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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과 함께하는 여행: 나의 청소년 사목 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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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7 ㅣ No.68

청소년과 함께하는 여행 - 나의 청소년 사목 체험기

 

 

“날려 보내기 위해서 새들을 키웁니다.”

 

지난 15년 동안 청소년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왔다. 신학생 때 가톨릭 노동청년회(YCW, Young Christian Workers)와 함께하면서 한 인간이 관찰-판단-실천의 방법론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사제가 되어 보좌신부로서 초등부와 중고등부를 담당하게 된 나는 청소년 사목에 대한 기초가 없었기에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어떻게 이들을 하느님께 이끌 수 있을까? 어떻게 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휩싸여있던 어느 날 두 명의 청소년이 면담을 요청해 왔다. 자신들의 아픔을 털어놓는 이 아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나는 나의 사명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나를 청소년 사목으로 이끄신다는 것이었다. 

 

나를 찾아왔던 그 두 청소년은 생김새가 다른 쌍둥이 자매였다. 그들은 자신의 가정에 얽힌 아픔을 이야기했고, 나는 그저 가만히 듣기만 했다. 청소년에 대해서 알지 못했기에 그들에게 해줄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 이후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상담심리 과정을 공부하면서 청소년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갔다. 그리고 신림동으로 본당을 옮긴 뒤 교사들과 함께 복음 나누기를 열심히 실천해 나갔다. 그러면서 확신한 것은 복음을 통해 젊은 사람이 변화된다는 것이었다. 이즈음 나의 모든 관심사는 청소년들에게 있었다. 그리고 청소년 사목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청소년들에 대한 책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게 되었다. 학회나 연수를 찾아다니고 청소년들과 관련된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청소년 사목과 관련된 많은 교회의 문헌과 수도회들의 문헌들을 얻어 탐독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제가 되고 싶었던 나는 아이들과 놀고 있다는 생각, 지금 하는 사목이 재미있기 때문에 그냥 현실에 안주해서 청소년에 대한 관심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 즈음 프라도 사제회 회헌에서 가난한 사람은 “현실에서 부유(浮遊)하며,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미래가 불안정한 사람들”이라는 정의를 보게 되었다. 나는 새로운 인식 속에서 청소년과 가난한 사람들의 연결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청소년은 가난한 사람의 특징을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곧 그들은 시기적으로 죄에 빠지기 쉽고, 현실에서 한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종속적인 존재이며, 미래는 그들의 선택이 아닌 부모에게 맡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청소년은 오늘날 우리의 가난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헌신해야 할 또 다른 예수님이 바로 청소년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유네스코 청년원에서 4박 5일간 네 차례에 걸친 청소년 지도자 양성 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나는 휴가를 이 연수에 바치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그 뒤 문화관광부가 주최한 1급 청소년 지도사 자격증을 갖게 되었고, 가톨릭 노동청년회 지도신부였던 용동진 신부님과 협력해서 노량진 학원가의 청소년들을 위해 까르딘 청소년 상담터를 열었다.

 

그러던 가운데 나는 당시 신설된 가난한 지역에 있는 삼성산본당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가난하고 하느님을 갈망하는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착한 목자로서 나를 바치고 싶었다. 그래서 밤낮없이 아이들을 위해서 시간을 내었다. 40평짜리의 태권도 도장의 지하 성당에서, 신림 10동 B지구 동네에 있는 허름한 사제관에서 청소년을 만나고 함께 고민을 나누고, 함께 밥을 해먹으며 청소년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과 함께하며 청소년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그들의 어둠을 보면서 나의 어린 시절 사춘기의 어둠을 보게 되었다. 어느덧 내 마음 안에는 그들에게 어둠을 건너뛰게 해주고 싶은 열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청소년의 햇살

 

삼성산본당에서 나는 청소년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비록 가난하고, 작고 보잘것없었지만 작은 가운데서 큰 행복을 만끽했다. 하지만 늘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꼈다. 자주 만나는 많은 친구들이 있지만 그들이 나에게 깊은 나눔을 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친구나 선배들이나 때로 다른 이들을 통해서 고민을 흘렸고, 때때로 나는 가장 늦게 그들의 고민을 알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소년은 자기가 믿고 신뢰하지만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세대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나와 함께 있는 청소년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던 가운데 1994년 8월, 난 청소년들에게 관심이 있었던 젊은 친구들과 한 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청소년들에 대해 공부하고 싶어했고, 나 자신도 청소년들을 위한 도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신문을 스크랩했고, 청소년에 관련된 기사와 자료를 모으며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청소년의 햇살’의 시작이었고 그곳에서 제작되는 ‘햇살’지의 탄생이었다. 그때 동료 사제 30여 명의 따뜻한 후원이 햇살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3년 반 동안의 삼성산본당의 생활을 뒤로 하고 시흥동본당으로 가게 되었다. 어느 날 삼성산본당의 한 친구에게서 도종환 시인의 ‘날려 보내기 위해서 새들을 키웁니다’라는 제목의 시를 받았다. 이 시 가운데 “새들이 다 날아가고 난 빈 하늘을 바라보며 또다시 새들을 키우는 일로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라는 구절은 나에게 청소년 사목에서의 역할을 깨닫게 해주었다.

 

 

떼제 노래와 함께하는 청(소)년 기도모임

 

1995년 1월 필리핀에서 교황님과 함께하는 세계 청소년 대회가 있었는데, 나는 서울대교구 대표로 참여하게 되었다. 시흥동에 있는 청소년들과 나를 알고 있는 청소년들도 함께 참여했는데, 그들을 포함해 1,800여 명의 많은 한국 청소년, 청년이 함께했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외국 여행이 처음이었기에 교황님과 함께하는 순례보다는 관광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매일 저녁 영어로 하는 떼제 기도 모임은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에게 지루한 시간이었다.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던 나는 필리핀 책임자에게, 참여자의 많은 수가 한국인이니 떼제 노래를 한국어로 부를 수 없겠냐고 제안하였다. 그는 흔쾌히 승낙해 주었고, 덕분에 나는 매일 저녁 기도 모임을 한국어로 이끌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청소년이 기도 가운데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청소년 대회가 끝나기 며칠 전 예수님의 수난을 기념하는 십자가의 길 기도가 있었다. 나는 각 교구 대표자들에게 기도모임 뒤에 십자가 친구(親口)와 고해성사를 제안하게 되었고, 좋은 마음으로 참여한 사제들은 고해성사를 줄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하느님의 새로운 이끄심에 초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없이 많은 친구들이 기도 뒤 떼제 십자가 주변에 모여 이마를 대고 기도하는 장엄한 행렬이 시작되었고, 작은 촛불과 함께 잔디밭에 마련된 단순한 고해소에서 사제들은 동이 트는 것을 맞게 된 것이었다. 많은 사제들이, 청소년들은 놀기만 좋아하고, 깊이 있는 신앙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선입견이 보기 좋게 깨지게 되었다. 그날 저녁 나는 많은 젊은 친구들에게 제안을 받게 되었다. “신부님, 한국으로 돌아가면 여기서 했던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을 지속하기 힘들 겁니다. 왜냐하면 한국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많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체험했던 그런 떼제 기도 모임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 곳에 참여한 친구들 가운데 600명의 친구들에게 ‘이런 모임을 지속하고 싶은가?’라는 설문을 하였다. 이들 가운데 300여 명의 친구들이 그러고 싶다고 응답했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본당신부였던 송진 신부님의 허락을 받고 떼제 기도 피정을 하게 되었다. 용산 성심여고에서 4박 5일 동안의 피정을 하며, 그곳에 모인 젊은이들과 매월 셋째 주 토요일 6시 30분에 기도모임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바로 청소년 청년과 함께하는 떼제 기도 모임의 시작인 것이다.

 

성심여고에서 진행되던 기도 모임은 1999년 정동 작은 형제회 수도원 성당으로 옮겨졌고, 지금까지 10년째 계속되고 있다. 나는 이 기도 모임을 위해 1993년 처음 프랑스 떼제를 방문한 이후 1995년, 1997년, 2000년, 2004년 모두 다섯 차례 떼제를 순례했다. 떼제는 메마른 사막을 지나가는 순례자들을 위한 샘터 같아 언제나 나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다. 그리고 떼제 기도에는 많은 청소년을 하느님께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도록 이끄는 힘이 있다.

 

 

청소년 공동체 미사

 

1990년 역촌동본당에 있을 때, 중고등부 미사를 하면서 청소년의 반응이 없어 안타까웠다. 어떻게 하면 전례를 통해 청소년에게 하느님께 대한 열망을 심어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시도했던 것이 바로 “청소년 공동체 미사”였다. 나는 틈만 나면 남미,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각국에서 온 선교사들을 만나 각 나라의 풍요로운 미사의 접근 방법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악보를 잘 읽지도 못하는 내가 “예수의 몸”, “공동체송”, “성호경” 등 미사를 위한 단순한 노래를 번안하게 되었다. 

 

이런 저런 방법으로 전례를 통해 청소년들에게 주님과 공동체를 체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몇몇 사제들은 ‘미사를 요란하게 드리는 신부’, ‘전례 정신을 지키지 않는 신부’, 그리고 이런 미사는 ‘놀이 같은 미사’라는 오해를 하곤 했다. 하지만 청소년 공동체 미사가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하느님께서 허락하셨다.

 

1995년 10월, 나는 당시 중고등부 교사 연합회 지도 신부였던 홍승권 신부의 요청으로 1996년 1월에 있을 제1회 청소년 큰 잔치의 대미사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당시 교구 안의 아무도 이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내가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기꺼이 수락했다. 그리고 그 때까지 시도하고 연구했던 것들을 다시 정리하면서 청소년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청소년 공동체 미사를 기획했다. 그 아름다운 전례는 청소년 큰 잔치에 참여한 3,000여 명의 청소년들을 하느님께 초대했으며 집전하셨던 추기경님도 매우 기뻐하셨다.

 

그 이후 청소년 공동체 미사는 교구 전체에 보급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교구를 넘어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중고등부 교사 연합회

 

1996년 2월 서울대교구 본당 중·고등학생 사목부의 전신인 중·고등부 주일학교 교사 연합회 담당신부로 제안을 받게 되었다. 본당 현장에서 계속해서 청소년 사목을 하고 싶었던 나는 나의 카리스마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일주일간의 식별을 거쳐서 나의 카리스마가 청소년 사목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 뒤, 중고등부 교사 연합회 지도 신부로 명령을 받았다. 연합회에 와보니 십여 명의 봉사자와 수녀님, 사무직원뿐이었고 처음 전담 신부였기에 할 일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도와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청소년을 위해 새로운 무엇인가를 하기에는 예산도 너무 적었다. 그래서 나는 햇살에서 운영하던 아이콘 판매의 이익금을 교구의 사목에 투자하였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주교님의 용단으로 예산을 올리게 되었고, 청소년 사목을 전담할 간사 한 명을 뽑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청소년 사목을 해나갔지만 실수와 허점투성이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격려보다는 ‘무엇이 문제다’, ‘무엇이 잘못 되었다’고 비난만 했다. 모든 것이 힘들었고 나는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너무 고독했고, 그리고 기쁨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혜화동 주교관 경당에서 혼자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복음 후 잠시 묵상하고 있는데 나는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는 나의 외침에 수많은 청소년들이 “또한 사제와 함께”를 외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때 나는 깜짝 놀라 이것이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주님, 당신께서 이것 때문에 저를 보내셨군요. 당신의 십자가 아래에 수많은 청소년들이 무릎 꿇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개인적인 체험은 어떤 비난과 장애물에도 상관없이 내가 받은 사명에 매진하게 하였다.

 

 

작은 공동체

 

1996년은 교구가 정한 ‘청소년 사목’의 해였다. 그해 4월 사제 총회가 있었고, 교구에서는 청소년 사목에 대해 무언가를 해야 했다. 그때 중고등부 연합회에서 무언가를 맡으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래서 현 주일학교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대체할 수 있는 대안 모델인 ‘작은 공동체’라고 하는 실험 모델을 정리하여 제안하게 되었다.

 

 

WWJD(What Would Jesus DO?), 주님 맛들이기

 

교구의 책임자로서 일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1996년 10월 필리핀 라스피나스에서 한 달간 AsIPA(Asian Integral Pastoral Approach, 아시아의 통합 사목적 접근) 프로그램이 있었다. 난 그곳에서 복음 나누기의 방법론을 배웠고, 더 나아가 청소년에게 이 복음이 어떻게 나누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다. 그래서 프라도 사제회에서 양성받았던 복음 연구와 더불어 이것을 정리하여 주님 맛들이기와 WWJD(주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의 방법론을 완성할 수 있었다.

 

 

액션송

 

1997년 2월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 산하 청소년 사목 데스크(Youth on Desk)는 아시아 교회의 청소년 사목자들을 위한 워크숍을 열었다. 그곳에서 많은 청소년 사목자를 만났다. 나는 매우 인상 깊었던 필리핀의 마리오 바클릭 신부를 초대해서 30여 명의 교구 사제들을 위한 3주간의 양성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마리오 신부님을 통해서 청소년 사목에 대한 기초를 배울 수 있었고, 그 이듬해 한 번 더 초대하여 청소년 사목의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마리오 신부가 초대하여 함께 왔던 딕냐와 릿다를 통해 액션송을 연구하게 되었고, 2년 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액션송』 1집이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청소년 사목 회의(Youth Ministry Conference)

 

나는 청소년 사목에 대한 지식을 더 쌓고 싶었다. 그래서 IYCS에서 개최한 많은 워크숍에 참여하고 동시에 양성 프로그램을 찾아 필리핀, 태국, 인도, 말레이시아, 대만 등을 다녔다.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펠릭스 카야코라 라는 살레시오회 신부를 만났다. 또 드 라살 수도회의 존 쿠르즈 수사(인도 방갈로르의 청소년 사목자 양성 센터 소장)와 필리핀의 드 구스만 신부를 통해 청소년 사목과 청소년 사목에 관련된 여러 가지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2000년 미국 버밍햄에서 Youth Ministry Conference(전 미국 청소년 사목회의)가 열렸다. 나는 어려운 시간을 내서 참여했다. 미국 교회의 청소년 사목 자료와 현 주소를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곳에서의 모든 것은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일주일 동안 계속된 회의에는 수많은 강의와 축제와 청소년에게 맞는 전례가 있었다. 내가 꿈꾸던 청소년 사목에 대한 많은 자료와 체험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떤 문화권에 있든지 청소년 사목의 본질을 추구한다면 같은 길을 걷게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모임에서 밥 멜커던트, 프랭크 맥카던트, 피터 최 등 미국의 청소년 사목자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그들을 통해서 나는 많은 정보를 얻게 되었고, 미국 교회의 현실과 또 거기에 따른 교포사회의 청소년 사목 그리고 한국의 청소년 사목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2002년 프랭크를 초대해 평신도 청소년 사목자의 모델을 소개할 수 있었다.

 

 

한일 청년 교류 모임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일본 청년들과 함께한 한일 청년 교류 모임은 좋은 체험이었다. 주교회의 사무총장이었던 김종수 신부는 한국과 일본의 청년들이 서로 교류하기를 원했고, 그 교류 모임을 주교회의 산하에 만들어내게 되었다. 이 모임을 이끌게 된 나는 교류 모임의 내용을 청소년 사목의 이론에 근거해서 만들어갔다. 이 교류 모임 뒤 많은 한일 친구들이 우정을 맺게 되었고 서로를 찾아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몇 년을 지속한 뒤에 비로소 다른 교구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제는 그들이 한일 청년 교류 모임을 이끌고 있다.

 

 

세계 청소년 대회

 

1995년 필리핀 청소년 대회를 기점으로 1997년 파리, 2000년 로마, 2002년 토론토 대회 등 네 번의 세계 청소년 대회를 통해 나는 전체 교회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많은 청소년에게 보편교회에 대한 시선을 주고 싶었다. 처음 문을 여는 것은 참 힘들지만, 문을 열고 난 뒤 많은 사람들이 그 문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이 기쁨이라는 것을 체험했다. 교구 안에서 세계 청소년 대회를 준비하는 것은 힘들었다. 많은 오해와 말들이 있었다. 그러나 청소년들을 잘 준비 시켜서 교황님과 함께하는 여정에 참여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때로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도 하고, 준비 모임을 충실하게 시키기도 했다. 나는 확신한다. 우리 젊은 청소년들이 이 세계 청소년 대회를 통하여 신앙을 더욱 성장시키고 교회에 대한 더 넓은 시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청소년 사목자 양성 단계

 

나는 지금까지 내가 다니고 경험하고 배운 모든 청소년 사목의 이론과 기술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카피요 이미테이션, 표절, 모방, 이런 것들이다. 나는 청소년 사목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10여 년 동안의 체험과 모방 끝에 이제 비로소 난 부족하지만 내 나름대로의 청소년 사목관을 갖게 되었다. 

 

중고등부 교사 연합회에 온 뒤 맨 처음 한 것은 여기에 참여하고 있는 교사들의 반응을 알고자 실시한 설문조사와 인터뷰였다. 그들의 대답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월례교육에서 배우는 것이 없다고 말했고, 때로 어떤 연수를 하지만 의무감에서 참여한다고 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이들에게 양식을 줄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다. 

 

그래서 1993년 프랑스 리모네에서 한 달 동안 있었던 복음의 젊은 일꾼을 위한 양성(신학생 양성 세미나)에서 배운 내용과 여러 나라의 청소년 사목자 양성 시스템을 토대로 3단계의 교사 양성을 위한 체계를 만들어갔다.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이 양성 시스템을 구축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바오로 사도의 세 가지 그리스도인의 상(군인, 농부, 마라토너)을 모델로 신입, 초급, 중급의 3단계 양성 단계를 만들었다. 1996년 교사 연합회는 ‘본당 중·고등학생 사목부’라고 하는 더 큰 틀을 갖게 되었다.

 

 

CYA와 IYCS

 

1996년 후반부가 되어 나는 교사 연합회라는 틀로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청소년 대표자 연수를 계획했고 폭발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 청소년 대표를 양성함으로써 본당의 사목에 활력을 주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4-5년간의 대표자 양성을 통해 본당에 활력을 주려고 했고, 양성받은 그들은 자기 지구의 대표자들과 함께 지구 모임을 형성해 가기 시작했다. 14지구 열사 모임, 3지구 주바라기 등.

 

2000년에 이미 18개 지구 가운데 10개의 지구가 청소년들의 조직을 갖게 되었다. 2000년 11월 제3회 청소년 큰잔치에서 주교님께서는 이 청소년들의 조직을 가톨릭 청소년 연합회 (Catholic Youth Action - CYA)라고 명명해 주었다. 현재 6대째 내려오고 있다. 

 

2001년 IYCS(International Young Catholic Students)에서 그동안 접촉회원(contact member)이었던 CYA를 협력회원(collaborate member)으로, 그리고 2003년에 IYCS 아시아 본부에서는 정회원(full member)으로서의 자격을 갖게 되었다. 이로써 CYA는 인도와 나이지리아처럼 KYCS와 더불어 한 나라에 두 개의 단체가 IYCS에 정회원 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IYCS에 CYA가 참여함으로써 CYA 청소년들이 아시아 교회와 아시아의 청소년들에게서 배우고 나누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한국은 아시아의 한 나라이고, 아시아 교회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아시아 교회에 우리 한국교회가 기여하고 풍요롭게 해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 넓은 교회, 바로 풍요로운 아시아 교회를 위해 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많은 청소년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의 열망을 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선물을 발견하기를 원했고, 자기 안에 숨겨져 있는 신앙을 드러내고 성숙시키기를 열망했다. 그런 작은 기회가 그들에게 주어졌을 때 그들이 자기 자신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 떼제 기도를 통해서, 화해 예식을 통해, 수많은 연수와 피정, 게더링, 큰 잔치 등, 때로 일 중독자라고 내 스스로 생각할 정도로 청소년 사목을 위해 모든 시간을 바쳤다. 하지만 긴 시간을 지나보니 그것은 성령께서 나를 통해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청소년들과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경험했다. 

 

교회가 청소년 리더를 양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그들이 청소년기를 거쳐 청년기를 그리고 성인으로 갈 때 교회는 복음의 훌륭한 일꾼들을 양성해 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는 전문화의 시대이다. 누군가 한 우물을 일생 동안 파야 하는 시대가 왔다. 나는 사목부를 떠나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 때 내게 있는 식별의 기준은 교회를 위해 무엇이 최선의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15년 동안의 청소년 사목 경험, 이것은 교회가 나에게 부여한 기회이고 선물이라고 믿는다. 나는 이 선물을 잘 보존해야 할 사명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청소년 사목을 정리하고 청소년들을 더 활성화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자 4년이라는 주어진 시간 안에서 그동안 청소년 사목현장에서 실행했던 것들을 정리하고 새로운 모델들을 연구하고자 한다.

 

누군가는 일생을 통해서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고 또 그 열매에서 씨를 배출해야 한다. 청소년 사목은 열매가 없는 사목이다. 어떤 이는 청소년에게 얼마간의 노력을 하면 곧바로 눈에 드러나는 효과를 바란다. 그는 좋은 농부라고 할 수 없다. 청소년 사목은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한 농부가, 한 사목자가 씨 뿌리기를 한다면 그 씨가 밭에서 자라 양분을 먹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런 환경이 조성될 때 수확의 때가 올 수 있다. 때로 우리 교회는 청소년 사목에서 자연의 원리를 무시하는 듯하다. 청소년 사목자는 열매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오직 씨를 뿌릴 뿐이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씨를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1고린 3,6)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듯 청소년이 열매 맺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20년 30년 뒤에 한 아이의 영혼에 새겨진 흔적이 어떤 형태로든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행복한 사제이다. 청소년 사목을 하면서 많은 기쁨을 간직해 왔다. 많은 청소년들을 통해 진정한 사랑을 배웠고, 그들과 인간적인 우정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우정을 맺었다. 비록 그 우정과 사랑이 일시적이라 해도 말이다. 왜냐하면 청소년은 그런 시기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한 일은 외형적인 일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연수’나 ‘행사’, 또 ‘큰 잔치’를 통해 결과를 바라본다. 그리고 대단히 인기 있는 나를 바라본다. 그러나 그 결과가 나타나기 위한 과정을 바라보는 사람은 없다. 그 과정은 그들과의 씨름이다. 청소년들이 열광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수많은 시간을 그들과 지새우고 아파하고 함께하고 양성하는 기간을 가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바란다. 많은 청소년들이 교회를 건설하기를, 교회의 일꾼이 되기를.

 

나는 꿈을 꾸고 있다.

 

푸른 풀밭에 샘이 흐르고 있다. 그 샘 가운데 예수님께서 계신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그분을 향해서 사방에서 함성을 지르며 모여든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 주위에서 10여 명씩 수많은 인간 피라미드를 쌓고 있다. 그들이 지치고 목마르면 그 샘에서 물을 마신다. 이것이 내가 최근에 기도하면서 그리게 된 하나의 꿈이다. 나는 교회라고 하는 이 샘으로 청소년들을 불러 모으고자 한다. 그리고 그들은 복음의 샘물을 마실 것이다. 청소년 사목은 그들에게 공동체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인간 피라미드는 그들이 스스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혼자 꾸면 한낱 꿈에 불과하지만 함께 꾸면 현실이 된다.”

 

[사목, 2004년 12월호, 조재연(서울대교구 신부, 국내 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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