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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산 위의 마을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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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1 ㅣ No.91

'산 위의 마을'을 향하여

 

 

새로 부임한 본당 신부에게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어떤 교우가 명함을 내민다. 이름 자 앞의 직함에 '전 예비역 대령'이라 새겨 있었다. 전역한 지 20년은 족히 지났을 텐데,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 달라는 뜻이겠으나 연민이 인다. 연민이란 현재 보여 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리고 꿈도 희망도 없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측은지심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왕년에 내가 ......." 그런 것이다. 이런 이들의 공통적인 모습은 자기 경험과 지식을 절대화하는 태도에 묶여 산다는 점이다. 젊은이들은 언제나 미래를 말한다. 꿈과 희망이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생명이 피어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희망도 꿈도 없이 과거의 궤적을 내세우며 사는 이들의 조울증 같은 것에서는 생명이 시들어 가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21세기 우리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미래의 희망을 말하는가? 아니면 전통 유산과 과거 업적에 기댄 권위의 조울증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 생명이 피어나는 교회인가? 무너진 유적지를 보는 듯한 연민의 교회인가? 차갑게 질문할 때이다.

 

 

1. 교회에 부는 바람

 

우리 교회는 내부적으로 심상치 않은 변화를 목격한다. 새 입교자들의 증가세가 멈추고,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교회를 멀리하고, 주일 미사 참례자와 고해성사 등 성사 참여가 점차 줄어든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본당 신부의 불합리한 처사에 대한 항의가 오르고, 환속하는 사제의 비율도 증가한다. 뭔가 변화의 기류가 흐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꼭 그에 대한 대응은 아닐지라도 교회는 특수하거나 전문 분야라고 느껴지는 사목에 대한 관심을 갖고 전담 사제를 배치하고 있다. 교회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그래서 교구마다 시노드를 열기도 한다.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무엇인가?' '이 시대에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진지하게 질문하기 시작하는 듯하다.

 

세상에 대한 교회의 비전은 우리 시대 그리스도교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는 데서 얻을 수 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다르긴 하지만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예언자와 교사(敎師)의 모습일 수도 있고 위로와 안식의 모성(母性)일 수도 있고, 빛과 소금일 수도 있고 이상 세계의 비전과 희망일 수도 있을 것이다. '교회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자문하는 교회는 아직 살아 있는 교회다.

 

그런데 교회가 자신의 정체성과 시대적 모습에 대하여 고뇌하고 질문하는 것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한 것이었을까? 단지 교세가 위축되는 위기 상황에 발빠르게 대응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어야 한다. 시대의 징표를 읽는 것, 변화의 진원지인 사회 역사적 실재와 현상들을 분명하게 목격하고 그것들의 발전 방향을 예측하는 것이어야 한다. 방향의 예측은 시대의 발전 가운데 인간과 인간성이 어떻게 위협받고 축소되고 있는지를 추적하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의 관심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는 감각이 살아 있는 교회는 자신의 비전을 마련할 수 있다. 그런데 시대가 어떻게 변하고 있다는 것인가?

 

 

2. 세상에 부는 바람

 

한국 사회, 우리 시대의 성격을 단적으로 표현하면 '개인 중심의 소비 문화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정신과 물질의 두 차원에서 관찰할 때, 첫째는 윤리와 도덕 같은 정신 세계가 완전히 붕괴되어 버린 '정신적 공황의 시대'이며, 둘째는 후기 자본주의의 다른 말이기도 한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에 줄 서 있는 '소비 문화의 시대'이다. 과거는 독재 체제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던 저항의 시대였다. 그리고 빈곤을 극복하기 위한 노동의 시대였다. 체제에 저항하는 것, 열심히 일하는 것이 사회가 공감하는 덕목이었다. 그러나 이제 대단히 무한정한 자유와 민주주의 시대가 왔고, 빈부의 격차가 심각한데도 물질의 풍요를 구가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런데 우리 시대는 또 다른 병리 현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저항의 시대에는 민주주의, 통일, 민족, 사회 개혁이라는 대의적 도덕성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행해지는 시위와 단체 행위의 성격은 거의 대부분이 이익 집단들이나 지역 주민, 특정 직업인, 학생 할 것 없이 자신들의 이익을 빼앗기지 않거나 더 확보하기 위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기주의적 성격의 시위는 참가자가 많고, 공익 성격의 시민 사회 단체의 시위는 참가자가 적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집단 행동의 자유화는 민주화 체제 아래서만 가능한 내용들이다. 그래서 군사 독재 시절에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던 언론과 계층과 집단들이 무서운 결집의 힘을 행사하고 저마다 권리를 주장하며 나서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운동은 이런 극도의 이기심만이 난무하는 병든 민주화의 시대가 도래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우리 사회는 이기주의와 안락만을 추구하는 어둠과 절망의 늪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3. 병들고 갈라진 시대를 바라보며

 

물질적 풍요를 바탕으로 한 소비 사회는 소득에 관계없이 승용차를 굴리고 가족마다 핸드폰을 들고 다니도록 속삭이며 부추긴다. 갖가지 가전 제품들이 필요성도 확인되지 않은 채 안방을 차지한다. 소비가 침체되면 곧 국가 경제가 흔들린다. 가장의 직업이 불안정해진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경제의 젖줄은 대량 생산과 지속적인 공급이다. 지속적인 수요의 시장을 필요로 하므로 모든 제품의 수명을 단축시키도록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해서 쓰레기를 양산한다. 퍼스널 사양으로 출시하여 공동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 결과 손에 핸드폰, 방마다 인터넷, 이웃은 고사하고 가족마저도 텔레비전 앞에 함께 모일 이유가 없어진다. 모두가 개인주의로 살아가게 만들며 혼자서도 행복한 시간으로 밤을 지새울 수 있게 하며 기쁜 소식을 대신한다.

 

이렇게 해서 공동체성이 붕괴된다. 소비를 조장하는 구조는 공동체적 삶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또 늘어나는 생활비를 확보하고 가족의 행복을 유지하려면 가장(家長)은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대의(大義)나 공익을 말하는 것은 이상주의자가 된다. 정말 이토록 의식이 병들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서로 갈라져 대립하게 만든 소비 사회는 마법의 시대다. 모두가 마법에 걸려 살아가고 있는 변태와 절망의 시대를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교회가 있는 것이다. 신앙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앞에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 선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목격되는 시대의 부정성은 정확히 교회의 사명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병들고 갈라진 절망과 좌절의 땅에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신다. 잡목으로 우거진 혼돈의 땅에 불을 지르고 칼로 쳐 정(正)과 부정(不正)을 갈라 세워 새로운 창조를 제시하신다. 보이지 않으면서도 삶을 지배하는 힘인 악령을 추방하고 질병을 치유하시어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고 갈라진 이들을 복구시키신다. 그런 예수님의 사역이 바로 하느님 나라를 도래시키려는 당신 사명이라고 강조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갈릴래아 민중들의 희망이 되셨고 새로운 삶의 의미와 목표가 되셨다. 새로운 희망에 대한 신념이 너무나 확고했기에 결코 좌절되거나 포기할 수 없는 영원한 진리임이 부활과 함께 드러났다. 그래서 예수 없는 시대에 희망의 노래가 되었다.

 

 

4. 갈망의 시대, 희망의 발견

 

교회가 예수님의 사명을 계승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라면 좌절과 배반의 시대에 교회에 주어진 그리스도의 사명은 새로운 유토피아를 제시하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자에게 구세주이실 뿐이다. 현재의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에게 결코 그리스도일 수 없다.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에게만 당신을 계시하셨다. 문제는 이 좌절의 시대에 이상향의 세계에 대한 미련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이들이 있어 목말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살아 계신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는 아직도 계속해서 선포되어야 한다. 그들에게만이라도 희망의 빛이 되고 구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는가?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첫 제자로 부르신 내용을 보면, 공관 복음과는 달리 요한 복음에서는 그들이 좌절과 절망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고 있었다고 전해 준다.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났는데, '어떻게' '무엇으로' 살아가는지 확인하고 싶어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와서 보시오." 하고 초대했다. 가서 함께 지낸 다음 그는 고백했다. "우리가 찾던 그리스도를 만났소." 예수님께서 기거하시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구원(그리스도)을 보았다고 하는가? 예수님과 함께 보낸 시간은 그 자체로 충만한 감동과 행복이었을 것이다. 희망의 발견이었고, 고대하던 새로운 삶의 길에 대한 확신이었을 것이다. 절망의 시대에 희망은 구원임이 분명하다. 희망이란 자체로 생의 의미를 충만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복음 내용이야 어떻든 역사적으로 추정할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만나시면서 비로소 세상 사람들과 한 무리를 이루시기 시작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열두 제자는 이미 예수님 주변에 있는 이들을 유다 전통에 따라 부여한 대표성일 것이다. 따라서 이전에 이미 함께 사는 어떤 삶이 있었을 것이다. 필자는 그것을 예수님의 원공동체(原共同體)라 부르고 싶다. 원공동체(原共同體)는 예수님이라는 인물과 카리스마를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 이 원공동체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사도행전 공동체에 나타나게 되는데 우리가 주목할 바는 '2차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는 바로 이 사도행전에 나타난 공동체이다. 거기에는 예수라는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라는 인물 중심의 카리스마를 넘어섰다는 의미다. 그것은 스승을 잃은 혼란의 와중에서도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살던 공동체의 삶을 너무나 소중히 삼았다는 말이고, 그래서 사도행전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안 계시는 상황에서 세상에 발견된 희망일 수 있었던 것이다. 진실로 그들 자신이 하느님 나라와 구원의 확신을 공동체의 삶에서 찾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희망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

 

 

5. 예수님의 공동체, 무엇이었을까?

 

좌절과 절망의 갈릴래아 시대에 희망으로 떠오르신 예수님의 삶은 모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삶, 삶과 삶,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이 온전히 '한 몸'이 되며 하느님의 질서대로 움직이는 삶이었을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들을 종합한 것에 다름 아니다. 물질이 주인 행세를 하는 시대에 오직 하느님만을 절대화하는 신념, 행복을 담보하는 것은 빵이 아니라 성부의 말씀이란 것을 믿는 삶, 이기와 자기 중심적인 시대에 너를 통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공존하는 삶, 그래서 사람들이 서로의 몸을 자기 몸처럼 위하고, 사람의 인격을 하늘처럼 받들고, 공경하는 삶, 바로 그것이었다고 본다. 그래서 자기 것을 기꺼이 내어 놓아도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며 함께 빵을 나누고 기뻐하는 것은 자신의 기쁨일 수 있었다.

 

소유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삶, 공존함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삶, 자신을 기꺼이 내어 놓을 수 있는 삶이 바로 구원의 실체로 여겨졌던 것이다. 사도행전 공동체가 그것이며, 앞서 안드레아가 '가서 보았던' 예수님의 원공동체의 모습이 그것이었을 것이다. 이는 정확히 그리스도 공동체의 영성과 이념이다. 교회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유다교는 이러한 공동체를 이단으로 일축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운데 두고 앉아 있는 이들을 어머니요 형제요 자매로 삼아 '이단'의 집회에 거하셨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대접을 받고 힘을 행사하면서 영성은 변질되고 해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예수님의 공동체 영성은 수도원 운동으로 나타나고 수도자의 삶이 그것을 이어받았다. 문제는 세상 속의 수행이 아닌 독신과 특별한 조건의 수도로 공동체 영성이 특화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며, '독신 서원의 수도자'라는 세상으로부터 특화시킨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이라면 누구라도 기꺼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원공동체의 영성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오늘 우리 교회의 가장 큰 시대적 과제가 있다면 바로 이 공동체 영성을 발굴하고 새롭게 복구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 한국 사회의 혼란과 방황은 목표적 삶이 없었던 데 이유가 있다. 과거 군사 독재에서 벗어나는 저항과 투쟁이 우선이었지 어떤 민주주의 세상을 만들자는 목표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라면 통일 문제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동체 영성이란 현실의 극복만이 아니라 목표적 삶의 이상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어둠과 혼돈의 시대를 벗어나기로 저항하되 막무가내의 저항과 탈출이 아니라 다가올 희망의 세상, 추구하는 세계의 영성과 철학이 이것이어야 한다. 사람과 자연과 관계적 삶을 대하는 정신과 태도의 모델이 바로 여기 공동체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실재가 필요하며 그런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이 바로 우리 교회에 주어진 이 시대의 사명이라 생각한다.

 

 

6. 다가오는 문명 세계의 전망

 

이른바 오늘날 전세계 최대 화두는 행복론이다. 선진 제국들이 만들어 가는 지구촌 공동 발전의 시스템이 과연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행복의 길인가에 대한 질문과 회의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본의 막중한 확보를 통해서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서로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성장과 발전은 결코 승자를 내지 못한 채 죽음의 환경과 비참한 공동 패배만이 확인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래 세계의 비전은 함께 공존하는 시스템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공존을 위한 기초는 모든 것을 작게 줄이고 작은 것으로 만족하는 삶의 양식에 대한 성찰로 나타날 것이다. 그에 따른 대안이 바로 공동체 의식과 정신 그리고 실재적 삶이다. 오늘날 선진 제국에서 무섭게 불붙고 있는 공동체 운동은 바로 그런 흐름의 징표이다. 새로운 세계의 문명은 공동체의 삶으로 정향(定向)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공동체 영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운동들은 조금도 걸림돌 없이 국경을 넘어 결합되며 새로운 세계 국가의 이념이 될 것이다. 공동체의 삶에 참여하는 이들은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새로운 시민이 되는 것이다.

 

이런 문명의 탈출 흐름에 가장 강력한 철학 또는 영성으로 작용할 것이 바로 유심론적 세계관이다. 이미 구미 선진 제국에서 동양의 참선과 같은 영성 수련이 수용되면서 뉴에이지 선풍을 잠재우고 있다. 그들은 앞서 과학의 발전과 자본주의의 결과적 경험, 그리고 소비 사회의 병리 현상을 이미 경험한 역사를 가진 사회들이다. 종교 세계의 측면에서는 윤리적 가르침을 바탕에 둔 종교의 이념이나 수련의 방법들은 퇴조할 수밖에 없고, 반면에 유심론적 세계관을 가르침의 바탕에 두는 종교의 수행 방법들은 득세할 것이다. 멀리 볼 것 없이 왜 한국 사회에 참선과 마음 공부의 열풍이 불고 있는지, 세계 지성들의 인도행이 늘어나는지를 유심히 새겨 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영성이 실현되는 곳에서 미래의 희망을 본다. 이른바 영성의 시대가 이미 열리고 있는 것이다.

 

 

7. 복음을 따라 사는 사람들

 

우리 교회가 새로운 사목 방법을 개발하고 전담을 배치하고 예산을 투입한다. 소공동체 운동으로 지역 소모임을 활성화한다. 젊은이들을 위해 밴드와 랩을 동원한다. 미사 도구를 들고 직장의 휴식 시간에 찾아간다. 이는 변화하는 시대에 모두 필요한 일이다. 그렇더라도 그 모든 것에는 말씀 선포가 중심이다. 교회의 경험상 말씀과 삶은 반드시 같지는 않았다. 우리 교회가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호감을 주는 분위기를 만든다고 해도,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미 막강한 자본을 투입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능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제아무리 훌륭한 수단을 이용하여 복음을 선포한다고 하더라도 빠른 사이클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말씀의 효력은 너무나 짧기만 하다. 그러므로 이제는 복음 선포의 수단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목표의 삶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 복음을 따라 살아서 행복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에 견줄 수 있는 사목은 없다. 영성의 시대를 더 앞서 가는 것은 영성이 이루어지고 있는 삶을 확보하는 것이다.

 

복음을 따라서 사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하고 그 가르침을 법으로 삼는 것이다. 왜 우리는 복음에 주석만 자꾸 달며 의미론적 해석으로 가득한 설교를 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의 영성으로, 철학으로 삼아 살아가면 되었지, 굳이 말마다 성서 구절을 줄줄이 제시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냥 삶으로 보여 주면 될 일을 한참을 설명해야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그런 낭비가 어디 있는가? 주석이 많다는 것은 삶으로 보여 줄 것이 부족함을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럼 2천년 전의 배경을 21세기에 그대로 적용하란 말이냐?" 하고 반문할 수 있다. 좀 과격하게 말해서 물론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신념도 실재하는 공동체를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다벨 지역에 '부루더 호프'(형제들의 처소)라는 공동체가 있다. 70여 세대 280여 명이 직접 생산하고 학교를 운영하며 살아가는 곳이다. 그들은 산상 설교를 공동체의 유일한 헌법으로 삼고 있다. 서로 사랑하라 했기 때문에 사랑하고,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라 했기 때문에 용서하고, 잘못한 형제가 있거든 직접 말하라고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 앞에서 흉보지 않고 직접 충고하고, 예물을 드리기 전에 화해하라 했기 때문에 예배를 보다가도 서로가 나가서 자기 마음을 드러내며 화해한다. 그래서 80년 동안 탁월한 공동체 삶을 이끌어 가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으므로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8. 산 위의 마을을 향하여

 

예수님의 삶은 곧 하느님 나라의 비유였다.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하느님 나라를 말씀으로가 아니라 몸으로 보여 주셨다는 말이다. 우리 교회가 이 시대에 보여 줄 것이 없다면 '와서 보시오.' 하던데 '가보니 아무것도 없더라' 할 것이다.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말할 수는 있지만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사랑과 구원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지만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사도 바오로의 경고대로 우리 교회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것이다. 교회는 '보라, 이것이 바로 구원의 삶이다'고 주석 없이 보여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만이 희망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다. 산 위의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라 했다. 우리의 삶이 등경 위에 올려져 방안을 비추는 빛이 되고, 산 위의 마을처럼 삶이 드러나 보이게 될 때 아버지를 증거하는 것이라 했다. 산 위의 마을은 우리 시대 예수님의 비유이다. 우리 교회가 모두 산 위의 마을이 되어야 한다. 실재하는 사도행전의 공동체가 지금 이 땅에 있다면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설명은 쉬워진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구원이 초월적인 종교 언어만이 아니라 지상의 실제임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공동체, 사도행전의 공동체가 오직 하느님만을 주인으로 섬기고 하느님 나라의 의를 먼저 구하는 매력적인 삶의 비전을 보여 줌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세속에서 추구하던 가치와 삶의 양식을 버리고 공동체 삶의 길을 선택하였듯이, 오늘 우리 시대 유일한 복음 증거의 길은 그런 공동체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사목, 2002년 1월호, 박기호(서울대교구 시흥 4동 천주교회 주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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