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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삶의 지혜28: 막시무스의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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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9 ㅣ No.157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28) 막시무스의 ‘설교’에서

 

 

“자선은 영혼을 씻는 또 다른 방법이다”


[본문]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습니다. 죄사함을 받는 세 가지 중요한 종교적인 행위는 기도와 단식과 자선입니다. 영혼을 씻는 또 다른 방법은 자선입니다. 만일 세례를 받고 나서 인간적인 나약함 때문에 죄를 지었다면, 자선행위를 통해서 그 죄를 깨끗하게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선을 베풀어라. 너의 모든 죄가 깨끗이 사해졌다.’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죄를 더 자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바로 자선입니다. 왜냐하면 세례는 단 한 번만 받을 수 있고 세례를 통해서 받을 수 있는 용서도 단 한 번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선을 베풀 때마다, 우리는 그 자선 행위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세례와 자선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죄를 용서해주는 자비의 두 원천입니다. 세례와 자선, 이 두 기둥을 꼭 붙잡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비록 세례를 받고 나서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자선의 강물에 몸을 담그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비를 얻을 것입니다.” 

 

막시무스의 ‘설교’ 22A장 4절

 

 

“자선, 신자임을 증거하는 행위”


[해설]

 

4세기 말 토리노의 주교였던 막시무스 1세(?~408/423년)는 자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선을 세례와 비교하여 설명한다. 세례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지만 세례는 단 한 번밖에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세례를 통한 죄사함의 기회도 단 한번 밖에 없었다. 그래서 교부들은 죄사함을 받는 세 가지 중요한 종교행위로 기도와 단식과 자선을 강조하였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실천함으로써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 2세기 중엽에 로마의 클레멘스가 썼다고 전해지는(실제로는 익명의 저자가 쓴 편지이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도 이렇게 말한다. “단식이 기도보다 더 낫습니다. 그러나 자선은 단식과 기도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클레멘스 2서’ 16장 4절).

 

전통적으로 사순절과 부활절 강론의 중요한 주제가 바로 단식과 자선이었다. 교부들은 단식과 자선에 대한 아름답고 훌륭하고 주옥같은 강론들을 남겼다. 예를 들어, 레오 대교황은 사순절을 맞이하여 신자들에게 단식과 자선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우리는 이 거룩한 단식의 절기에, 평소 항상 수행해야 하는 자비의 행위를 더욱 더 열심히 수행해야 합니다”(레오 대교황, ‘설교’ 41,3).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가난한 사람이 곧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자선을 베푼 것이 된다고 교부들은 가르쳐왔다. 아우구스티누스도 말한다. “비록 그 분은 우리가 가진 것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진정한 주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우리가 당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시기를 바라시면서 황송하게도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몸소 굶주리셨습니다. … ‘진실히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배고프신 그리스도를 조롱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가 되는지 잘 생각해야 합니다’”(아우구스티누스, ‘설교’ 60장 11절). 

 

이처럼 교부들은 가난한 이와 그리스도를 동일시하면서 가난의 영성과 자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라는 사실을 가장 잘 알 수 있도록 해주는 행위가 바로 자선이다. 따라서 자선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랑의 실천인 것이다. 자선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실천해야만 하는 의무이다. 히에로니무스에 의하면,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선을 베푸는 의무를 면제받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냉수 한 잔은 대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에로니무스, ‘마태오 복음 주해’ 10장 42절). “당신이 자선을 베풀 때에는 당신의 오른 손이 무엇을 하는지 당신의 왼 손이 모르게 하시오”(마태 6,3)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우리 모두는 겸손하게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 자선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자 권리이지 선택이 아니다. 자선을 베푼다는 것은 단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일 뿐이다.

 

교부들은 부자들이 사용하고 남은 것은 모두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으로 베풀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고한다. 교부들에 의하면, 부자들이 가지고 있는 잉여(剩餘)의 부는 당연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부자의 잉여물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필수품”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당신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결코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아우구스티누스, ‘시편 상해’ 147장 12절).

 

옛날 가난하고 못살던 시절, 우리 교회는 유럽 교회와 미국 교회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그들 교회들이 한국 교회를 도와준 것은 잘 사는 몇몇 사람들이 거액을 기부한 돈을 모아서 우리를 도와준 것이 아니었다. 일반 신자들과 할아버지 할머니들, 그리고 고사리 같은 어린이들이 아끼고 절약해서 정성스럽게 낸 돈들을 모아서 가난한 교회인 한국 교회를 도와주었던 것이다. 이제 한국 교회도 더 많이 더 자주 가난한 교회를 도와주어야 하고, 도시 본당은 가난한 시골 본당을 더 많이 더 자주 도와주어야 한다. 몇 차례 자선을 베풀었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자선의 의무와 권리가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으로 알아보게 하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자선이다. 따라서 자선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행위인 것이다.

 

신자 여러분, 우리 모두 자선의 강물에 몸을 담가 주님의 자비를 입읍시다.

 

[가톨릭신문, 2005년 10월 16일, 노성기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광주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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