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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삶의 지혜24: 대 그레고리우스의 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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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9 ㅣ No.153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24) 대 그레고리우스의 ‘편지’에서

 

 

“성서 읽기를 간절히 권유함”

 

[본문]

 

당신께서는 영적 능력, 부유함, 자비의 선물뿐만 아니라 거룩한 삼위일체로부터 사랑의 선물을 받으셨지만, 세상사로 말미암아 늘 바쁘고 여러 가지 많은 일에 끊임없이 참여하여 당신 구원자의 말씀을 날마다 읽는 데에 소홀하였습니다. 

 

성서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피조물에게 보내신 편지가 아닙니까? 당신께서 만약 여행 중에 세속의 황제가 보낸 편지를 받으셨다면, 세속의 황제가 쓴 편지를 읽기 전에는 쉬지도 잠자지도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들과 천사들의 주님이신 하늘의 황제께서 여러분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당신께 편지를 보내셨다면, 매우 고명하신 당신께서는 그 편지를 열심히 읽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영원한 것을 더 열망하고 당신의 영혼이 하늘의 평화를 간절히 바라면서 불타오르도록 하느님의 말씀을 알기 위해 날마다 노력하십시오. 

 

- 대 그레고리우스의 「황제 주치의 테오도루스에게 보낸 편지」

 

 

“연인의 편지라면 보고 또 봤을텐데”


[해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그리스인들만 친구로 삼으십시오. 다른 야만인들은 짐승 다루듯 해야 합니다』라고 조언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야만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그리스어로는 「바르바로이」였다. 본디 야만인이라는 낱말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버벅거린다는 의성어였다. 이 낱말은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나온 전형적인 유물이다. 

 

4~5세기의 교회도 제국의 경계 밖에 있는 야만인에게 그리스도교를 선교하려는 열의를 보이지 않은 것 같다. 대 그레고리우스 교황에 이르러서야 다른 민족에 대한 시야가 넓어진다. 그에게 야만족들은 제국의 적이지만 동시에 구원의 대상인 하느님의 자녀였다. 이 편지는 이러한 열린 시각을 지닌 대 그레고리우스가 쓴 857통의 편지 가운데 하나이다.

 

이제는 통신수단이 너무 발달하여 편지를 이-메일로 주고받다보니 편지에도 사람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다. 가끔, 아니 일 년에 한두 번 친필로 쓴 편지를 받으면, 그 내용이 평범한 이야기일지라도 읽고 또 읽곤 한다. 

 

그런데 그 편지가 몇 년 간 떨어져 있던 어렸을 때의 친한 벗이나 매우 보고픈 연인에게서 왔다면 상황이 또 틀려진다. 편지를 안주머니에다 넣고 다니면서 보고프면 장소와 시간에 상관없이 읽어볼 것이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사랑의 편지를 보내셨다. 우리 마음에 회개와 참회의 정신을 되살려 주고, 죄의 용서를 받는데 도움이 되며, 당신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하라는 내용이 담긴 매우 긴 편지이다. 그 편지를 받자마자 암기할 정도까지 읽고 또 읽지 않겠는가? 사실 많은 교부가 이렇게 성서를 읽어 성서 전체를 암기하였다.

 

성서를 읽고,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는 편지를 보낸 하느님께 답장을 써야 한다. 이 답장이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인 기도이다. 

 

성서 해석의 대가인 오리게네스는 성서를 읽을 때 깨달음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할 것을 권고하였다. 성서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이자 은총이기 때문이다. 

 

그는 제자 그레고리우스 타우마투르구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무엇보다도 성서를 신앙의 원칙과 하느님 마음에 들려는 의도로 읽도록 전력을 기울이시오. 성서를 이해하고자 하는 이에게 대부분 기도가 필요합니다』(오리게네스, 「그레고리우스에게 보낸 편지」 3).

 

교부들은 성서를 지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으며, 감추어진 지식을 얻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성서에서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성서 읽기의 궁극적 목적을 하느님과 만나는 사랑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성서에서 『하느님을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고 이웃을 하느님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라고(「그리스도교 교양」 1, 7, 10) 단언하듯이 성서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가 사랑이다. 따라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성서를 모르는 것이며, 성서를 모르는 것은 하느님을 모르는 것이다. 

 

성전의 중요성

 

성서와 관련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성전의 중요성이다. 

 

디모테오에게 보낸 편지나 디도에게 보낸 편지의 저자가 바오로가 아니라는 사실은 학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독일의 저명한 학자는 이 편지들의 저자가 폴리카르푸스라는 가설을 폈다. 여기서는 저자가 누구냐를 밝히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경전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리는 같은 저자의 작품일 수도 있는 「폴리카르푸스의 편지」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 신자들의 성전에 대한 한 단면이 아닐까? 

 

신자들이 성전의 맨 앞자리와 맨 밑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수많은 보고를 담고 있는 교부 문헌들을 너무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교회는 성전(聖殿)을 짓는 일뿐만 아니라 성전(聖傳)을 연구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가톨릭 교회를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이 성서와 성전이기 때문이다.

 

[가톨릭신문, 2005년 9월 11일, 하성수(한국교부학연구회, 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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