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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교회 내의 일치와 화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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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1 ㅣ No.87

교회 내의 일치와 화합

 

 

머리말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인식되는 사람들로 구성된 특수한 사회 단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성과 고유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교회와 사회의 관계는 상호간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는데 힘의 경중에 따라 영향력에 차이가 날 수도 있다.

 

한국 사회는 아주 빠른 속도로 산업화를 거쳐 근대 사회로 변하고 있고, 이와 같은 변화는 사회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교회도 변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로서 사회의 복합적인 요소와 개별화에 따라 교회 안의 일치와 화합의 밀도가 약해지는 현상을 말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사회와 맺는 관계성에서 교회를 살펴보고, 교회 내의 일치와 화합의 문제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사회와 맺는 관계성에서 본 교회

 

'교회'는 '주님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진 ‘키리아케’(Kyriake)와 ‘백성들의 모임’이라는 뜻을 가진 ‘에클레시아’(Ecclesia)에 어원을 두고 있는 개념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자신들이 소속되어 있는 공동체를 나타내는 데 사용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교회라는 명칭을 자신들의 공동체를 나타내는 데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일반적으로 사회 안에 존재하는 다른 종교와 구분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기초를 이루는 교회가 어떤 의미로 이해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에 그리스도교의 전통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서양에서는 교회의 개념이 신앙 신조와 연관되어 일종의 기술적인 의미로 발전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교회에 대한 신학적 가르침은 종교 개혁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19세기와 20세기에 이르러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종파에 의해 체계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볼 때 교회라는 개념은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자신들의 신앙 공동체를 교회로 명명했고 이러한 사실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자연스럽게 인정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들의 믿음과 믿는 이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신앙과 공동체는 교회의 기본을 이루는 핵심 요소로 나타난다. 

 

사회의 전문화와 개체화로 분업화된 사회 안에서 교회는 다른 사회적인 제도, 곧 경제, 노동 조합 또는 대학 등과 같이 일반적인 의미로 사회적인 제도의 한 형태로서 이해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체적으로 인식되는 내부적인 요소와 사회적인 측면에서 평가되는 외부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본 교회는 사회 안에 존재하는 조직력을 갖춘 하나의 제도로서 사회와의 연관성과 영향력 등으로 중요성이 인정되거나 인정되지 못하는 현상을 보여주게 된다. 그러므로 사회적인 측면에서 본 교회는 사회와의 관계성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회 제도로 나타나게 된다. 교회는 핵 연료의 사용이나 핵 무장에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입장을 보일 수도 있고, 임신 중절이나 산아 제한에 반대하거나 묵인하는 입장을 가질 수도 있으며, 정치적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고 노동 조합이나 인권 운동 등에 나름대로 현실적인 입장을 드러낼 수도 있으며, 사회 정의 실현 문제나 국가간의 정의와 평화 문제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인 측면에서 본 교회는 대부분 사회와의 관계성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정도에 따라 인정되거나 인정되지 못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교회가 사회에서 인정을 받게 되면 인정받는 것에 비례하여 사회의 제반 영역에 영향력을 갖게 되고, 인정을 못 받게 되면 그것에 비례하여 영향력의 정도나 범위가 줄어들게 된다.

 

교회가 사회의 흐름을 잘 파악하여 그 흐름을 유도할 수 있을 때, 교회는 이에 비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양적으로 많은 부분을 차지할 때 역시 힘에 따른 영향력을 갖게 된다. 그러나 힘에 따른 영향력 추구는 종교의 근본 입장인 질적인 요소를 무시하는 기득권 차원의 경쟁에 속하기 때문에 모든 종교인들은 이러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종교인들이 이러한 힘의 경쟁으로 영향력 확보에 힘을 쏟게 된다면 그러한 노력에 비례하여 종교는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린 속화의 길을 걷게 된다. 

 

어떤 종교에 소속되고 소속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신앙인들이 교회를 어떻게 인식하도록 만드느냐 또는 어떤 신앙 공동체로 신앙인들에게 이해시키느냐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요소가 교회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 가르침이나 교회의 지도 체제에 대한 자명한 이해심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 안에서 이해되는 교회의 모습을 형성하는 데 크게 작용한다.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확신을 가져야만 교회가 일치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고 이러한 일치된 모습은 사회 안에 큰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는 종교의 종류나 다른 종파와의 관계성에서 각자가 고유성을 주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고 다른 종파나 종교를 인정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종교의 자유를 다른 자유에 대한 권리와 더불어 각자가 결정할 수 있는 요소로 보았다. 종교 선택의 자유에 대한 의견을 토대로 할 때 교회에 대한 인식도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게 된다. 오늘날 서양의 대중적인 교회에 대한 의견은 교회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교회를 윤리적 제도로 보거나, 일반적으로 교회에 무관심한 경향을 보인다. 교회를 윤리적 제도로 보는 사람들은 교회가 윤리적인 의식을 강화시킴으로써 정치나 경제 면에서 보이고 있는 인간의 이기주의를 극복하게 하여 세상의 평화와 인간의 정의를 실현하게 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바라게 된다. 

 

그러나 종교가 단순히 인간의 개인적인 사생활에 속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윤리적 사회적 측면을 거부하고 무시하는 경향을 띰으로써 그 결과 교회 없이도 그리스도교 신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다. 교회를 윤리적 제도로 보는 경향은 교회에 속한 많은 사람들의 의식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예로서 1970년에 실시한 어느 조사에 따르면 전세계 가톨릭 신자의 61%는 교회가 나라의 지도자나 정치가들이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도록 촉구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고, 20%는 교회가 자신의 근본 목적인 구원에 힘쓰고 노력해야 한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교회의 공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는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점차 줄어들고 있고, 사회와 사상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은 점점 교회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개인적인 의미로 중립적인 입장에 서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난 상태에서 구원될 가능성과 교회에 참여하지 않는 상태에서 가능한 신앙심에 대하여 토론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세계적 흐름은 오늘날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냉담자나 신자들의 무관심을 이해하는 데 근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한국이나 전세계적으로 교회에 대한 무관심과 교회에 직접 참여하는 신앙 생활이 점점 열기를 잃어가고 있는 현상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사회 현상과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이러한 교회 밖의 종교심에 대한 현상은 교회에 속한 공공의 생각이나 행동 양식과 같은 종류의 것으로 다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심과는 다른 별개의 것으로 인정되고 다루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교회에 속한 사람들과 교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사회의 건강을 책임지는 윤리적 제도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들은 교회의 내부적 관점과 외부적 관점이 상충될 때, 외부적 관점을 우선시 하고 외부적 요구 충족에 비중을 두게 하여 교회 내부의 자의식을 왜곡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면 교회가 본의 아니게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사건에 말려들어 갈등을 조장하기도 하고 성직자가 직접 정치적 지도자로 변신하는 경우를 보여주는 현상이 여기에 해당한다. 

 

교회에 속한 개개인은 이 두 관점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갈등을 느낄 수도 있고, 이러한 갈등은 결국 교회를 멀리하게 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한국 사회 안에서 가톨릭 교회가 사회 정의와 인권 문제에 무게를 두어 정치 세력과 마찰을 일으키고 갈등을 겪으면서 교회에 대한 일반적인 호의나 인정하는 비율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교회의 본질이 흐려지기도 했고 이에 회의를 느낀 사람들이 교회와 거리를 두게 된 현상도 나타나게 되었다. 교회에 속한 신앙인에게 교회의 내부적 관점을 주지시켜 본질적인 신앙인을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지만, 신앙인도 역시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외부적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러한 두 가지 관점에서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갈등 요소를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오늘날 일치된 성서 이해나 현 시대 의식에 따르면, 교회의 내부적 관점이나 외부적 관점이 균형을 이루어 동시에 만족스럽게 실현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바탕을 두어 교회는 내적인 관점과 외적인 관점을 정확히 구분하여 외적인 관점에는 간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외적인 관점에 눈을 더욱 돌려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교회는 상황적으로 두 개의 큰 방향을 조화시킬 의무에서 해방될 수 없으므로 교회의 자의식을 강화하여 주체 의식과 목적 의식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 외부적 관점에 간여하는 현실적인 해결을 시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회의 내부적 관점과 외부적 관점은 또한 체제적인 교회법의 테두리 안에서 서로 만나게 되는데, 여기에서 교회는 신앙 공동체로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신앙적 차원에 기초를 둔 내세적인 면과, 법적인 면에서 현실적으로 조직된 제도로서 표현되는 교회의 상징성 중에서 어느 한 쪽이 더 분명하게 나타나는 현상을 보여줄 수 있다. 

 

상징적으로 보면 교회가 하느님 나라의 볼 수 있는 표지로 되어있으나,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상징성은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게 나타난 때도 있지만 불분명하게 나타난 때도 있었고, 어떤 때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까지 나타난 때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사실은 교회에 대한 신학적인 정의와 사회에서 보는 교회 인식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사회 안에 존재하는 제도적 조직체로서 내부적 관점과 외부적 관점 사이의 갈등 요소를 자신 안에 갖고 있으나, 이러한 갈등은 사회와 맺는 관계에서 개별 교회의 특징을 드러내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어떤 교회가 현실 참여를 내세적인 구원보다 우선시 하는 데 비해 다른 교회는 구원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인 교회는 완전을 실천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완전한 요소를 자체 안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교회에 존재하는 내적인 관점과 외적 관점이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한 가지만을 고집할 때에 교회 내의 일치와 화합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에 존재하는 교회는 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에서 지혜롭게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내부적 관점과 외부적 관점을 조화시켜 자신의 균형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복잡하고 다양화되는 사회 변화에서 교회가 자신의 일치된 모습을 보여줄 때 교회는 가치 기준을 설정할 수 있는 이정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교회 안의 일치와 화합

 

성찬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친교에 참여하는 교회의 내적 구조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평화와 정의가 마침내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에서 새로워진 인간의 미래적 일치가 이루어지는 표지로 이해된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성체를 기반으로 형성된 일치는 하느님과 화해한 인간의 미래적 일치를 나타낸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치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일치와 관계되고 있는데, 그 이유로 이러한 관계는 성사로서 이루어지며 또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치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실현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러한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치를 통하여 자기 주장과 자신만의 이익을 고집하는 분열된 세상에서 용서와 평화의 표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용서와 화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로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기초가 되어 작용할 때 교회를 구성하는 신앙인들은 일치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된다. 만약 교회 안에서 신앙인들이 자신들의 이기심과 세속적 욕심 때문에 생긴 고집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실현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로서 사회에 존재하는 정치적, 사회적 또는 문화적, 경제적 갈등을 풀 수 없게 된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같이 형제 자매처럼 진정한 의미로 공동체를 실현하며 산 역사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교회 안에서 일치된 모습으로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 당위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아무런 노력 없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초대 교회 공동체 안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근거한 일치와 화합을 해치는 요소가 있었지만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성령께 기도하고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함으로써 일치가 깨질 수 있는 위기를 극복하였던 것이다. 

 

교회가 일치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함은 또한 교회가 거룩하다는 데 토대를 두고 있다. 사도들의 복음에 대한 충실성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신앙심을 전제로 한 것으로, 이러한 신앙심을 기초로 이루어진 교회는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거룩한 공동체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일치와 거룩함에 토대를 두고 미래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는 특성상 거룩함과 보편성 그리고 사도성과 단일성이 포함된 단체이기 때문에 내부의 분열을 용납하지 않게 된다. 

 

교회의 단일성은 갈라진 사람들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가 되고 사도들의 충실성은 교회 안의 여러 가지 갈등을 화해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사도들의 충실성은 또한 전해진 교리나 삶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변하는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를 통하여 이어져 내려오는 진리에 대하여 무감각할 때 교회의 누구도 일치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게 되고 성령께서 함께하시지 않는 인간적인 독선에 빠지게 된다. 독선에 빠진 사람은 결국 교회 안의 일치를 방해하고 거룩한 신앙 단체를 세속화시킨다. 더욱이 그들은 사회가 개체화되는 방향으로 흐를 때 마치 교회도 분열되는 것이 사회의 그러한 흐름에서 당연한 것인 양 착각하도록 사람들을 유혹하게 된다.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신앙은 신앙인들의 일치를 방해하는 삶의 태도를 버릴 수 있도록 용기를 주지만, 세속화된 신앙은 오히려 분열과 갈등을 자연스럽게 조장한다. 왜냐하면 분열과 갈등은 인간의 이기심과 세속적인 욕심을 충족시키는 데 더 나은 조건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은 이러한 인간적 이기심을 거슬러 정의와 평화를 갈망하고 실현하도록 촉구한다. 물론 세상도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현실적으로 세상이 추구하는 평화는 힘있는 자의 구상대로, 정의는 불평등을 인정하는 가운데, 자유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훼손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러한 세속의 경향은 교회 안에서도 발견되고 있으며, 결국 교회 안에 불협화음을 만들어 일치에 해를 끼친다. 

 

교회는 또한 세속의 법칙처럼 자신 안에 힘을 비축하여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데 주체적인 역할을 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가 힘을 비축하기 시작할 때 세속적 의미의 영향력은 강화될 수 있겠지만 하느님을 잊어버리게 된다. 현대에는 돈이 바로 세속적 힘의 상태를 나타내는 척도로 나타나고 있다. 돈을 통한 교회 운영이나 돈을 통한 사목은 당장 효과 있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돈이 우선시될 때 그만큼 속화되고, 속화는 바로 그리스도 공동체 안의 일치를 송두리째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정신에 따라 살도록 사람들을 가르치고 미래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로 사람들을 이끌어야 한다. 이렇게 진리의 확신에 찬 공동체를 형성할 때 교회는 자신의 고유한 특성인 일치된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교회 내의 교계 제도

 

교회는 하느님의 통치를 예견하게 하는 성사적 표지로서 사람들 사이의 개인적인 욕심에서 생기는 서로의 잘못을 화해의 성사로 극복하도록 배려한다. 신앙인들은 죄를 함께 고백하고 하느님을 공동으로 찬미하여 하느님께 대한 소속감을 공고히 하는데, 이러한 성사 안에 사랑의 성령께서 깊이 개입하신다. 신앙인들의 일치는 사도들의 신앙에 대한 충실성과 설교,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 그리고 그들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에서 나타나고 있고, 사도들이 이룩한 교회 안의 일치는 교회의 유산으로 남아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을 통하여 전해지고 주교들은 신앙인의 유산인 교회 안의 일치를 실천해야 할 몫을 가지게 된다. 

 

교회 안의 일치는 성사적 전례와 이에 종사하는 성직자들의 봉사적 삶으로 더욱 견고하게 된다. 그러나 성직자들이 교회 안의 일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살아야 하는 봉사적 삶은 실천적인 면에서 볼 때 매우 어려운 것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성직자들은 잘 짜인 조직의 일원으로서 조직에서 주어지는 기득권을 당연한 것인 양 사용하게 되고, 기득권으로써 신앙인들에게 군림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은 봉사하는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신자들의 눈에는 독선적이고 군림하는 모습으로 비추어지는 현상은 분명히 교회 안의 일치를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직자는 자신이 많은 기득권을 누리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성직자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참된 목자로서 양 떼를 위하여 진정으로 봉사하며 살아야 하고, 이러한 목자의 삶은 교회 안의 세속적 불협화음을 없애며 일치와 화합을 이루게 하는 기초로 작용하게 된다. 성직자가 획일적인 관리와 신자들의 외형적이며 조직적인 일치에 사목의 초점을 맞추게 될 때 교회는 사회적이며 외적인 면을 중요시하게 되고, 이러한 경향은 결국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공동체적인 형제적 사랑에 기초를 둔 교회 안의 일치를 위협하게 된다. 

 

성사를 집행하는 사목자는 힘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세속적 일치를 교회 안에서도 현실화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늘 힘의 유혹을 경계하고 자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성부께 봉헌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의 삶에서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계 제도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 관계를 실현시키는 데 이용되어야지 인간의 지배 욕구를 충족시키는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성직자들도 육신을 가진 인간이므로 일반 신자들은 성직자들이 이러한 세속적 경향으로 흐를 수 있음을 늘 명심하며 성직자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음으로써 진정으로 공동체적인 교회의 일치를 실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느님 나라에 속한 모든 구성원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처럼 서로 제 몫을 다할 때 성령의 도움으로 교회 안의 일치는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사목, 1998년 9월호, 김신호(대전교구 변동 천주교회 주임 신부,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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