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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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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2-12 ㅣ No.28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상)

 

 

- 창설자 제2대 평양 지목구장 요한 에드워드 모리스 몬시뇰.

 

 

창설자와 수도회 영성

 

한국교회에 외국 선교사들의 손길이 곳곳에 펼쳐지고 있을 때, 당시 제2대 평양지목구장이었던 요안 에드워드 모리스 몬시뇰(1889∼1987)은 최초의 한국인수도회를 창설할 것을 결심했다. 

 

강완숙(골롬바), 이순희(루갈다) 등 여성순교성인들의 발자취를 볼 때 모리스 몬시뇰은 한국교회의 복음화에 여성의 역할이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당시 한국에 진출해 있던 미국 메리놀 수녀회 선교사들이 한국문화 이해와 언어소통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한국인선교사들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던 것이다. 이같은 요청에 따라 한국 자체에서 수녀회가 탄생하게 됐다. 바로 1932년 6월 27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축일 날 봉헌된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이다. 

 

이로 인해 「우리 민족과 온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봉사하기 위해(회헌 1조)」 창설된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는 외국인 선교사와 함께 이 땅의 복음화 기틀을 다져가기 시작했다. 

 

1930년 평양지목구장으로 선출된 모리스 몬시뇰은 1914년 사제품을 받고 21년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23년 한국선교사로 임명된 모리스 몬시뇰은 평양 영유본당사목을 비롯해 선교사들을 위한 어학원을 세웠다. 

 

또 한국인 성직자와 수도자 성소에 큰 관심을 가졌던 몬시뇰은 양기섭·강영걸 신부, 제5대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가 사제품을 받고 교구 사제로 활동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줬다. 이뿐 아니라 신학생을 로마와 일본으로 유학보내기도 했다. 

 

이같은 노력과 함께 모리스 몬시뇰은 한국인 수녀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24년 한국으로 진출한 메리놀회 제노베파, 실베스텔, 프란치스카, 장정온 수녀에게 수련을 위탁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지원자 수는 급속히 늘었고, 마침내 1938년 2월 18일 교황청으로부터 수녀원 창립 및 회헌을 인준받게 됐다. 

 

모리스 몬시뇰의 선교열의는 수도회 창설뿐 아니라 34년 월간잡지 「가톨릭연구」 창간으로 이어졌고, 평양지목구 가톨릭운동연맹을 조직해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활성화하고 문맹퇴치, 계몽에 힘썼다. 그가 평양지목구장 몬시뇰로 임명될 때만 해도 9개본당, 65개 공소, 신자수 7천여명이었던 교세가 6년만에 19개 본당 134개 공소, 17738명으로 증가했다. 

 

신사참배에 반대의사를 표명했던 그는 재임 6년만에 지목구장을 사임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59년 7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국선교사로 재임명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지도, 강화·답동본당 보좌를 지냈다. 

 

30년 넘게 해외선교에 힘을 쏟았던 그는 건강악화로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고 1987년 98세의 일기로 선종했다. 이같은 모리스 몬시뇰과 초창기 메리놀회 수도자들의 열의와 노력으로 성장을 거듭해온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는 한국교회 창설의 자립정신과 순교의 전통을 수도회의 정신으로 이어가고 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의 창립정신은 성 아우구스띠노 규칙과 회헌,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의 사도적 모범을 바탕으로 한다. 이는 「마음을 드높이는 기도정신과 한마음 한뜻으로 가족 공동체를 이루는 공동체 정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정도까지 자아를 포기하는 선교정신」으로 요약된다. 

 

이를 위해 수도자들은 매일 미사와 시간기도, 성체조배, 십자가의 길 등의 기도와 활동, 노동과 휴식, 기쁨과 괴로움을 나누는 공동체 정신을 실현하며 69년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4월 8일, 이진아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중)

 

 

- 페루에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의 한 수녀와 현지인이 다정하게 걷고 있는 모습.

 

 

서울 성북구 정릉 3동 산1-15번지, 서울 높은 산자락에 위치한 수녀원에 이르면 도심의 분주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수도자들의 그윽한 영성의 향기만 고요 속에 묻어 나온다. 산사의 침묵 가운데 유일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수녀원 정면에 자리한 수련원 증축공사장에서 나오는 조용한 소음뿐이다. 인부들도 수녀원 분위기에 젖은 탓인지 사람들의 소리는 쉬이 들리지 않는다. 한국교회의 첫 방인 수도회로서 수도자들의 역할이 컸기에 현재 수련원을 넓혀야할 만큼 수도자들이 많이 늘어났다. 이같은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는 크게 창설기·시련기·재건기·발전기 나뉘어 오늘에 이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931년 평양 영유읍 상수구리 257번지에 기와집 2채를 매입하고 5명의 지원자를 양성하면서 본격적인 수도회의 역사는 시작된다. 모리스 몬시뇰에 의해 태어나 수도회 첫 서원식이 있기까지의 창설기에는 메리놀 수녀회 제노베파 수녀를 비롯해 실베스텔 수녀, 프란치스카 데레사 수녀, 장정온 수녀가 수녀양성을 맡았다. 상수리 모원에서 공동생활을 함께한 수도자들은 모두 17명. 이들은 선교수녀회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초창기 일손이 모자라는 본당에 나가 성가를 가르치고 어린이들의 교리를 맡기도 했다. 36년에는 창설자인 모리스 몬시뇰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됐고, 38년 2월 18일 교황청으로부터 수녀회 창립 및 회헌을 인준받았다. 

 

수녀원이 창설된 지 꼬박 6년만에 교황청의 인준을 받은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는 이를 계기로 평양 관후리, 대신리, 서포, 평안북도 비현, 신의주, 마전동 본당과 평양교구 내 학교, 사회복지 시설 등에서 폭넓은 선교활동을 펼쳤다. 

 

초창기 어려운 여건 속에서 수도생활과 더불어 선교를 해왔던 11명의 수녀들은 1940년 6월27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축일날 제1회 서원식을 맞게됐다. 한국교회가 낳은 수녀회의 맏딸이 된 것이다. 

 

41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사태가 악화되면서 메리놀 선교사 전원이 본국으로 떠나면서 수도회는 시련기를 맞는다. 이로써 한국인 메리놀 선교사 장정온 수녀만 남았고 장수녀는 제4대평양 대목구장 오세 주교로부터 원장 임명을 받았다. 일제하의 힘든 상황에서 수녀회를 이어가던 중 45년 광복의 기쁨을 맞았지만 이것도 잠시뿐, 수도회 첫 종신서원 예정자 면담이 있었던 49년 홍용호 주교가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수도회 건물과 재산은 몰수당하고 수녀들은 강제해산됐다. 50년에는 장정온 수녀도 공산당에게 피납됐고 결국 11명의 서원수녀와 1명의 수련자를 북녘에 남겨둔채 17명의 서원수녀와 3명의 수련자들만 남하했다. 

 

부산으로 내려온 수녀들은 제2대 원장 강베드로 수녀와 함께 부산 대청동독립 가옥을 신축해 본원으로 사용하면서 남한에서 재건기를 맞이했다. 다시 수련소를 재건했고 53년에는 청주로 최초의 분원을 파견하면서 수도회 선교활동을 이어갔다. 서울 흑석동으로 다시 본원을 옮긴 55년, 당시 춘천교구장이었던 구주교의 도움으로 춘천 효자동에 수련소를 재개했고 부산, 인천, 서울, 강원도 등지에서 본당·교육 사도직을 진행해갔다. 

 

57년에는 드디어 제1차 총회를 개최할 수 있었고 파물라 수녀를 3대 총원장으로 선출했다. 

 

서독 파다본 교구에 의료 및 본당사도직을 위해 수녀 4명과 지원자 36명을 외국으로 파견하기도 했던 수도회는 같은 해인 62년 서울 정릉으로 본원을 이전하고 69년에는 재단법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로 독립재단 인가를 받았다. 

 

남한에서 평양교구 소속으로 활동을 해왔던 수도회는 70년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과 평양교구 캐롤 교구장간의 협약으로 통일이 될 때까지 서울대교구 소속 수도회가 됐다. 현재 본원에 자리한 이후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는 창설자의 정신을 이어 당시 복음말씀에 목말라하던 청년들을 중심으로 가톨릭성서모임을 전개, 전국적으로 성서사도직을 확대해나갔다. 한민족과 온인류를 위해 선교영역을 넓혀갔던 수도회는 83년 부산 영도 성모의 집을 개원하면서 수도회 첫 빈민사목을 시작했고 현재 미국, 중국까지 선교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장정온 초대원장으로부터 시작된 수도회의 역사가 현재 13대 총원장인 김숙자 수녀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4월 22일, 이진아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하)

 

 

사회복지시설 '부산 아이들의 집'에서 사도직을 실천하고 있는 수녀들.

 

 

'우리 민족과 온 인류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창립된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는 본당사도직을 중심으로 교회와 사회 전 영역에서 광범위한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다. 

 

수도회 창립초기부터 의료사도직과 사회복지 사도직을 병행해온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는 교구 청소년 사도직을 비롯해 80년대 이후에는 노인, 장애인 등 사회복지분야, 90년대는 도시빈민, 외방, 북방선교까지 참여하고 있다. 

 

전국 14개 교구 85개 본당에 171명의 수녀를 파견하고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는 독일, 미국 등 해외교포본당에도 수녀를 파견, 본당사제를 도와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돕고 있다. 

 

파견된 수녀들은 본당의 특성과 지역이 필요로 하는 일에 주력하지만 수도회의 특별 카리스마인 성서공부를 통한 신자재교육에도 힘을 쏟는다. 본당사도직과 함께 중점적으로 펼치고 있는 또 다른 사도직은 지난 30년동안 수도자들의 수도생활은 물론 제반 사도직 활동에서 영성적인 뒷받침을 해온 성서사도직이다. 수도회는 수도자 양성초기부터 성서 그룹공부와 성서 40주간으로 성서교육을 실시해 신자들의 교육에 앞서 수도자들의 영성생활을 풍요롭게 한다. 

 

이같은 성서사도직은 당시 수도자들이 교회 내 성서 전문 학자들을 찾아 다니며 자문과 도움을 받아 수녀원 내에서 시험단계를 거쳐 1972년 대학생을 중심으로 처음 시도됐다. 이듬해부터 전국 대학생들에게 급속도로 확산됐던 성서모임은 74년부터 직장인들과 어버이들이 참여하면서 어버이 성서모임으로 정식 발족됐고 '가톨릭성서모임'으로 개칭했다. 

 

가톨릭 대학생 성서모임은 87년 서울대교구 소속 청년 성서모임으로 전환됐고, 어버이 성서모임은 수도회에서 관할하고 있다. 

 

성서모임과 아울러 수도회는 성서모임 가족지였던 '성서와 함께'를 84년부터 월간잡지로 발간하면서 성서관련 전문 잡지로 자리를 굳히며, 성서 및 영성서적도 펴내고 있다. 

 

본당·성서사도직과 함께 시대의 요청에 따라 교육, 의료사도직을 병행해온 수도회는 다수의 유치원과 어린이 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강남 성모병원, 북한 신포 원전 의무실 등 3개 병원 원목실에서도 일하고 있다. 서울, 전주 교도소 등지에서 교정사도직도 수행하고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는 바오로 선교, 무료급식소, 가출소녀쉼터, 공부방 등 빈민사도직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장애인, 양로원도 운영도 하고있는 수도회는 한국교회가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페루 리마의 쵸시카 교구에 수녀를 파견하고 94년부터 외방선교를 시작했다. 5명의 수녀가 빈민지역인 깐떼 그란도에서 공소사목과 사회사목, 보건소를 돕고 있으며 루린 교구의 비야 엘 살바도르 지역에서도 선교활동을 하고있다. 이와 함께 북방선교를 위해 중국 길림성 용정시 용정본당과 제일 유치원에 수녀를 파견하고 있다. 

 

다양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의 새천년기 또다른 선교 영역은 북한선교다. 평양에 모원을 두고 있는 수도회는 북한을 새로운 선교지가 아닌 돌아가야 할 고향으로 받아들이고 입회 때부터 북한선교를 공동체의 소명으로 인식하는데 뜻을 같이하고 있다. 따라서 수도회의 북한선교 방향은 주교회의 민족화해 위원회와 뜻을 같이하며 공조체제를 이루고 있다. 

 

50여년간 신앙의 불모지가 된 북한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도회는 외방선교와 사회복지, 빈민사목 등 사회선교의 경험을 선교의 발판으로 삼고있다. 또한 북한사회와 주민들을 이해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의식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기회가 주어지는대로 북한선교의 디딤돌이 될 수 있도록 수녀를 파견하고 있다. 

 

1932년 5명으로 시작된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는 현재 476명(수련자 제외)의 수도가족들이 70년의 역사를 이어가며 수덕을 쌓는 수도생활과 함께 민족과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5월 6일, 이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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