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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삶의 지혜14: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티모테오 서간 강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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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9 ㅣ No.143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14)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티모테오 서간 강론’에서

 

 

진짜 아름다움


[본문]

 

영혼과 육신 모두를 통해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찬미를 드립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겠지요. 『영혼이라면 몰라도, 육신으로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나요?』

 

그렇고말고요, 물론입니다. 육신을 통하여 주님께 영광을 드린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육신으로 죄를 짓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고, 술고래나 음식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아울러 외모만을 치장하는 데 안달하지 않고, 건강차원을 넘어서 육체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을 피하며, 음행을 저지르지 않는 것입니다.

 

여인들도 몸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꾸며주신 그대로 만족하여, 어떤 것도 바르거나 치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장품으로 도배를 하거나, 물감으로 얼굴을 찍어 바르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완벽하게 만드신 것에 무엇인가 덧붙이는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그분께서 하신 것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그러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아름다움 자체이신 분께서 꾸미신 것을 보완할 수 있는 예술가가 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화장을 하고, 치장을 하여 자신을 뜯어 고치는 것은 창조주를 모욕하는 것일 뿐이며, 단지 그것을 보고 좋아하는 이들에게 유혹이 될 뿐입니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저도 그러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남정네들이 좋아 하니 안하고는 배길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답답하지만, 언뜻 보기에 수궁이 가는 변명입니다. 열렬한 사랑을 받고 싶어 하지 않는 여성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여러분을 이미 탄복할 만큼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화장으로 꾸며지는 것이 아니라, 정숙과 덕행으로 가꾸어지는 것입니다.

 

-중략-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여인도 있을 법 합니다. 『하지만, 못생긴 여인이 치장을 하고 화장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까?』

 

글쎄요! 치장하여 추함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부질없는 생각입니다. 자연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보다도, 못난 것이 죄가 아닌데 왜 못났다고 고민하고 슬퍼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성서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외모가 훌륭하다고 사람을 칭찬하지 말고 외모가 볼품없다고 경멸하지 말아라』(집회 11, 2).

 

사실 얼굴이 잘났다고 구원에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오히려 미모 때문에 더 많이 걱정하고 성가시게 되고, 때로 치명적인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외적인 것에 목숨 걸지 말자”


[해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마법의 거울 앞에서 주절대는 동화 속의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마법 거울에 주문이 걸려버린 듯싶다. 요즈음 성형외과가 성업이란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는 이미 옛말이 되고, 이제는 『목숨 걸고』 다홍치마를 입으려 한다.

 

외모 콤플렉스, 외모지상주의, 요요현상, 닥터쇼핑, 성형중독, 살 빼는 약…. 아!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 같다. 외적 아름다움이 숭배의 대상이 되어 온 사회가 미인 신화의 수면상태에 떨어졌다. 아름다움을 파는 미용 산업이 날로 번창하여 종류를 셀 수도 없는 고가의 화장품들이 출시되고, 예전에는 일부 연예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성형 수술을 이제는 너도나도 감기약 먹듯 하고 있다. 이에 덩달아 대중매체는 미인을 상품화하여 신데렐라의 꿈을 팔아대고 있다. 무슨 놈의 미인대회가 그리도 많은지!

 

예뻐지려는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초대교회에 「여성 복장론」이라는 책이 있었으니 알만하지 않은가. 이 책에서 저자는 당시에도 유행하던 루주, 박하분, 염색약 등의 화장품과 장신구를 「악마의 발명품」(inventus daemonis)이라 부르며, 더불어 너무 옷을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입는 것은 교만과 정욕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1700여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에도 불구하고 너무 혹독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고리타분한 저자의 의도를 우리 시대에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것 말고는 그 어떠한 것도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창조된 자연스러움을 꾸미는 것은 악마의 오염인 경우가 이따금 있기 때문이다. … (당시 박해 상황을 염두에 두고) 예쁜 팔지를 낀 팔목이 어떻게 쇠사슬의 투박함을 견디어 낼지 모르겠습니다. 진주와 옥으로 둘러싸인 목에 순교의 칼이 들어갈 자리가 있을는지 의문입니다』(테르툴리아누스, 「여성 복장론」 13).

 

외적이건 내적이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아무리 예쁜 꽃이라도 제 때가 지나면 떨어지는 법이다. 너무 외적인 것에 목숨을 걸지 말자. 진정한 아름다움에 매료당하면 외적인 것은 덧없는 아름다움의 그림자일 뿐이리라.

 

『빛에겐 등을 돌리면서 비추이는 것들에만 얼굴을 마주하는 까닭에 그 빛깔만 보던 내 얼굴도 따라서 빛을 받지 못하나이다』(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4, 16, 30).

 

[가톨릭신문, 2005년 7월 3일, 이상규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 대전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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