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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서울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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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2-13 ㅣ No.35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서울 성가소비녀회 (상)

 

 

- 1948년 창설자 성재덕 신부가 고향을 방문하려 비행기에 오르기전 수녀들가 함께 했다(사진 위). 1954년 노기남 주교 주례로 다섯 명의 1회 수녀들이 종신서원을 했다.

 

 

창설과 영성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1943년 창립된 서울성가소비녀회는 작은 여종 '소비녀(小婢女)'들이 가난한 인간을 위해 사셨던 예수님처럼 가장 낮은 자들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고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는 수도공동체다. 

 

성가소비녀회가 설립될 당시 한국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전사자, 부상자, 고아와 무의탁 노인이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을 돌볼 수 있는 활동수도회는 거의 없었고 외국으로부터 파견받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 때 선교사제로 한국에 파견돼 서울 혜화동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성재덕(1920∼1992) 신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할 성교회의 일꾼이 필요하다고 결심했다. 성신부는 그와 뜻을 같이한 두명의 지원자를 모아 성가소비녀회를 창립하고, 당시 사목하고 있던 서울 혜화동본당에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도록 했다.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주었던 성신부는 논산본당에서 14년간 사목하면서 노인들을 위한 양로원을 세웠고 나환자들의 정착을 돕기 위해 성광원을 설립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투신했던 성신부의 의지는 오늘날까지 소비녀들에게 이어져 실현되고 있다.

 

성신부가 말한 '종의 영성'이자 성가소비녀회의 영성은 예수그리스도의 강생에서 비롯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 낮추어 이 세상에 내려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며 참다운 섬김의 모범을 보여왔던 것처럼,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에게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수도회가 12월 25일 성탄절에 시작된 데에는 가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사셨던 예수님을 본받아 소비녀들도 이웃을 섬겨야 한다는 창설자의 정신이 담겨있다.

 

두명의 지원자로 시작된 성가소비녀회는 지극히 가난한 처지였지만 인류구원에 협력한 예수님, 성모마리아, 요셉의 삶을 본받아 나자렛 성가정처럼 화복하고 행복한 공동체생활을 일궈나갔다. 45년 서울대교구의 승인을 받은 성가소비녀회는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소속 수녀들을 초빙해 정식 수도생활 양성에 들어가 47년 첫 서원자를 배출했다. "소비녀들은 저희들이 벌어서 불쌍한 사람을 먹이고 생활하라"는 성신부의 가르침에 따라 수녀들이 직접 삯바느질이나 궂은 일을 해 생활비를 벌었다. 노동과 본당일,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을 함께 병행해온 성가소비녀회는 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대구, 부산, 제주도 등지에서 고아를 돌보고 부상병을 치료하면서 고유 카리스마를 실천해나갔다. 49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수도회 규칙서를 정식 인가받은 수도회는 성신부가 논산본당으로 부임하고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수녀들이 떠나자 52년 자립기를 맞이했다. 자립기 동안 수녀회는 신설본당으로 수녀를 파견하고 성가양로원과 성가보육원을 운영, 성가의료원을 설립하면서 수도회의 정체성을 보다 명확하게 실현해나갈 수 있었다. 이후 본당과 병원 등 분원을 신설하면서 수녀회는 고유 사도직활동을 넓혀나갔고 한국교회 안에서 일익을 담당했다.

 

1969년 창립 25주년을 맞이한 수도회는 창립자인 성신부를 지도신부로 맞이하면서 보다 깊은 영성생활을 할 수 있었고, 창설자의 정신에 따라 공동체를 이끌어갔다. 수도회 창설 40주년이 되던 83년에는 성신부의 '내림의 정신'을 시대의 징표에 맞게 새로운 사명으로 적응하기 위해 내적쇄신의 시간을 가졌다. 그 결과 86년 수도회 명칭을 '성가수녀원'에서 '서울성가소비녀회'로 바꿨고 새 교회법에 재조명해 회칙을 개정했다. 교회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쇄신하고 사도직식별을 해온 성가소비녀회는 해외, 북한선교 또한 수도회의 고유한 사회복지 사도직 실천으로 이어갔다. 가난한 이들을 찾아 하느님의 눈과 마음으로 바라보며 식별하고 실천할 수 있는 공동영성을 키워나가기 위해 전 회원이 강의와 피정, 연수, 고리기도 등을 지속으로 펼쳐나가고 있는 수도회는 소외된 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주님의 안배를 믿고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되어 보시오"라고 말한 창설자 신부의 뜻을 회원들 삶 안에서 실천해나가고 있다.

 

창립 후 58년이 지난 오늘, 500여명의 회원과 천 여명이 넘는 여러 신비체 가족들과 한가족을 이루며 살아온 성가소비녀회는 작은 겨자씨 한알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생명을 품어주는 큰 나무로 성장해나가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26일, 이진아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서울 성가소비녀회 (하)

 

 

- 수족이 불편한 성가양로원 할머니들에게 실습나온 수련자가 밥을 먹여 드리고 있다(사진위). 1985년 성 베드로 신부 영명 축하식에서 축가를 부르는 수녀들.

 

 

사도직 활동

 

성가소비녀회의 사도직은 광복 전후 여러 가지 어려운 사회상황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예수께서 하늘에서 세상에 내리셨다. 오늘 천주께서는 신자를 통해, 특히 수도자를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 내리신다. 우리 성가소비녀들이 할 일은 바로 예수와 같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려야 하는 것이다"라는 창설자 성신부의 가르침 아래 소비녀들의 사도직은 실천돼 왔다. 즉 가장 가난하고 미소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일들을 하는 것이 소비녀들의 사도직인 것이다. 이에 따라 수녀들은 의료사도직을 비롯해 장애인·아동·노인복지 등 사회복지사도직과 본당선교사도직을 실시해오고 있다. 

 

첫 공동체의 활동은 1947년 구합덕 보육원을 맡아 고아들을 돌보는 것으로 시작됐고 이후 병원, 양로원, 본당, 학교, 무료복지병원활동 등으로 번져 나갔다. 58년 동안 성가소비녀회의 사도직 변천 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처음 시작한 사도직에서 고정적인 상태로 머물지 않고, 시대와 사회적인 요구에 따라 공동체가 이를 함께 식별해 계속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창립 정신을 실현해 가고 있다는 점이다.

 

1951년 한국전쟁으로 부상당한 군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으로 시작된 의료사도직은 당진 소화의원, 부여 규암병원, 서울의 성요셉자선병원, 의정부 성모병원, 대전성모병원 등, 그 동안 14개의 의료기관 활동으로 이어졌다. 1958년에는 수도회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병원의 필요성에 따라 진료소로 문을 연 성가의원은 3년 후 가톨릭 의과대학 부속 성가병원으로 개설허가를 받았으며 규모가 커짐에 따라 월곡동 성가병원으로 이전한 후 다시 부천 성가병원으로 발전했다. 현재 수도회는 무료자선병원으로 전환한 성가복지병원과 일반종합병원인 부천 성가병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밖에 국립의료원과 세브란스병원, 이시돌의원에서 치료와 간호, 원목활동을 하고 있다.

 

아동복지사도직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전쟁고아들을 위해 당진 소화보육원과 성가보육원 등 네 군데의 보육원에서 비롯됐으나 원아들이 성장하면서 차츰 규모가 축소되고 82년에 이르러 모두 폐쇄했다. 전쟁 후 사회의 요구에 따라 나자렛여자 기술학원, 가톨릭구제회의 활동도 활발했으나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폐쇄됐다. 초창기부터 시작된 방문사도직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그 한 형태로 본원 주변의 가난하고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위해 강원도 양양의 현북가정간호, 서울 봉천동가정 간호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52년 양로원 인수로 시작된 노인복지사도직은 부천 성가요양원 운영, 현재까지 100여 명의 무의무탁한 노인들을 돌보면서 계속되고 있다. 또한 본원 내에 안나의 집을 설립, 1977년부터 수련자들과 수녀들이 노인들을 돌보며 국가의 보조 없이 수도회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 밖의 노인복지 시설로는 제주도의 성요셉 양로원과 성이시돌양로원, 강원도 양구에 위치한 석현리 안나의 집, 그리고 경북 안동의 안동 안나의 집이 있다.

 

성가소비녀회는 1991년부터 부천시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장애인의 취업과 복지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춘천의 밀알재활원과 제천의 살레시오의 집을 운영하고 있는 수도회는 정신지체장애인과 한 가족으로 생활하면서 생활과 교육, 재활을 돕고 있다. 또한 수녀들은 1987년부터 경기도 양평군의 상록촌 안에서 음성 나환자들과 함께 지내고 있으며, 폐결핵 환자들을 위한 양평의 희망의 집에서는 치료와 재활을 돕고 있다.

 

재소자들의 사회적응을 위해 그룹홈을 운영하고 있는 수도회는 1970년 이후 한국교회 교세 증가에 따라 본당에도 많은 수녀들을 파견했다. 현재 전국의 본당과 공소 44곳에서 선교 사도직을 하고 있으며 북한선교를 위한 준비도 마련하고 있다. 본원의 성가유치원으로 시작된 교육사업은 유아교육과 더불어 중요한 선교수단의 계기가 됐다. 최근 공부방도 함께 운영하고 있는 성가소비녀회는 1962년부터 30여년간 부천지역 여성교육에 이바지해 온 소명여자중고등학교를 93년 수도회의 고유정신에 따른 사도직 식별 후 인천교구에 양도했다.

 

1990년 이후 카리스마에 따른 사도직 식별이 의식화돼 가면서 고유 사도직을 점차 해외로 확대한 수도회는 필라델피아,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중국 등지에서 사회복지사도직을 전개하고 있다.

 

성가소비녀회는 특별히 지난해부터 창립자의 정신을 공동영성으로 심화시키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현장을 체험하면서 직업과 생활방식으로 연계할 수 있는 사도직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그 결과 올해 2월부터 가난한 지역에서 노동자들과 도시빈민, 농민들과 함께 일하고 삶을 나누면서 4개의 공동체를 꾸려가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9월 2일, 이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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