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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에 대한 새로운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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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8 ㅣ No.125

[교회문헌 해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

 

 

1964년 11월 21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을 장엄하게 반포하였다. 교령은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하나이고 유일하다. (…) 이러한 분열은 그리스도의 뜻에 명백히 어긋나며, 세상에는 걸림돌이 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여야 할 지극히 거룩한 대의를 손상시키고 있다. (…) 일치의 재건을 모든 그리스도인 가운데에서 촉진하려는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중대한 목적의 하나이다”(1항).

 

교령 반포 뒤 40년 동안 일치 교령은 가톨릭 교회에 전례 없는 영향을 끼쳐왔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할 수 있다. 이 교령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그 효과는 무엇이었는가? 일치운동과 관련하여 현재 우리는 어떠한 위치에 도달해 있는가? 언제까지 일치운동이 지속되어야 하는가? 일치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문헌들은 21세기 교회 여정의 대헌장이다(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제삼천년기」, 18항 참조). 몇 차례에 걸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일치라는 모험은 돌이킬 수 없으며(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 3항 참조: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제2호에 우리말 번역문이 실려있음 - 편집자 주), 일치운동은 자신의 교황직에서 “우선적 사목 과제의 하나”(「하나 되게 하소서」, 99항)라고 말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일치 교령에 명확히 언급되어 있듯이 가톨릭의 일치운동 원리는 무엇인가?

 

 

일치 교령의 준비 과정

 

일치 교령은 아무런 근거 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 교령은 20세기 가톨릭 교회 밖에서 일어난 일치운동의 맥락과 조화를 이루며(일치 교령, 4항 참조),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설립과 함께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 운동을 수용한 데에는 19세기 가톨릭 신학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특히 요한 아담 뮬러와 존 헨리 뉴먼은 이 운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련의 공식적인 사건들이 이 교령을 준비하는 데 토대가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도 교황들은 ‘그리스도인 일치기도 주간’과 같은 일치를 위한 기도를 장려하였다. 교황 레오 13세와 베네딕토 15세는 교회일치의 길을 열었다. 비오 11세는 성공회와 함께한 말린스 회담(Malines Conversations, 1921-1926년)을 명시적으로 승인하였다. 비오 12세는 한발 더 나아가 1950년에 발표한 훈령에서 일치운동을 명백히 지원하고 이 운동이 성령의 활동에서 시작했음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이 일련의 일들을 무시한 채 공의회를 전통과 단절된 것으로 여기고 새로운 교회의 출현과 동일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일치운동, 교회의 종말론적 역동성의 표현

 

공의회와 함께 쇄신된 교회가 나타났다. 그것은 새로운 교회가 아니라 쇄신된 교회이다. 교황 요한 23세는 이 첫 단계의 책임을 맡았다. 그는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의 영적 아버지라 할 수 있다.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 소집을 명령하고 가톨릭 교회의 쇄신과 그리스도인의 일치라는 목적을 밝혔다.

 

필자는 여기서 일치 교령을 이끈 갖가지 움직임을 설명할 의도는 없으며 다만 교회의 본질을 새롭고 분명히 이해하고자 성서적 측면, 교부학적 측면 그리고 중세 말기 전통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공의회는 일치운동에 참여하는 교회를 앞으로 나아가는 하느님 백성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이 운동을 채택할 수 있었다(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 2.8.9.48-51항). 곧 공의회는 종말론적 차원에 새로운 중요성을 부여하고, 교회는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역동적인 실재이며,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일치운동을 이 종말론적 역동성 안에서 통합하였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일치운동은 “교회의 길”(「하나 되게 하소서」, 7항)이다. 이것은 어떤 부가적인 것이 아니라 교회생활과 사목활동의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부분이다(「하나 되게 하소서」, 20항 참조). 

 

이 종말론적 관점에서 보면 일치운동은 선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치운동과 선교는 마치 쌍둥이와 같다. 선교는 종말론적 현상이다. 교회는 선교 활동을 통하여 민족들의 문화유산을 흡수하면서 교회의 보편성을 정화하고 풍성하게 하며 완성하였다(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만민에게」, 1.9항 참조). 마찬가지로 교회는 일치운동을 통하여 갈라진 교회들과 은총을 교환하고(「하나 되게 하소서」, 28.57항), 그 은총들을 풍성하게 하며 갈라진 교회들의 은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또한 갈라진 교회들 안에서 은총으로 이루어진 것들의 보편성을 풍부히 실현하도록 한다(일치 교령, 4항 참조). 선교와 일치운동은 교회의 종말론적 여정과 종말론적 역동성의 두 가지 형태이다. 

 

공의회는 일치운동을 가톨릭의 역동적인 종말론에 통합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무시하지 않았다. 교회 역사에서 자주 볼 수 있듯이 이 역동성은 고대의 전통 유산을 쓸모없는 것으로 보는 급진적인 운동으로 잘못 해석될 수도 있다. 이러한 일들은 어디에서 일어나든지 상대주의와 신앙 무차별주의, 그리고 부적절한 것으로 끝나버리는 “저속한 일치운동”이라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교리적 이완주의(Dogmatic laxism)는 교회의 종말론적 차원의 본질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종말(Eschaton)은 사실 역사 밖에 있는 미래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성령과 함께 종말은 분명히 역사 안에 있으며 교회 안에 현존한다. 

 

교회는 종말론적 현상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적인 특징인 일치는 먼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바로 종말론적 목표이다. 곧 교회는 이미 유일하고 거룩한 교회이다(일치 교령, 4항; 「하나 되게 하소서」, 11-14항 참조). 일치운동의 길은 미지를 향한 여정이 아니다. 교회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역사 안에 존재할 것이며 삶에서 자신의 본질을 완전히 얻고자 여행한다.

 

가톨릭 일치운동의 원리는 공의회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그 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가톨릭 교리의 뜻을 흐려버리는 거짓 평화주의(irenicism)와 상대주의(relativism)를 분명하고 명확하게 반대했다(일치 교령, 5.11.24항; 「하나 되게 하소서」, 18.36.79항 참조). 일치운동은 지금까지 교회와 그 역사에서 귀중했던 것은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다. 또한 역사에서 인정하고 명백히 보여준 진리를 충실히 따르며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더하지 않았다.

 

일치운동과 이 운동이 정한 목표, 곧 그리스도 제자들의 완전한 일치는 성전(聖傳)에도 나타나 있다. 그러나 공의회의 위대한 선구자인 요한 아담 뮬러와 존 헨리 뉴먼의 정신에 비추어보면, 성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에 따라 교회를 모든 진리로 이끄신 성령께서 하신 일이다(요한 16,13 참조). 또한 성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성서를 드러내고, 드러난 진리를 이해하도록 돕는다(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 8항 참조; DS 3020). 리옹의 이레네오 성인에 따르면 우리에게 전해진 사도적 전승을 힘 있고 생기 있게 만드는 것은 하느님의 성령이라고 한다(「이단 반론」(Adversus Haereses), III, 24, 1 참조). 

 

이와 관련하여 일치운동은 은사 현상이며 ‘거룩한 성령의 사업’이다. 공의회에서도 강조하였듯이 사실 교회는 제도적 차원만이 아니라 은사 차원을 갖고 있다(교회 헌장, 4.7.12.49항;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사도직 활동」, 3항; 선교 교령, 4.29항 참조). 그러므로 일치운동은 새로운 시작이며 성령을 통해 힘을 얻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일치 교령, 1.4항). 성령은 교회의 ‘영혼’으로서(교회 헌장, 7항 참조) 일치와 함께 다양한 은총과 직무를 나누어 주셨다(교회 헌장, 7항 참조; 일치 교령, 2항 참조).

 

이와 같이 공의회는 영적 일치가 일치운동의 핵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영적 일치란 내적 회개, 영적 쇄신, 개인의 성화, 겸손, 인내만이 아니라 교회의 쇄신과 개혁을 의미한다. 결국 기도야말로 일치운동의 핵심이 된다(일치 교령, 5-8항; 「하나 되게 하소서」, 15.21-27항).

 

영적 운동으로서 일치운동은 성전을 소홀히 다루지 않고 우리에게 전해진 성전을 새롭고 깊이 있게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이에 따라서 교회의 새로운 역사적 특징, 곧 새로운 교회가 아니라 영적으로 쇄신되고 풍요로워진 교회를 준비하게 되었다. 선교와 함께 일치운동은 21세기와 제삼천년기에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 … 안에 존재한다(subsistit in).’는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교회론을 표현한다

 

종말론적 성령론적 역동성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 설명이 필요했다. 이에 대한 설명은 ‘… 안에 존재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교회 헌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한다(8항 참조).

 

공의회 기간에 ‘… 안에 존재한다(subsistit in).’라는 표현이 이미 사용되고 있던 개념인 ‘… 이다(est).’를 대체하게 되었다. 이것은 일치 문제 전체를 더 간결하게(in nuce) 함축하였다. ‘… 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가톨릭 교회이다.’라고 단언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톨릭 교회와 동일시한 것은 교황 회칙 「그리스도의 신비체」(Mystici Corporis, 1943년)와 「인류」(Humani Generis, 1950년)에도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비체」는 사람들 가운데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인이기를 열망하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에 속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인정한다(DS 3921 참조). 이러한 이유로 비오 12세는 1949년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라는 교회의 격언에 대한 배타적인 해석을 비판했다(「보스턴 대주교에게 보내는 교황청의 서한」(1949년): DS 3866-3873 참조).

 

‘… 안에 존재한다.’라는 정식 덕분에 공의회는 놀랄 만한 질적 도약을 할 수 있었다. 또한 가톨릭 교회 밖에는 개별적인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교회의 요소들”, 그리고 완전한 친교는 아니지만 당연히 하나의 교회에 속하며 구원의 수단인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교회 헌장, 8.15항; 선교 교령, 3항; 「하나 되게 하소서」, 10-14항 참조).

 

그러므로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 밖에서도 순교까지 이를 수 있는 성성을 드러내는 모습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교회 헌장, 15항; 일치 교령, 4항, 「하나 되게 하소서」, 12.83항 참조). 결과적으로 비가톨릭 그리스도인의 구원 문제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개인의 주관적인 바람에 토대를 둔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제도적 차원 그리고 객관적인 교회론적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신학위원회의 의도에 따르면, ‘… 안에 존재한다.’라는 개념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톨릭 교회 안에서 ‘구체적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교회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 만나게 되고 그 안에서 구체적으로 발견된다. 이것은 단순히 이상적인 본체나 미래적 실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역사 안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며 가톨릭 교회에서 명확히 발견할 수 있다(신앙교리성 선언 「교회의 신비」(Mysterium Ecclesiae), 1항;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Iesus, 2000년), 17항 참조). 

 

이런 식으로 이해하다 보면, ‘… 안에 존재한다.’는 ‘…이다.’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그러나 더 이상 가톨릭 교회는 “영예로운 고립”의 측면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제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 안에서, 이들이 아직 완전한 친교를 이루고 있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의 적극적인 현존에 주목한다(「하나 되게 하소서」, 11항 참조).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형제 교회들, 그리고 교회 공동체들과 대화관계를 수립한다. 

 

결과적으로 ‘… 안에 존재한다.’는 다원주의나 교회론적 상대주의의 토대가 될 경우 잘못 해석될 수 있다. 곧 하나이며 유일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수많은 교회들 안에 존재하고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교회들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게 된다. 이러한 교회론적 다원주의는 가톨릭 교회가 - 정교회들도 마찬가지로 - 항상 자신의 성전에서 갖고 있었던 올바른 정체성에 대한 이해, 곧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채택한 이해와 대립한다.

 

가톨릭 교회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진실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권리를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의 수단이 완전한 충만함을 이룰 수 있다(일치 교령, 3항 참조; 「하나 되게 하소서」, 14항).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지금 이에 대한 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다른 형제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을 고려하고 있다.

 

공의회는 새로운 교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 새로운 태도, 곧 승리주의(triumphalism)를 포기하고, 현실적이고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방식으로 교회 정체성에 대한 전통적 이해를 정식화하였다.

 

우리는 이 겸손하고 현실적인 전망을 주로 교회 헌장(8항)에서 발견한다. 교회 헌장에 따르면, 공의회는 ‘… 안에 존재한다.’를 통해 가시적 구조 밖에 있는 교회 구성원들에 대한 자리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존재하는 죄의 구성원들과 구조에도 자리를 만들어두었다(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화해와 참회」, 16항; 「하나 되게 하소서」, 34항 참조). 하느님의 백성들 가운데도 죄인이 있다. 그 결과 교회의 영적 본성은 갈라진 형제들이나 세상에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고, 교회는 존재하는 분열의 책임을 공유하며, 하느님 왕국의 성장이 지연된다(일치 교령, 3항 참조). 

 

반면, 갈라진 공동체들은 이따금 계시 진리의 어떤 측면을 좀 더 발전시킨다. 그 결과 분열 상태에서 가톨릭 교회는 완전하고 구체적으로 자신의 보편성을 발전시킬 수 없다(일치 교령, 4항; 「하나 되게 하소서」, 14항). 그러므로 교회는 정화와 쇄신이 필요하며 끊임없이 참회해야 한다(교회 헌장, 8항 참조; 일치 교령, 3.6항; 「하나 되게 하소서」, 3.4.83항). 이러한 자기비판과 참회의 자세는 일치운동의 토대가 된다(일치 교령, 5-12항 참조). 이것은 일치운동이나 대화가 있는 회개와 쇄신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일치운동은 이념의 교환이라기보다는 은총의 교류이기 때문이다.

 

이 종말론적이며 영적인 전망 안에서 일치운동의 목표는 단순히 갈라진 형제 교회들이 가톨릭 교회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완전한 일치의 목표는 하느님 성령의 활동과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회심하는 것으로만 이룰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 일치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서로 일치하며 교회에 합당한 보편성을 온전히 실행할 것이다. 공의회는 이 목표를 신학적으로 일치 친교(unity-communio)라고 정의했다.

 

 

‘친교의 교회론’의 기치 아래 있는 일치운동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특히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의 기본적인 이념은 ‘친교(communio)’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용어는 “교회의 요소들(elementa ecclesiae)”이라는 문제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교회의 요소들”이라는 단어는 마치 모든 요소의 양을 재거나 계산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양적이며 물질적 차원을 제시한다. 

 

“요소들의 교회론”은 이미 공의회와 특히 공의회 뒤에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일치 교령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은 갈라진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을 총제적인 교회론의 개념 안에서 이러한 요소들을 비추는 통합적 실재로 이해했다. 

 

‘친교’의 개념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이 가능했다. 이 개념으로 공의회는 심오한 교회의 신비를 표현하였다. 이 신비는 삼위일체의 상징으로서 삼위일체의 친교 안에 있다(교회 헌장, 4항; 일치 교령, 2항 참조). 원래 친교와 성도들의 친교(communio sanctorum)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구원, 거룩한 것들(sancta), 곧 성사 참여를 의미했다.

 

세례는 이 모든 것의 근본이다. 세례는 신앙의 성사이다. 세례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하나인 몸, 곧 교회에 합체된다. 그러므로 비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은 하나인 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기초적인 방식으로 이미 교회에 속한다(교회 헌장, 11.14항; 일치 교령, 22항 참조).

 

하나인 공통의 세례를 토대로 일치운동은 단순한 자비심과 우정 이상의 큰 효과를 발휘한다. 일치운동은 교회의 외교 활동이 아니다. 이것은 존재론적 토대이며 깊이이다. 곧 일치운동은 성령의 사건이다.

 

세례는 분명히 출발점이며 토대이다(일치 교령, 22항 참조). 교회에 합체되는 것은 그리스도인과 교회생활의 원천이며 정점인 성찬례로 완성된다(교회 헌장, 11.26항; 사제의 생활과 교역에 관한 교령「사제품」, 5항; 선교 교령, 39항). 이와 같이 성체성사적 교회론의 토대들은 이미 전례 헌장과 교회 헌장에 존재한다(전례 헌장, 47항; 교회 헌장 3.7.11.23.26항). 일치 교령은 “성체성사가 교회의 일치를 드러내고 이룩한다.”(일치 교령, 2항)라고 주장한다. 이어서 동방 정교회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각 교회에서 거행되는 주님의 성찬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교회가 세워지고 자라나며, 또 공동 집전을 통하여 교회 일치가 드러난다”(일치 교령, 15항).

 

성찬례가 거행되는 곳은 어디나 교회이다. 이 말은 동방교회들과 프로테스탄트 교회 공동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들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곧 성찬례를 거행하는 모든 개별 교회는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는 하나의 교회이지 교회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교회 헌장, 26.28항). 단 한 분이신 그리스도와 단 하나의 성찬례가 있기 때문에 성찬례를 거행하는 각각의 교회는 다른 모든 교회와 친교의 관계 안에 있다. 

 

하나이며 유일한 가톨릭 교회는 개별 교회들 안에 존재하며 그 개별 교회로 형성된다. 반대로 개별 교회는 하나인 교회 안에 존재하며 하나인 교회로 형성된다(교황청 신앙교리성, 친교로서 이해되는 교회의 일부 측면에 관하여 가톨릭 교회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 「친교의 개념」(Communionis Notio), 9항 참조).

 

일치 교령이 일치문제 해결에 공헌한 점은 완전한 친교와 부분적 친교를 구분했다는 것이다(일치 교령, 3항 참조). 이러한 구분을 통해 일치운동의 목표는 연합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친교를 달성하는 것이다. 곧 상호 간 병합도 융합도 아닌 친교이다(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회칙 「슬라브인의 사도들」(Slavorum Apostoli), 27항 참조). 이것은 일치문제와 관련하여 공의회가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공헌한 점이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같은 일치운동의 두 형태

 

한편 교회 안에서 두 가지 형태의 분열, 곧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과 16세기 서방교회 내부의 분열을 구분할 수가 있다. 이 두 형태의 분열은 지역적 시간적으로 다르다. 곧 이 두 형태는 다른 형태의 분열이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에서는 2세기 이후 발전해 왔던 교계 구조는 변하지 않았던 반면, 종교 개혁으로 새로운 공동체가 생겨나자 가톨릭 교회는 다른 교계 형태에 직면했다. 동방교회와 분열한 것은 4-5세기 제국 교회에서 분리된 고대 동방교회들과 1054년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 사이의 분열을 포함한다. 공의회는 물론 이 차이점들을 단순한 정치적 문화적 요소로 보지 않았다. 처음부터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다른 방식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각자의 노선에 따라 전례, 영성, 신학 그리고 교회법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와 동방교회는 근본적인 구조, 곧 성체성사와 교계 구조에 관한 문제에서는 합의를 하였다. 공의회가 성체성사와 교계 구조에 대한 이 심오한 신앙의 친교를 확인한 이후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공의회는 지역교회들이 자매들로서 지녀야 하는 관계에 대해서 언급했다(일치 교령, 14항 참조). 이 표현은 사랑의 대화(Tomos Agapis), 곧 바오로 6세 교황과 동방교회의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의 교류로 발전하였다.

 

완전히 친교를 회복하려면 분리를 이끈 다른 요인들에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고(일치 교령, 14항) 합법적인 차이점을 인정해야 한다(일치 교령, 15-17항).

 

한편 공의회는 차이점을 분쟁의 요소라기보다는 서로 보완적인 문제로 이해했다(일치 교령, 17항 참조). 그러므로 공의회는 “영성과 전례와 규율과 신학의 이 모든 자산이 교회의 완전한 보편성과 사도 전래성에 귀속된다.”(일치 교령」, 17항)라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일치를 회복하고자 한다면 “긴요한 사항 외에는 다른 짐들을 더 지우지 않아야”(사도 15,28) 할 필요가 있다(일치 교령, 18항).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관계에서 문제의 중심은 교황의 직무에 관한 것이다(「하나 되게 하소서」, 88항). 요한 바오로 2세는 이와 관련하여 형제적 대화를 촉구했다(「하나 되게 하소서」, 95항).

 

이 글에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반포한 교의의 재해석과 재수용의 현실적 가능성이나 문제들과 관련한 복잡한 역사적 쟁점들을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2003년 5월 교황청 일치평의회가 동방 정교회와 함께 개최한 심포지엄을 회상해 보자. 그 회의는 양쪽의 개방을 이끌어냈다. 국제적으로 신학적 대화가 곧 재개되어, 이 주제에 관한 연구에 전념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16세기 종교개혁으로 발생한 서방교회의 분열은 또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에서 분명히 인정하였듯이, 교리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복잡하고 구별되는 현상의 문제이다. 

 

또한 가톨릭 교회는 말씀 선포와 세례와 관련하여 종교개혁으로 태어난 공동체와도 연관이 있다. 공의회 이후 발표된 대화의 문서들에서 이 친교의 문제가 깊이 다루어졌다. 

 

그러나 “역사적, 사회적, 심리적, 문화적 특성의 차이만이 아니라, 특히 계시 진리의 해석에서 매우 중대한 차이가”(일치 교령, 19항) 존재한다. 공의회에 따르면 이러한 차이는 부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의 교리, 특히 교회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성서, 정통 교도권, 교회와 교회의 직무, 그리고 구원활동에서 차지하는 마리아의 역할만이 아니라(일치 교령, 20항; 「하나 되게 하소서」, 66항 참조) 도덕문제와도 관련이 있다(일치 교령, 23항 참조).

 

동방교회와의 분열과 달리, 종교개혁으로 생겨난 공동체와는 교리적으로도 차이가 있으며 근본적인 구조와 교회의 성격도 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종교개혁가들은 교회를 ‘말씀의 피조물(creatura verbi)’로 인정한다. 이 관점의 출발점은 성찬례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다.

 

개신교와 가톨릭 교회의 차이는 성찬례 문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공의회에서 언급하였듯이, 종교개혁으로 생겨난 교회 공동체들은 “성품성사의 결여로 성찬 신비 본연의 완전한 실체를 보존하지 못하였다”(일치 교령, 22항).

 

성체성사적 교회론과 관련하여 가톨릭 교회와 교회 공동체들 사이의 구분은 성체의 실체의 결여에서 나온다. 교황청 신앙교리성이 발표한 선언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Iesus)은 개념적인 구분을 좀 더 강조하면서, 프로테스탄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가혹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개신교는 가톨릭 교회가 바라는 방식의 교회가 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교회를 표방하기 때문에 가톨릭 정체성의 기준에서 보자면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 이 현존하는 차이 때문에 공의회는 경솔함과 무지한 열정을 자제하도록 권고한다. “온전히 또 순수하게 가톨릭적이 아닌 일치활동은 있을 수 없다. 곧 우리가 사도들과 교부들에게서 이어받은 진리에 충실하고, 가톨릭 교회가 언제나 고백하는 신앙에 합치해야 한다”(일치 교령, 24항). 그러나 공의회는 논쟁에 대해 경고한다. ‘대화’라는 용어는 이 교령의 여러 항의 마지막 부분에서 후렴구처럼 반복된다(일치 교령, 19.21.22.23항 참조).

 

 

우리가 가야 할 길

 

일치 교령은 시작이었다. 그럼에도 이 문서는 가톨릭 교회와 일치 차원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지난 40년 동안 일치운동의 상황을 크게 변화시켰다.

 

물론 일치 교령 역시 몇 가지 답변하지 못한 문제들을 남겨놓고 있으며, 비판을 받기도 하고 더 나은 발전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우리는 이 교령의 풍부한 결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은 우리에게 21세기의 길을 보여준다. 우리가 신중함, 용기, 인내 그리고 확고한 희망을 갖고 이 길을 따르는 것은 주님의 뜻이다.

 

근본적으로 일치운동은 성령의 모험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일치 교령의 마지막 문장인 24항을 빌려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에, 이 희망은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로마 5,5 참조).

 

* 출처

Cardinal Walter Casper, “‘UNITATIS REDINTEGRATIO’, VATICAN Ⅱ’S DECREE ON ECUMENISM : a new interpretation after 40 years”, L'OSSERVATORE ROMANO(영어판), 2004년 12월 1일자(제48호), 8-10면, 강한옥 편역.

 

[사목, 2005년 8월호, 발터 카스퍼(교황청 일치평의회 의장 ·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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