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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교회가 바라는 본당 수도자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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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6 ㅣ No.23

교회가 바라는 본당 수도자들의 모습

 

 

1. “교회는 봉헌된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교회 안에서 수도자들의 존재가 갖는 의미에 대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 「봉헌생활」은 대단히 함축적이면서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수도자가 없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봉헌생활은 바로 그 가없는 헌신과 사랑 때문에 그 유용성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며, 무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질식할 위험에 놓인 현대에서는 더욱더 중요합니다. ‘봉헌생활 같은 구체적인 표징이 없을 때 교회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는 사랑은 식어지고, 복음이 전하는 구원의 역설은 무디어지며, 세속화로 치닫고 있는 세상에서 신앙의 소금은 그 맛을 잃게 될 위험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교회와 사회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에게 자신들을 완전히 봉헌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교회는 결코 봉헌생활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부’인 교회의 가장 깊은 내적 본질을 웅변으로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에 대한 복음선포는 봉헌생활에서 신선한 열정과 능력을 발견합니다. 하느님의 아버지다운 모습과 교회의 어머니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이 생명과 희망을 갖도록 일생을 바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여러 가지 고귀한 목적을 위한 봉사에 투신하기 이전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변모되도록 자신들을 내맡기며 복음에 완전히 순응하는 봉헌된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105항).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본당사도직을 통해 드러나는 한국교회 안의 수도자들의 봉헌생활은 개인과 공동체 모두가 갖는 정체성의 위기와 더불어 그 본래의 사명에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2. 본당사도직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서울대교구 시노드 교회운영 의안 준비위원회’에서 서울대교구 내 성직자들과 본당수녀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교회 운영 관련 성직자 설문조사 결과 보고서」와 「교회 운영 관련 수도자 설문조사 결과 보고서」) 가운데 “본당 사목에서 여성 수도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수도자 가운데 19.6%, 성직자 가운데 14.6%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있으면 좋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답을 한 수도자는 64.7%, 성직자는 71%였다. “없는 편이 낫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수도자의 7.4%, 성직자의 12%가 동감을 표했다.

 

성직자의 경우, 설문지 회수율이 낮아서 전체 의견으로 일반화시키기에 어려움이 있지만, 본당수녀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같은 설문지에서 ‘본당에서 활동하는 수도자들의 역할’에 대한 질문이 있었는데, 성직자들의 응답 가운데 ‘본당사제의 보조자’라는 내용이 32.2%, ‘공동 사목자’라는 답은 24.1%, ‘영적 상담자’는 19,6%인데, 이는 상당수의 성직자들이 본당수녀들을 자신들의 ‘보조자’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반면 본당 수도자들은 자신들의 역할이 ‘영적 상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49.5%나 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성직자들의 이해와는 상당히 다른 자의식을 가진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서울대교구 시노드 평신도용 ‘토론마당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본당사도직 현장에서 수도자들이 도움을 주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긍정적인 답변을 한 신자들이 드는 이유는, 주로 사도직 현장에 파견된 수도자들이 보여주는 헌신적이고 겸손한 봉사와 기도의 삶, 곧 그들의 복음적인 삶의 증거였다. “수도자들의 기도, 헌신적인 봉사, 절제, 겸손 등을 보면서….”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이는 수도자들이 사목현장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많은 메시지를 준다는 것을 나타낸다. 구체적인 사목활동을 하지 않아도 정결, 가난, 순명의 삶을 사는 수도자의 모습 자체가 이미 신자들에게 큰 공헌을 하고 있다고 신자들은 느끼는 것이다. “수도자의 향기를 풍기는 삶 자체가 신앙생활에 힘이 되었다.”는 표현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반면에 같은 질문에 대한 부정적인 답변으로는 ‘수도자들이 수도자답지 못하다, 권위의식, 독선, 편애’ 등이 주로 언급되었다. 또 일부 신자들은 ‘고급스럽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수도자, 신뢰가 가지 않는 수도자,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는 수도자, 삶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수도자의 모습을 보면서 수도자들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낄 수 없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밝히기도 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신자들만의 일방적인 생각이 아니다. 수도자 스스로도 “수도자들이 많이 세속화되었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서울대교구 시노드 ‘수도자’ 의안 초안」, 11면).

 

결국 이러한 평가와 더불어 제기되는 본당수녀의 올바른 역할문제는 급기야 수도생활 전반에 걸쳐 수도자가 누구이며 수도 공동체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제기하는 동시에 수도자들 개인의 정체성에도 혼란과 의문이 제기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바로 여기에 한국교회 여성 수도자들이 갖는 특수한 딜레마가 존재하는 것이다.

 

 

3. 한국교회 수도자의 특수성

 

서구의 수도자들은 처음부터 교회 안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면서도 본당사목과 긴밀한 관계를 맺지 않고 수도승적인 삶의 형태를 고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여성 수도자들은 교회 초기부터 선교활동의 선봉에서 교회를 확장하고자 시급한 사도직의 요청에 따라 다양한 역할을 정신없이 수행해 온 것이다. 

 

본당사목의 일선에서 때로는 성직자들의 협조자, 대리자로 활동하는가 하면, 신자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지도하는 역할은 물론이요, 또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이해하는 위로자이며, 영적 동반자의 역할까지 도맡아 늘 바쁘고 힘들게 살아왔다. 그뿐 아니라 때로는 영적인 고갈상태를 느끼며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위기에 놓이면서까지 지치도록 일하면서 살아야 했던 그들이기에 오늘 새롭게 제기되는 본당 구조의 변화와 그에 따른 역할의 변화는 대단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다. 

 

한편 지난해 한국 천주교회 전교수녀 전국 연합회 주최로 있었던 본당수녀들을 위한 연수에서 박문수 박사(가톨릭 대학교 인간학연구소 전임연구원)는 “이 시대가 요청하는 본당수녀”라는 제목 아래 본당사도직을 통해 드러난 수도자들의 과오와 공로, 그리고 문제점에 대한 다각적인 진단과 더불어 교회 내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기대하고 있는 새로운 본당수녀의 미래상을 제시하였다. 

 

우선 그는 한국교회에서 여성 수도자들이 오랫동안 점유해 오고 있는 본당수녀라는 역할 자체가 한국교회의 특수성을 드러낸다고 본다. 결국 한국적으로 토착화된 교회 구조에서 본당수녀는 여전히 필요한 역할이고 소명이라고 전제하면서 시대적인 요청에 따른 본당수녀상을 다음처럼 그리고 있다. “대체로 이 요청은 한국교회 전체에서 제기되는 것과 본당에서 요구되는 것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한국교회는 변화된 상황에 어울리는 동시에 변화를 뛰어넘는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수도자들에게 전통적인 역할의 지속과 동시에 새로운 상황에 어울리는 요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역할이라 함은 선교사와 수행자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자질과 태도를 갖추고 사는 것을 말한다. 

 

선교사는 아브라함과 같이 안정에서 늘 새로운 불안정으로 떠나는 안주하지 않는 영성을, 수행자는 모든 시대와 민족과 문화를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금욕과 자기 절제를 상징한다. 

 

여기에다 새로운 시대의 요청이라 할 수 있는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요망한다. 관계에서는 수평적이고, 섬기는 사람의 태도를, 역할수행 능력에서는 지적인 능력뿐 아니라 정신적인 치유 능력까지도 갖추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영성생활의 전문가이기를 요청한다. 가장 현대적인 전문인이면서 동시에 이러한 흐름을 역행하는 단순 소박한 삶을 추구하는 전통적인 수행자라는 모순적인 역할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름하여 만능 엔터테이너, 훌륭한 교사, 후덕한 어머니, 퍼실리테이터(유능한 촉진자), 사회복지사, 영성가, 수행자의 기능을 모두 완벽하게 소화하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본당에서는 수녀원이 천상의 공동체를 구현하는 곳이기를, 사제와는 최상의 조화를, 신자들과는 교사, 어머니, 영적 지도자가 되기를 바란다. 기대는 이렇게 높아졌고, 좀처럼 낮아지지 않으리라는 것이 예상되는 지금, 본당수녀의 현실은 이러한 기대와 너무 먼 거리에 있다.” 당연히 이러한 역할을 모두 수행할 수 있는 수도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본다. 결국 본당수녀라는 역할을 통해 사람들은 어떤 평신도도 성직자도 결코 수행할 수 없는 가장 어렵고 이상적인 몫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요청에 대한 수도자들의 대안은 과연 무엇인가?

 

처음부터 본당사도직과 맞물린 한국의 여성 수도자들의 삶이었고, 지금도 거부할 수 없는 한국적인 교회현실이라 해도 수도자 본연의 소명에 충실하면서도 본당사도직을 적절히 수행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더구나 위의 시대적인 요청에 따른 이상적인 본당수녀상을 구성하는 요소를 보면, 한 수도자로서 또 수도 공동체의 전체 회원에 대한 효율적인 운영 관리를 염려해야 하는 책임 있는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가 받는 중압감은 가히 그 무게를 가늠하기가 힘들다.

 

 

4. 교회가 바라는 본당수녀상

 

“‘나이는 3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 학력은 대졸 이상, 인상은 지적이면서도 후덕해 보임, 외국 경험도 있음, 교수 능력이 탁월함(교리, 단체 지도, 훈화 등), 사제와 신자들 사이를 사려 깊게 중재함, 늘 밝고 친절하게 신자들을 대하며 겸손함, 언어 구사와 행동에 품위가 있음, 늘 기도하고 상담할 때 내적인 문제를 잘 듣고 해결해 줌, 사제의 권위에 잘 순명함, 신자들을 뒤에서 잘 보살피고 나서지 않음, 시대의 징표를 읽고 시대감각이 있음, 청빈하고 소박함.’ 대도시 본당에서 요구되는 이러한 본당수녀상은 점차 모든 지역에 보편적으로 확산되는 중이다.”

 

위에서 거론한 이상적인 수녀상은 기능적 역할과 존재적 역할을 모두 내포한 것인데, 과연 이 정도의 능력과 소양을 지닌 수도자가 한 수도 공동체 안에서 어느 정도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또 그들이 모두 본당사도직에 종사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참으로 의문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인 요청은 당연히 현재 본당사도직을 수행하고 있는 수도자들의 모습이 이와는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앞에 놓인 이러한 시대적인 요청과 요구는 어떤 식으로든 그동안 수행해 온 본당사도직에 대해 수도자 본연의 삶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진단하고 식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본당사목의 전담자인 성직자와 한 공간에 존재하면서 언제든 신자들이 찾기만 하면 만나주어야 하고, 본당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사에 일차적으로 책임 있는 참여와 봉사로 임해야 하는 삶의 구조에서는 위에서 거론한 이상적인 수도자상을 구현해야 마땅하다. 

 

기도와 신앙생활을 지도하려면 성서지식과 신학적인 소양을 기본으로 갖추어야 하고, 덧붙여 교수 능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수준 이상으로 갖추어야 하는 기능적인 전문인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영적 후견인, 사목 협력자, 신앙의 교사로서 동반자적인 위치에서 영성생활의 전문가, 수행자의 면모를 갖춘 겸손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늘 기도하며 협동할 줄 알면서도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말없이 뒷전에 머물면서 조용히 후원할 줄 아는, 그래서 완벽하게 이상적인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는 본연의 수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존재적인 역할까지 그들은 완벽하게 떠안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목적인 활동을 하는 모든 순간뿐 아니라 수도자로서 사는 공동체적인 삶 자체가 본당 안에서 하나의 모범으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누구도 이런 이상을 구현해 내기가 쉽지 않다고 전제하였다. 그렇다면 더 효율적으로 본당사도직을 수행하면서도 수도자 본연의 자세를 지닐 수 있는 삶의 구조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지금까지처럼 본당 안에 거주함으로써 한 공간 안에서 성직자 평신도와 함께 수도자가 밀착되어 살 수밖에 없는 삶의 구조는 적어도 탈피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를테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자세가 먼저 요구된다는 것이다.

 

 

5. 수도생활의 고유성과 본당 사도직의 관계

 

수도생활의 고유성은 세상과 거리를 유지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상 속에 살되 세상을 위한 성사적인 삶으로 존재하려는 목적에서 수도자들은 그 시작부터 은둔과 격리를 필수적인 조건으로 삼았던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같은 공간에서 성직자나 평신도들과 모든 것을 공유하면서 살았기에 본당수녀들의 삶과 그 수도 공동체는 본당사제 중심, 일 중심, 효율적인 본당 관리 중심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도자들은 무엇보다 기도와 영성생활을 우선으로 하기에 침묵과 절제로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야 하고 마땅히 그들의 공동체는 사랑과 평화로 움직여져야 했다. 또한 신자들을 위한 그들의 봉사와 선교는 그 이후의 몫이어야 했고, 아름다운 수도생활의 열매로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현행 삶의 구조는 이 모든 것을 뒤섞어버렸고, 봉헌생활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어딘가로 흩어버렸다. 남은 것은 능력 있는 전문가가 되고자 바쁘게 움직이는 기능인 위주의 삶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가느라 무분별하게 반응하고 참여하는 봉사자의 모습인 것이다.

 

이제 본당사도직에 종사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일차적으로 우리는 기능적인 역할보다는 존재적인 역할을 먼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더 현명하게 처신할 수 있는 식별의 공간을 지닌 채, 없는 듯 있는 듯 존재하면서 꼭 필요한 몫으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간은 할 바를 다 하고도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하며 물러설 줄 아는 수도자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기 위한 자리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삶에는 낭비할 수 있거나 다른 이들과 공유할 여유 있는 시간과 공간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먼저 기도하고, 그 다음에 일하고 남는 시간이 공동체를 위한 몫이기 때문이다. 사람들 가운데에서 주님을 모시려면 그들과 함께해야 하지만, 그 외에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나를 성찰하고, 내 수도생활이 참된 봉헌생활이 되게 하고, 그리고 공동체적인 삶에서 받는 에너지를 통해 세상을 더욱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고유의 시간과 공간 안으로 숨어들어야 한다.

 

 

6. 새로운 본당사도직의 모습

 

본당사도직 자체는 한국의 여성 수도자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소명이다. 그러나 이 소명은 무엇보다도 수도자 본연의 삶을 통해 이루어내야 한다. 일로서가 아니라 존재로서 말이다.

 

이런 삶을 회복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생각해 보자. 가능하다면 한 수도회가 서너 개의 본당을 하나로 묶고 10명 내외의 수녀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구성하여 파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같은 수도회가 밀집해 있는 구역이 있다면 이런 구상은 그리 낯설지 않겠다. 아니면 한국 천주교 여자 수도회 장상연합회 차원에서 조정하여 수도회마다 가능한 지역을 분배하는 구체적인 구획 나누기를 준비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공동체적인 삶을 우선적으로 하게 되면, 해당 본당에는 출퇴근하면서 각자의 몫을 기능적으로 구분하여 활동하는 방식을 실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교리, 성서공부, 면담, 복지활동, 단체 지도 등을 한 사람이 모두 맡는 방법이 아니라, 각자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몫을 선택하여 계속적인 연구와 집중적인 훈련을 통해 전담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러한 삶은 무엇보다 본당 안에서 거주해 오던 이전의 삶의 양식보다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한 기도에 몰입하게 하고, 공동체와 함께 사랑을 나눔으로써 봉헌생활의 깊이를 더해준다는 점에서 수도자 본연의 삶에 충실하게 할 것이다. 나아가 더욱 효율적이고 철저하게 복음화에 헌신하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늘 분주하고 바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느님의 은총으로 변모된 단순 소박한 사람의 모습으로 교회 안에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우리가 속한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먼저 복음에 완전히 순응하는 봉헌된 사람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목, 2004년 3월호, 이유남(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 한국사목연구소 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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