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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김세중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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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5-16 ㅣ No.72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19) 김세중 프란치스코 (상)


가톨릭 거장들 속에서 성장한 김세중은 ‘한국의 미켈란젤로’

 

 

서울 혜화동성당 전면 부조 최후의 심판도 앞에서 김세중(오른쪽에서 두 번째) 작가와 장발(왼쪽에서 두 번째) 작가. 출처=최태만 논문 중.

 

 

“돌의 내면에 불을 켜고/ 청동의 녹 위에 꽃잎을 피운 사람/ 그 더운 가슴으로/ 영원의 사랑 안에 쉬다”

 

김세중(프란치스코, 金世中, 1928~1986) 1주기 추모비에 이어령이 쓴 글이다. 김세중은 실로 돌의 내면에 불을 켜고, 청동의 녹 위에 꽃잎을 피운 사람이었다. 그는 1000여 점의 작품을 제작했다. 58년의 짧은 생에 비해 무척이나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다. 김세중은 우리나라 공공조각과 종교조각에서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로댕을 존경한 청년

 

김세중은 고등학교 때 문학과 연극 그리고 정치를 놓고 진로를 고민했다. 그러다가 시인 릴케가 지은 「로댕의 어록」을 읽게 되었다. 그 책에는 로댕의 조각 작품 사진과 함께 로댕이 남긴 말들이 담겨 있었다. 로댕은 청년 김세중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로댕과 같은 훌륭한 조각가가 되고 싶었다.

 

나는 릴케가 지은 「로댕의 어록」에서 김세중이 어떤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았을지 찾아보았다. ‘예술가는 공부하지 않고 영감만을 바라서는 안 된다’, ‘예술가는 정직한 노동자처럼 일에 온 힘을 집중해야 한다’, ‘예술가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 ‘예술가는 혼자 고립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예술가는 대중들의 눈길을 끌려고 억지로 무언가 할 필요는 없다’, ‘참다운 예술가란 모든 사람 가운데서도 가장 종교적인 사람이다’ 이러한 말들이 김세중을 예술가의 길로 인도했을 것이다. 릴케의 책에는 로댕의 작품이 흑백사진으로 여러 장 등장한다. 릴케는 자신의 독특한 시어(詩語)로 그 작품들을 예찬했다. 나는 한 장의 사진에 눈이 멈췄다. 스물세 살의 로댕이었다. 빛이 로댕의 어깨를 환히 비추고 얼굴은 정면을 향했다. 꼭 다문 입에 눈빛은 예리하게 빛난다. 그 사진에 릴케는 이렇게 썼다. “세브르의 공장에서 일하던 이 젊은이는 꿈이 손으로 솟은 몽상가였다. 그는 꿈의 실현에 착수했다. 그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그의 내부에 있던 조용함이 그에게 현명한 길을 보여준 것이다.” 나는 그 젊은 로댕에게서 청년 김세중을 보았다.

 

김세중은 서울대 미대 조소과 1회 학생으로 입학했다. 김세중에게 조각을 가르쳐준 사람은 도쿄미술학교와 컬럼비아대학을 나온 김종영 교수와 조각가 윤승욱 교수였다. 김세중은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학생 신분으로 ‘청년’이란 작품을 출품해 특선으로 당선되었다. 그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람은 미대 학장이었던 장발(루도비코)이었다. 장발은 제자 김세중에게 미술은 물론 종교적인 면까지도 영향을 주었다. 김세중을 가톨릭으로 입교시킨 것도 장발이었고, 대부를 선 것도 장발이었다. 김세중은 장발의 깊은 신앙심과 훌륭한 인격에 감동해 재학 중에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사실 김세중의 부모는 불교 신자였다. 아들이 가톨릭 신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 부모는 완강히 반대했다. 그래서 김세중은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명동대성당 기숙사에서 무려 3년을 지냈다. 김세중은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나의 부모님은 오랜 불교 신자였기 때문에 나는 일치되지 않는 신앙이 괴로워서 잠시 집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명동성당 기숙사에 들어가 3년을 지냈지요. 새벽 종소리가 울리면 먼저 일어나 미사에 갔고, 아침을 먹고는 누구보다 먼저 학교로 달려가 저녁에 어두워질 때까지 작품에 몰두하는 구도자와 같은 나날이었습니다.”

 

김세중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 종교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 유학을 준비했다. 그러나 6·25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유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피난지 부산에 서울미대 임시 강의실이 세워졌다. 대학원생이었던 김세중은 그곳에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러다가 경남 마산에 있는 성지여고에 미술 교사로 부임했다. 그런데 그 학교에는 국어 교사로 시인 김남조(마리아 막달레나)가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은 호감을 갖고 있다가 마침내 서울 중림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김세중은 서울대 미대에 전임강사로 채용되었고 본격적으로 조각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서울대 미대 학장,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 젊은 시절의 김세중. 출처=김세중 작품집 중

 

 

하느님께 삶을 봉헌한 조각가

 

김세중의 종교 조각은 서울대 미대 교수들의 영향이 컸다. 김세중의 스승이자 대부였던 장발과 조각과 교수였던 윤승욱, 김종영, 이순석 모두가 가톨릭 신자였다. 그래서 ‘서울대 미대가 우리나라 가톨릭 미술을 선도했다’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니다. 김세중은 27세에 ‘자매 순교자’를 청동으로 조각했다. 자매 순교자는 기해박해 때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 언니 김효임 골롬바와 동생 김효주 아그네스이다. 두 자매는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있는데 언니는 손에 순교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잎을 들고 얼굴을 아래로 향하고 있고, 동생은 십자가를 왼손에 들고 하늘을 힘차게 올려다보고 있다. 높이가 177㎝의 청동이 주는 무게감과 질감 그리고 종교적 영성이 한데 어우러져 매우 비장한 느낌을 준다.

 

장발은 오래전에 ‘골롬바와 아그네스’라는 성화를 제작한 바 있다. 김세중의 ‘자매 순교자’는 스승의 성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전문가들은 김세중의 종교 조각은 중세 유럽의 교회 조각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한다. 당시 해외여행이 어려웠던 시기였기에 김세중은 서양에서 들여온 미술 서적을 통해 유럽 중세 조각을 많이 연구했을 것이다. 서울 혜화동성당의 전면에 화강암으로 조각된 ‘최후 심판도’는 장발이 주도했는데 그 작업에 김세중이 참여했다. 180여 개의 화강암을 붙인 부조는 김세중이 원도(原圖)를 만들었고 몇 사람과 함께 조각했다. 가운데 예수님은 오른손을 들어 심판하는 모습이고 양쪽의 네 사도(복음사가)를 상징하는 사자(성 마르코), 독수리(성 요한), 천사(성 마태오). 황소(성 루카)는 각각 날개를 달고 있다. 예수님이 옥좌에 앉아 선인과 악인을 심판하기 위해 오른손을 치켜든 모습은 마치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최후의 심판’ 속의 예수님을 연상시킨다. 부조의 선과 면은 굵고 단순하며 강하다. 화강암이 주는 강한 질감과 돌출시킨 조각들이 한데 어우러져 하느님 말씀을 힘차게 선포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14,6),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33) 혜화동성당은 김세중의 가톨릭 조각 작품이 모여있는 작은 미술관이다.

 

김세중이 가장 많이 남긴 종교 조각은 ‘성모상’과 ‘성모자상’이다. 가톨릭대의 ‘평화의 모후’와 ‘성모상’, 계성여고의 ‘성 마리아’, 세종로교회의 ‘동정 마리아’, 원효로교회의 ‘영광의 마돈나’, 반포성당의 ‘성모자상’, 가톨릭미술전의 ‘성모자상’, 성 라자로 마을의 ‘피에타상’, 구산성당의 ‘성모상’, 도림동성당의 ‘성모상’, 서교동성당의 ‘성모상’, 바티칸미술관의 ‘성모상’ 등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가톨릭 조각 작품이 많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명수대성당의 ‘성심상’, ‘십자가의 고난’, ‘그리스도’, 혜화동성당의 ‘최후의 심판도’, ‘성 베네딕도상’, ‘십자가’, 성 라자로 마을의 ‘새 삶의 예수상’, 가르멜수도회의 ‘십자가’, 서교동성당의 ‘십자고상’, 불광동성당의 ‘김대건 신부상’과 ‘십자고상’, 바티칸미술관의 ‘예수상’과 ‘14처’, 절두산성당의 ‘요한 바오로Ⅱ세상’ 등이 있다. 그밖에 가톨릭 건축물로 ‘천주교 순교 기념탑’과 절두산 성지 ‘순교 기념상’을 건립했다. 특히 ‘순교 기념상’은 순교한 성인들을 화강암에 새겨 넣었는데 태양 빛을 받으면 조각은 마치 청동처럼 빛나며 모든 순교 성인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일반대학 조각과 교수가 종교 조각을 이렇게 많이 제작한 것은 유례가 없다. 김세중은 미켈란젤로처럼 평생 가톨릭 작품을 만들며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을 살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5월 14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20) 김세중 프란치스코 (하)


광화문 ‘충무공상’ 조각한 김세중, 공공조각의 선구자

 

 

김세중 작가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 점토원형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출처=최태만 논문

 

 

공공조각에 사상을 담다

 

김세중(프란치스코, 金世中, 1928~1986)은 공공조각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가 처음 제작한 작품은 전 국민이 모금한 돈으로 건립한 ‘유엔 참전 기념비’였다. 6·25전쟁 때 공산주의를 물리치기 위해 참전한 유엔군을 기념하는 조형물이다. 기념탑은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 북쪽 끝에 약 55m 높이로 세워졌다. 그런데 이 기념탑은 도로를 확장하느라 안타깝게도 철거되었다. 기념비의 전면과 후면에는 ‘자유의 여신상’과 ‘승리의 남신상’이 조각되어 있고, 기념비 아래에는 ‘광복’, ‘건국’, ‘전쟁’, ‘유엔의 도움과 재건’이라는 4개의 청동 부조를 새겼다. 김세중은 이 건축물에 종교적 상징을 넣었다. 죽은 아들을 품에 안고 슬퍼하는 어머니의 조각은 피에타를 연상시키고, 칼을 두 손으로 잡고 서 있는 천사 조각은 가톨릭 천사의 모습이고,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조각은 1955년에 제작한 ‘자매 순교자’ 모습이다.

 

김세중의 가장 유명한 공공조각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다.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와 서울신문사가 공동으로 건립을 추진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이순신 장군을 존경했다. 그래서 동상은 박정희가 헌납하고 제자(題字)도 박정희가 썼다. 명문(銘文)은 시인 이은상이 지었고, 조상(彫像)은 김세중이 하였다. 미술전문가들은 이순신 장군상은 서양의 장군상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고 했다. 서양의 장군상은 대부분 말을 타고 있는데, 이순신 장군상은 우뚝 선 입상이다. 한국 전통 조각의 맥을 그대로 이은 것이다.

 

그런데 한편에서 이순신 장군상에 이의를 제기했다. 동상은 군사독재자의 발상과 발주로 만들어졌고, 칼을 오른손에 잡고 있어 패장(敗將)의 모습이며, 세종로는 충무공과 전혀 관계가 없는 곳이며, 장군의 모습은 현충사 표준 영정과 다르므로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김세중은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

 

“예술은 하나의 거목에서 무한한 내면성을 찾으며, 그 시대의 이념과 요청을 여기에 반영시켜 끊임없는 새 양심과 인격 그리고 정신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 작품의 생명은 형태의 정도보다 거기서 풍기는 강한 사상성에 있다. 이런 점에서 역사를 후대에 미화 내지 이상화시켜 전승시켜야 한다는, 국민 교육적 작가의 희망에서 동상을 제작한 것이다. 사진과 똑같은 영정을 만드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어쨌든 이순신 장군상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상징적 이미지가 되었고 대한민국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했다. 이외에도 김세중은 수많은 공공조각을 제작했다. 파고다(탑골) 공원의 ‘3·1 운동 기념 부조’, 국립극장의 ‘분수대’ 조각, 장충단 공원의 ‘유관순 동상’, 서울의 ‘남산 터널 부조’, 여주 영릉의 ‘세종대왕상’, 어린이대공원의 ‘분수’ 조각, 임진각의 ‘아웅산 순국 위령탑’, 국회의사당의 ‘애국애족의 군상’, 부여의 ‘계백장군 기마상’, 행주산성의 ‘권율 장군상’ 등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작품에 담다

 

김세중은 모든 예술은 하느님의 모습을 찾는 일이며, 그 일을 끊임없이 추구해 나가는 사람이 바로 예술가라고 했다. 그래서 예술 작품은 ‘하느님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예술에는 고행이 따르는 법이고, 엄격하고 가혹한 ‘자기 학대에 가까운 고행’ 없이는 예술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김세중은 그러한 고행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의 종교 조각에서는 중세 시대의 그 경건함과 엄숙함 그리고 거룩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어떤 미학자가 말했다. “예술가는 더 이상 불가능한 시도를 하며 끝없이 좌절하는 무모한 사람이 아니다. 김세중은 행복한 시시포스다.” 시시포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의 왕인데 제우스의 분노로 저승에서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까지 밀고 올라가는 벌을 받았다.

 

김세중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서울대 신입생 환영회가 있는 날이었다. 어떤 공대 학생이 한 미대 학생을 괴롭혔다. 이를 본 다른 미대 학생이 그 공대 학생에게 폭력을 가했다. 순간적인 격정을 이기지 못한 것이었다. 바로 문제 학생이 되었다. 학생의 어머니가 학생과 함께 김세중 미대 학장실로 불려왔다. 김세중은 그윽하면서 엄중한 눈길을 보냈다. 그러면서 “미술대학 역사에 이런 일은 없었네!”하고 딱 한마디만 했다. 그 학생은 김세중 앞에서 고개를 숙였고, 잘못을 뉘우치고는 학장실을 조용히 나갔다.

 

김세중 교수의 실기수업 시간이었다. 어떤 학생이 투정을 부리듯 작업을 안 하고 고개를 숙이고 무언의 반항을 했다. 그런데 김 교수는 야단을 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 우유와 빵을 사갖고 왔다. 그러면서 “자네 이거 먹고 힘내서 작업하게”하고 따뜻이 격려해 주었다. 김세중은 실기를 지도할 때 학생들 작품에 일일이 손을 대지 않았다. 그렇지만 작업하는 학생 옆을 지나가기만 하면 학생의 작품은 저절로 완성되었다. 실기를 말보다 표정으로 가르친 것이다. 김세중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을 찾아내 장학금을 주어 학업을 포기하지 않게 했다. 그래서 적지 않은 학생이 계속 공부할 수 있었다.

 

 

엄격한 예술가, 자상한 스승

 

김세중은 위를 수술했다. 생명을 건 대수술이었다. 수술 경과가 좋지 않아 여러 달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는 입원실에 자신이 만든 ‘예수상’을 세워놓고는 늘 기도했다. 병이 주는 고통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 간청했다. 김세중이 입원실에 놓고 기도한 ‘예수상’은 약 50㎝ 높이로 청동으로 조각되었다. 조각의 예수님 얼굴은 유난히 긴데 눈을 지그시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다. 얼굴을 극도로 단순화했기에 종교적 신비감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김세중은 그 ‘예수상’을 통해 위로받고 치유되었다. 이 작품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김세중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공인으로 일했다. 당시 미술인들의 꿈이었던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 건립계획이 예산 부족으로 취소될 운명에 처했다.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 위치) 관장이었던 김세중은 날마다 국회를 찾아다니며 의원들을 설득했다. 그의 끈질긴 설득과 간청 끝에 국립현대미술관을 다시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과천에 새로운 국립현대미술관이 건립되기 시작했고 그 건축의 총지휘를 김세중이 맡았다.

 

그런데 준공을 두 달 앞두고 과로와 지병으로 김세중은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례 미사는 명동대성당에서 김옥균 주교가 집전했다. 그의 운구는 마지막 마무리로 한창이던 미술관 건립 현장을 돌았다. 공사 현장에서 최후의 작별을 고할 때, 공사장 근로자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도열해 운구를 향해 깊이 머리 숙였다. 그들은 똑같은 오리털 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것은 김세중이 현장 근로자들이 추운데 일한다고 사비로 사서 나누어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김세중의 제자였던 조각가 최종태(요셉)는 스승을 이렇게 기억했다.

 

“엄격하신 예술가로서, 자상하신 교육자로서, 탁월하신 행정가로서 매사에 원칙을 바로 세우시고 옳은 일이라 판단되실 때는 물불을 마다치 않으셨으며 각계각층의 수많은 선배 후배들에 대해 고르게 마음 쓰시는 참으로 큰 틀을 타고나신 드문 스승이셨다.”

 

참고자료 : ▲ 김영나 외 6인 「조각가 김세중」 현암사. 2006 ▲ 김세중기념사업회 「김세중」 서문당. 1996 ▲ 가톨릭신문 ‘조각가 김세중1’. 2016.6.19 ▲ 최태만 「조각가이자 교육자로서 김세중의 재평가」(2011) s-space.snu.ac.kr(조형-아카이브) ▲ 장우성 「화맥인맥」 중앙일보사. 1982 ▲ 오귀스트 로댕. 김문수 역 「예술의 숲」 돋을새김. 2007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안상원 역 「릴케의 로댕」 미술문화. 1998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5월 21일, 백형찬(라이문도, 전 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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