혼은 인간의 도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바라본다. 영혼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거처를 알고 있다. 또한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 생기는 것이고, 하느님의 거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호교론」 17, 1~6

 

 

성경 안으로 들어가 그분을 만나라


[해설]

 

테르툴리아누스(155~220년)는 라틴어를 사용한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저술가이다. 그는 북아프리카 교회에 박해가 임박하자 카르타고의 전집정관과 지방총독에게 개인적으로 「호교론」을 저술하여 보낸다. 이 작품은 모든 이교인을 대상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관계당국에게 쓴 그리스도교 옹호서이다. 따라서 「호교론」의 주된 주제는 「보이는」 박해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될 수밖에 없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어떻게 측정할 수 없는 하느님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원천이 될 수 있는가?』란 질문을 재조명하면서 아름다운 하느님 찬미가를 제시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눈에 보여질지라도, 인간은 하느님을 눈으로 볼 수 없다. 또한 하느님께서 은총에 의해 드러날지라도, 인간은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감각에 의해 측정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하느님을 측정할 수 없다』

 

박해자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그리스도인에 대해, 보고 이해하고 측정한 것을 다시 한 번 더 점검해 보아야 한다. 볼 수 없는 분을 보았다고 단정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분을 이해했다고 착각하고, 이 착각을 근거로 측정할 수 없는 분을 측정했다고 오판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률가인 테르툴리아누스는 거짓된 소문이나 인간적인 오판을 근거로 자행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는 법적으로 부당함을 강조한다.

 

이어서 테르툴리아누스는 박해로 인해 믿음이 흔들리는 신자들을 향하여 말한다. 박해를 피하기 위해 볼 수 없는 분을 보았다거나 이해할 수 없는 분을 이해했다거나 측정할 수 없는 분을 측정했다는 잘못된 신심을 갖지 않기를 당부한다. 그리고 성경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고한다.

 

『성경을 듣는 사람은 하느님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은 믿음에로 이끌려지게 될 것이다』(「호교론」 18, 9).

 

오늘날 우리에게 피를 흘리는 순교의 박해는 없다. 그러나 해박한 인간적인 지식이나 개인적인 영적 체험이나 교회 안의 봉사직에 임명되었다는 이유로 볼 수 없는 분을 보았다거나 이해할 수 없는 분을 이해했다거나 측정할 수 없는 분을 측정했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다면, 테르툴리아누스 시대의 흔들리는 신자들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자신 안에 하느님을 가두지 말고 자신을 하느님께 맡기라고 권고한다. 하느님을 보기보다 이해하기보다 측정하기보다,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고 충고한다.

 

『하느님께서 보신다. 나는 하느님께 맡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보답하실 것이다』

 

이 충고는 기도가 아닐까?

 

결국 테르툴리아누스는 기도에 바탕을 둔 사람의 영혼이 성경 안으로 들어가 그리스도를 만날 때 하느님을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측정할 수 있음을 힘주어 말한다.

 

이 영혼은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전해진다(「영혼론」 27, 7~33, 11 참조). 천국을 바라보는 이 영혼은 항상 새롭게 하느님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거처를 알고 있는 이 영혼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하느님의 거처에서 내려온 이 영혼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새로운 순교에로 모든 영혼을 초대한다.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의 씨앗이다』(「호교론」 50, 13). 내 안에, 나의 가정에, 나의 공동체에 그리스도교의 씨앗을 뿌리자!

 

[가톨릭신문, 2005년 8월 28일, 이성효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 수원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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