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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삶의 지혜29: 아우구스티누스의 인내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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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9 ㅣ No.158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29) 아우구스티누스의 ‘인내론’에서

 

 

“인내의 반대인 자살”

 

[본문]

 

삶을 찾는다면서 스스로에게 죽음을 안겨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정말 욥에게서 시선을 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들은 현재의 삶을 없애면서 동시에 미래의 삶도 포기합니다. … 

 

이들은 인내하지 않고 죽음에 굴복하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을 평화스럽게 참아내야 했을 것입니다. 만일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살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욥 성인은 악마의 흉포함이 재물, 자녀, 자신의 몸에 가한 그토록 심한 불행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 

 

물론 욥이 인내를 잃어버렸다면, 아내가 원했던 것처럼 불경스런 말을 했거나, 아내가 제안하지는 않았지만 자살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했다면, 그는 죽었고 “인내를 저버린 자들은 불행하리라!”(집회 2, 14)라는 성경 말씀처럼 불행한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 

 

존속 살인자는 일반 살인자보다 더 죄가 무겁습니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살해했기 때문입니다. 존속 살해 중에서 자기와 가장 가까운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이 이론의 여지없이 가장 흉악무도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이보다 더 흉악무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보다 더 가까운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인내론’ 14

 

 

“수난에 동참하면서 인내 청해야”

 

[해설]

 

영혼의 목자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는 인내가 무엇인지 신자들에게 설명한다. ‘인내론’은 미사 중에 행한 강론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어떤 사목적인 긴박한 이유가 있었기에 인내에 관한 주제로 강론을 했을까? 

 

교회에서 봉사를 하다보면 긴급히 해결해야 할 사목적인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5세기 초 북아프리카 교회도 도나투스 추종자와 펠라기우스 추종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맞서야 했다. 도나투스파는 가톨릭에서 분열되어 자살을 마치 순교로 가르치고 있으며 펠라기우스파는 하느님의 은총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우선시하는 가르침을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직접적이고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일까? 그래서 잘못된 이론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도 침묵해야만 할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인내란 주제로 이 두 가지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다. 먼저 ‘하느님의 인내’를 설명한다. “그분의 질투에는 원한이 없습니다. 그분의 분노에는 격정이 없습니다. 그분의 연민에는 슬픔이 없습니다. 그분의 후회에는 뉘우침이 없듯이 그분의 인내에는 견딤이 없습니다.”(‘인내론’ 1, 1) 

 

이어서 인간의 ‘참 인내와 거짓 인내’를 설명한다. “강도들은 여행자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지새웁니다. 이들은 통행하는 무죄한 이들을 붙잡기 위해 악천후 속에서도 몸을 움직이지 않고 그들의 그릇된 생각을 바꾸지 않습니다. … 여기에는 칭송받을 그 어떤 것도, 또한 배워서 유익할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 인내는 지혜의 동반자이지 탐욕의 노예가 아니며, 선한 양심의 친구이지 무죄함의 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인내론’ 5, 4) 

 

그리고 “인내란 하느님 자녀의 선물입니다”(‘인내론’ 24)라는 결론을 제시한다.

 

위의 본문은 거짓 인내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에 속하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모범으로 보여야 한다. 덕스런 삶이 요구된다. 교회의 봉사자에게 인내의 덕이 필요함은 부연할 필요도 없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세상 속에서 그냥 고통을 참는 것이 인내가 아님을 강조한다. 시쳇말로 한을 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인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탐욕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참 인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경제적인 가정적인 이유 등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그리스도인은 이를 악물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혹은 절망 속에서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면서 하느님 자녀의 선물인 인내를 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통스런 세상 속에서 선한 양심의 친구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내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을 하느님의 말씀(욥기)에서 찾으면서 당시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성경)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성전=거룩한 전통)이 있다. 만일 삶에 직면한 중대한 문제가 있다면, 아우구스티누스의 해결 방법을 음미해 볼만 하다.

 

“오, 부패할 육체 때문에 짓눌린 영혼아, 네가 할 수 있다면 알지어다. 수많은 그리고 변화무쌍한 지상의 생각들에 짐 지워진 영혼아, 네가 할 수 있다면 알지어다. 하느님은 진리이시다.”(‘삼위일체론’ 8, 2, 3)

 

[가톨릭신문, 2005년 10월 23일, 이성효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수원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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