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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삶의 지혜8: 암브로시우스의 나봇 이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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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9 ㅣ No.137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8) 암브로시우스의 ‘나봇 이야기’에서

 

 

“금술동이의 술은 가난한 사람들의 피”


[본문]

 

그대의 식탁은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대가로 치른 것입니다. 그 식탁에 차려 놓은 잔들에서는 그대가 처참하게 죽인 사람들의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그대들의 쾌락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민중들이 죽어가야 합니까! 그대들의 단식은 헛된 것이고, 그대들의 영화도 부질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대들의 곡식을 쌓아둘 곳간을 넓히기 위해서 일하다가 지붕 꼭대기에서 떨어져 죽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많은 포도 가운데 어떤 것은 식탁에 가져가고, 어떤 것은 그대 식탁에 어울리는 포도주로 만들기 위해서 고르다가 나무 높은 곳에서 떨어집니다. 또 어떤 사람은 조개와 생선이 그대 식탁에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일하다가 바다에 빠져 죽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토끼 발자국을 따라다니거나 새 잡는 덫을 찾아다니다가 한겨울 추위에 얼어 죽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무언가 잘못하여 그대 마음에 들지 못한 까닭에 그대 눈앞에서 죽도록 채찍질을 당하고 호사스럽게 차려진 식탁 위를 그 피로써 적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내일 주겠다고 하지 말라』(잠언 3, 28)고 그대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대가 『내일 주겠다』고 말하는 것조차 견디지 못하시는 분께서, 어떻게 『나는 주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을 참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그대의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사람의 것을 되돌려주는 것일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사용하라고 주신 것을 그대 홀로 도둑질했기 때문입니다. 땅은 부유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것입니다. 

 

「나봇 이야기」 19~20. 53장

 

 

“교회, 가진 자들만의 집단인가?”


[해설]

 

1600여 년 전, 가난한 민중들의 벗이 되어 부자들의 탐욕과 불의를 고발하고 분배정의를 외쳤던 아름다운 교부 암브로시우스! 그는 빼어난 학식과 인품으로 말미암아 이미 서른 살에 밀라노 지방장관이 되었지만, 교회를 위하여 세상 부귀와 영화를 미련 없이 버렸다. 세례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밀라노의 주교가 된 암브로시우스는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죽기까지 하느님 백성을 섬기며 살았다(339~397년).

 

암브로시우스가 설교 형식으로 저술한 「나봇 이야기」(1열왕 21장 참조)에는 분배정의에 관한 감동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암브로시우스는 부자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듣기 좋은 윤리설교 나부랭이나 늘어놓기보다, 민중을 착취하고 공동의 재화를 독점하는 부자들을 향하여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선포하고 있다. 가난의 근본원인은 세상의 부를 독차지하고 있는 부자들의 탐욕에 있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자본주의와 뒤엉켜있다. 돈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기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 24)고 하셨거늘, 자본주의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두 주인을 섬기며 휘청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복음의 논리는 결코 세속의 논리와 타협할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나눔의 책무를 저버린 부자들이 당당하게 활동하는 반면,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은 들러리로 전락해 버리는 그런 교회에서는 복음이 질식할 수밖에 없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성전을 화려하게 지어올리고 갖가지 교회 사업을 벌이면서도 정작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는 일에는 지극히 인색할 뿐 아니라, 소수의 부자가 재화를 독점하고 있는 죄스런 현실과 타협하며 그 죄악 앞에 비굴하게 침묵하는 교회라면, 하느님을 팔아 장사하다 채찍을 맞은 「강도의 소굴」(요한 2, 13~22)과 다를 게 무엇이랴!

 

예수님의 머리에 금관을 씌우고 주님의 성전을 대리석으로 뒤덮느라 애쓰면서도 예수님의 현존인 가난한 사람들을 헐벗고 굶주린 채 내버려 둔다면 과연 주님께서 기뻐하실까? 살로 된 성전이 돌로 된 성전보다 훨씬 더 소중한 법, 화려하게 꾸며진 성전의 돌들도 언젠가는 어느 하나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다(마태 21, 5~6).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는 배고프다. 나는 목마르다. 나는 떠돌이신세다. 나는 헐벗었다. 나는 병들었다. 나는 외롭게 갇혀있다』(마태 25, 31~46)라고 울부짖고 계시는 주님이야말로 우리가 정성스럽게 꾸미고 예배를 드려야 할 참된 성전이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킬 때, 교회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만다. 가난한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는 교회는 더 이상 「가톨릭 교회」가 아니다. 자기 「보편성」(catholicitas)을 잃어버린 교회는 세상과 아무런 차별도 지니지 못한 채, 가진 자들만의 배타적인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할 뿐 아니라, 부자들의 탐욕을 끊임없이 꾸짖으며 분배정의를 실천하는 교회에서 비로소 주님의 복음은 참된 생명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5년 5월 22일, 최원오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부산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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