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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교회는 어떻게 희망을 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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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1 ㅣ No.92

교회는 어떻게 희망을 줄 수 있는가?

 

 

1. 들어가며

 

한국 교회는 200여 년 전 진리를 찾아 학문을 연구하던 소수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그후 100여 년 동안 혹독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그 암울한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항상 희망을 간직하고 복음을 전파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광복 이후 급속한 양적 성장을 하여 왔다. 신자의 증가와 더불어 사제와 수도자의 증가, 그리고 신학교와 수도원의 증설 등 한국 교회의 눈부신 성장은 세계 교회 역사상 실로 경이적인 것이라고 세계 교회는 찬탄해 마지아니하였고 우리도 자부심을 가져 왔다.

 

광복 이후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싶어서 교회의 문을 두드렸다. 특히 군사 정권 시절에는 한국 천주교회가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한 결과 많은 지성인들과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희망을 찾아 신자가 되었다. 1984년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맞이하여 거행된 103위 성인의 시성식 행사와 1989년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를 통하여 한국 천주교회는 세계 교회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더 나가서 세계 교회 안에서 가장 활기찬 교회로 부각되었다. 이러한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과 발전은 하느님의 은총과 이 땅의 무수한 순교자들과 열심인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의 헌신적인 기도와 희생의 결과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는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가 외형적으로 교세가 늘어났음에도, 부정부패와 온갖 비인간적이며 비윤리적인 한국 사회의 죽음의 문화의 만연 속에서 진정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 왔는가를 반성해 본다면, 우리 교회가 한국 사회를 선도해 왔는가 아니면 오히려 우리 천주교 신자들이 지나치게 속화되어 사회 속으로 끌려 다니고 있는가를 우리는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먼저 한국의 반생명적인 문화 상황의 실태를 살펴보고, 이어서 이러한 죽음의 문화에 한국 천주교 신자들도 얼마나 심하게 물들어 있는가를 살펴보고, 그 다음 우리 교회가 어떻게 우리 사회에 희망을 줄 수 있는가를 모색해 보기로 한다.

 

 

2. 현대 한국 사회의 도덕적 몰락

 

유엔 아동 기금(UNICEF) 한국 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중앙일보](2001. 10.10.))에 따르면, 동아시아 태평양 17개 국가 중에서 "윗사람에 대한 청소년들의 존경심"에 대해 설문 조사한 결과 한국이 최하위였으며, 놀랍게도 미국의 이민 교포 사회가 모국인 한국 사회보다도 오히려 어른에 대한 존경심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 조사가 시행되기 전에 사람들은 동아시아 17개국 중 한국이 가장 충효심과 장유유서(長幼有序)가 돈독한 나라일 것이라고 추측했으니, 이번의 조사 결과는 너무나도 충격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식자(識者)들은 날로 황폐해져 가는 한국인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 질책과 염려를 해 왔다. 여기서 윗사람이란 부모와 교사를 비롯하여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물들을 망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사실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기성 세대를 불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에서 유행했던 말 중에 '모두가 도적'이라고 했던 말이 우리나라에서도 한동안 자학적으로 사용되더니 이제는 그런 말이 들리지 않는다. 그 까닭은 아무리 질타해도 아무런 경각심도 일으키지 못할 뿐더러 더 이상 사용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한국 사회가 배금주의에 빠져 도덕적으로 몰락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왜 한국 사회는 도덕적으로 몰락하게 되었을까? 이렇게 된 것에 대해 모든 한국인에게 책임이 있다. 아무튼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반생명적이고 비도덕적인 사회의 질곡에서 벗어나 밝고 맑은 생명의 문화를 재건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국의 죽음의 문화의 실태를 우선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러한 죽음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한국 천주교 신자의 실태를 점검해 보기로 하자.

 

1) 반생명적인 죽음의 문화의 실태

 

우리는 한국 사회의 '죽음의 문화'의 실태의 원인을 임신 가능한 여성 중의 80%가 넘는 낙태, 곧 공공연한 살인 행각, 폭력의 난무, 공해로 말미암은 생태학적 위기, 반생명적인 생명 공학의 발호, 인간성을 잃어 가고 있는 사이비 예술과 놀이 문화, 현대 의학의 상업화와 비인간화, 교육의 상업 도구화와 인간성 상실, 그리고 정보화 산업의 인간의 기호화(記號化, codification) 등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불안에 떨게 만드는 이러한 반생명적인 문화의 실태와 원인을 다른 기회에 상세히 논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오늘의 주제와 관련해서만 간략하게 개관해 보려고 한다.

 

낙태의 폭증과 만연:한국 보건 사회 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1회 이상 낙태를 경험한 15세부터 44세에 이르는 여성의 수가 1964년 7%에서 해마다 증가하여 1972년 20%, 1991년에는 54%로 나타났다. 이후 전문적인 설문 조사 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15세부터 44세에 이르는 여성 중에서 1회 이상 낙태를 경험한 사람은 78%에서 83%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3년 유신 체제의 비상 국무회의에서 성안된 모자보건법이 발효된 후부터 낙태는 살인 범죄가 아닌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결과 1985년부터 해마다 약 150만 건의 낙태가 발생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폭력의 난무:가정 폭력, 학교 폭력, 직업적 조직 집단의 폭력, 국가 기관에 의한 제도적 폭력, 성폭력 등은 인권을 유린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시킨다. 그런데도 폭력을 과시하거나 심지어 미화시키기까지 하는 영화, 만화, 인터넷 등은 많은 청소년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폭력을 조장하고 있으나 돈벌이가 된다는 구실로 방임되고 있다. 최근에는 특히 학생들 간에 자행되고 있는 학교 폭력이 청소년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인권을 유린하고 있는데도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공해와 생태학적 위기:무분별한 산업 개발과 도시화 등에 따른 환경 오염은 범세계적인 문제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옛날부터 전해져 온 생명을 존중하는 아름다운 전통은 무너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중요한 공해 원인은 국가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다.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 과시적 국토 개발 정책의 발호, 소비를 권장하는 산업화 정책, 공해 발생에 대한 정부 당국의 은폐와 미봉책, 정부의 근시안적인 계획은 자연 파괴와 각종 공해를 유발한다. 여기에 미래 세대에 대해 아무런 책임감도 느끼지 않고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자연을 언제든지 파괴할 용의가 있는 무지몽매한 장사꾼들과 새 것, 편리한 것과 화려한 것을 선호하는 일반 시민들의 허영심이 상승 작용을 한다. 그리고 공해 방지와 생명 존중에 대한 시민 교육이 소홀히 취급되고 있는 것 등이 오늘날의 생태학적 위기를 초래한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반생명적인 생명 공학의 발호:생명 공학은 생명 현상을 공업적으로 이용하여 돈을 버는 데만 주력하고 생명권을 경시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유전자 변형 식품과 복제된 동물의 식용은 엄격히 금지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고 있으며 동물권도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그 밖에 인간의 체외 수정과 인공 수정은 심각한 윤리적 문제를 낳고 있는데도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아무런 제약도 없이 시행되고 있다. 냉동된 잉여 배아에 대한 연구 허용은 배아 복제와 더 나아가 인간 개체 복제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을 뿐더러 실제로 생명체인 배아를 죽일 수도 있는데도 생명 공학자들의 배아 줄기 세포 연구 허용에 대한 집요한 요구로 잉여 배아 연구는 허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는 인간 존엄성과 생명 존엄성이 훼손된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사이비 예술가와 놀이 문화의 비인간화:현대 예술에서는 인간의 고귀함과 순결한 사랑, 아름다운 이별 등을 찬미하는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 특이한 것과 기상천외한 것을 추구하는 나머지 균제미와 중심을 잃고 모든 윤리적 제약에서 벗어나 자의적으로 작품을 만드는 사이비 예술가들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많이 있다. 그들은 돈벌이에 급급한 나머지 인간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거나 인간을 비하하는 것을 능사로 삼고 있다. 제들마이어(Sedlmeyer)가 현대 예술의 특징을 혐오감, 패러독스, 아이러니(미학적 허무주의), 악마적이라고 말한 것은 정곡을 찌른 것이라고 본다. 예술은 인간을 천사로 끌어올릴 수도 있고 악마로 끌어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 예술은 대체로 그 어떤 시대보다도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시도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놀이를 통해 다른 사람과 더 친해질 수 있다. 놀이는 건전하고 깨끗하고 공정해야만 다른 사람과 제대로 놀 수 있다. 깨끗하지 않은 놀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폐해를 가져다 준다. 예컨대 사행심을 조장하는 놀이와 놀음(도박)은 반사회적이며 인간을 황폐화시킨다. 놀이의 일종인 스포츠는 오늘날 기업화되어 있고 많은 역기능을 초래하고 있다. 어떤 스포츠는 운동 선수를 혹사하고 대중의 꼭두각시로 또는 상품으로 취급한다. 고도의 기술 연마는 때로는 선수의 안전을 무시하기도 하고 인권을 유린하기도 한다. 스포츠는 점점 더 상업화되고 도박화되어 가고 결국 인간 존엄성을 훼손시킨다. 스포츠는 본래 휴식, 연대 의식의 함양, 긴장 이완과 재창조를 위한 것인데, 오히려 오늘날 스포츠는 경쟁 심리를 유발하고 집단 이기주의를 선동하고 연대 의식을 파괴하는 부작용을 낳고 상업주의에 이용당하고 있다.

 

현대 의학의 비인간화:현대 의학의 설명 전략은 물질적 환원주의, 기계적 결정론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인간의 기능과 질은 가능한 수량(數量)으로 표현되고 측정 가능한 생화학적, 생물리학적 과정으로 환원된다. 인간의 생명을 종합적으로 다루어야 할 의학이 오로지 자연 과학의 가설만을 받아들이고 인간을 사물화(事物化)한다. 현대 의학은 질병이 유전적 소인으로 결정된다는 유전자 결정론을 내세우고 인간의 유전자를 조작, 변형하고 생명을 복제하려는 시도까지 감행하려고 한다. 최첨단 의료 기구에 둘러싸인 의사들은 환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고 의사와 환자의 대화는 단절되고 상호간의 신뢰는 무너지고 있다. 생명을 아끼고 존중해야 할 의료 종사자들이 단순한 기술자나 상인처럼 처신하고 과잉 검사와 과잉 진료를 하거나 환자를 착취, 수탈한다면, 그 사회는 멸망하지 않을 수 없다. 해마다 150만 건이 넘는 낙태의 대부분이 생명을 수호해야 할 의사에 의해 자행되고 있다.

 

건축 문화의 비인간화:현대 건축은 시멘트, 철조, 합성 수지, 유리 등으로 만들어진 긴 상자를 일직선으로 나열하거나 수직으로 높이 쌓아올린 것으로 보인다. 건축물의 대형화와 고층화는 부자연스러운 직각으로 되어 있고 획일적이고 기계적이고 기능주의적이며 여러 가지 공해를 유발하도록 되어 있다. 고층 건물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단전, 단수, 연쇄 방화, 청소부의 파업 등에 잠재적인 불안을 가지고 산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고 익명인 채로 산다. 그들은 자기 집에만 당장 위협이 안 되면 남의 집에서 화재가 나건, 도둑이 들건 상관하지 않으며 자기가 사는 아파트 값 상승에만 관심이 있다. 그들에게 집은 영혼의 안식처가 아니라 돈벌이를 위한 투기의 대상이며 집을 사기도 전에 팔 생각 먼저 한다. 그들은 과밀한 사람들 속에서 살면서도 고독하게 비인간적으로 산다. 도시인들은 각종 도시병으로 신음한다.

 

이 밖에도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반생명적인 작태가 우리 사회에는 많이 있다. 매춘과 음란물에서 여성을 성적 노리개로 삼고 여성의 인권을 무시하는 것, 장기 매매, 각종 작업장에서의 안전 시설 미비, 향정신성 물질의 범람과 구입 용이로 말미암아 인간성을 상실하는 약물 중독자의 폭증, 100만이 넘는 전문 도박꾼, 알코올 중독자의 속출, 수많은 사이비 종교의 가렴주구, 착취 수탈, 인권 유린, 그리고 청소년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입시 교육 제도, 세계 제일의 교통 사고율, 그리고 컴퓨터와 뉴미디어에 의한 인간 소외 등의 죽음의 문화의 어두운 그림자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2) 한국 천주교 신자의 반생명적 작태

 

한국 사회 전반이 반생명적 탁류에 휩쓸리고 도덕적 위기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천주교 신자만이 유독 탁류에서 벗어나 고고(孤高)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최근에 여러 기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 천주교 신자들의 생명관과 신앙 생활이 천주교 신자 아닌 개신교, 불교, 천도교 신자들보다 질적으로 훨씬 낙후된 것으로 나타났다.

 

종교인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종교적 체험에서 얻은 강렬한 소명 의식이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종교적 체험과 종교 의례 참석, 기도 시간과 성서 읽기 등에서 다른 종교에 비해 훨씬 낮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1) 요컨대 현대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무지하며, 천주교 신앙의 정체성을 잃어 가고 있다. 예컨대 창조설의 수긍율(1984년:81.9%, 1989년:69.3%, 1997년:64.2%), 하느님의 공심판 수긍율(1984년:76%, 1989년:62.9%, 1997년:48.6%) 등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2)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의 관심이 기복주의, 운명론, 미신, 사사화(私事化)에 갈수록 더 쏠려 가고 있다는 조사 보고도 나오고 있다.3)

 

최근에 교회가 강조해 온 "생명 존중"에 대한 천주교 신자들의 반응을 보면 천주교 신자 아닌 사람들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않고 있다.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가 1992년 전국민을 대상으로 표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천주교 신자들은 1992년 낙태 완전 허용을 71.2%가 찬성했고, 교구 내 구역 반장 월례 교육에 참가한 719명 부인들 중에 낙태 경험자가 83.6%, 1995년 71.5%, 2001년 78%에 이른다. 여기서 천주교 신자들은 다른 종교의 신자나 심지어 종교가 없는 사람들보다도 더 생명 존중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사실만을 보아도 한국 천주교 신자는 한국 사회의 반생명적 분위기에 휩쓸려 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도대체 한국 천주교 신자는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우리나라의 지도 계층 요소 요소에 천주교 신자가 많이 포진하고 있지만 왜 한국 사회가 온통 점점 더 죽음의 문화의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가를 우리는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대부분의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그들의 신앙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직분을 하지 않고 있다. 온갖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던 순교자들의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3. 교회는 어떻게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있는가?

 

대부분의 개신교 신자들은 어디서나 그들이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산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은 같은 직장의 동료들이 그들이 천주교 신자인지를 얼른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신자임을 드러내지 않고 산다.

 

드러내지 않고 막연히 하느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의 태도는 마음의 확신을 분명하게 적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신자 개개인의 분명하지 않은 태도는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물의를 빚을 수 있다. 천주교 신자는 모름지기 세상 사람들에게 죽음의 문화의 문제점에 대하여 그때그때 책임 있는 대답을 분명히 하고 구체적으로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미 황금 만능주의에 따른 생활 습관에 깊숙이 젖어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산업 사회의 정치, 경제 제도를 비롯하여 문화 전반에 걸쳐 사회 생활의 온갖 체제가 윤리적 가치를 무시하고 짜여 있는데, 어떻게 천주교 신자들이 이 사회를 되돌려 놓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지 모른다. 이미 하강을 시작한 문화를 되돌려 놓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 것만은 틀림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지금의 물질 향유와 편리해 보이는 삶이 앞으로 오랫동안 더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미 도처에서 가족 제도 붕괴 등 사회 해체 현상이 일어나고 에너지 등 자연 자원의 고갈과 생태학적 위기로 말미암아 성장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고 세계 종말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다.

 

그러나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재건하는 일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확고한 믿음과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가지고서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을 지키겠다는 의연한 결단을 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문화 재건에 대한 논의들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논리 정연하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믿고 근본적으로 인간을 존중하고 생명을 지키겠다는 의지의 결단이 최우선이 되지 못한다면 그 많은 논변들은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아끼고 인간을 사랑하는 실천이 무엇보다도 요청된다. 한국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 안을 이미 사목 의정서 등을 통해 내놓았다. 그러므로 교회가 어떻게 희망을 줄 수 있는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먼저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라칭거 추기경은 1993년 '도덕의 위기와 현대의 영성'에 대해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의 지배적인 문화 상황과 천주교적 도덕은 너무 동떨어져 있다. 더욱이 적지 않은 천주교 윤리 신학자들까지도 지배 문화에 대한 영향력 있는 지지자가 되어 죽음의 문화에 동조해 왔다.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지배적 경향은 교회의 도덕의 기초를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자신에 충실하려면 번거롭고 낯선 것, 곧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이는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그러므로 윤리학자들은 현대 사회를 거부할 것인가 아니면 교도권을 거부할 것인가 양자택일을 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우리들은 사회의 경향과 타협하지 않는 용기를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 시대의 풍조에 따를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정열을 가지고 이에 맞서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된다. ...... 한때 어떤 수도회에서 참된 개혁과 종래 지켜 오던 엄격성의 완화를 혼동하였다. '쇄신'과 '안락'을 혼동했다. 수사들의 요구대로 밤늦게 TV를 시청하기 위해 성무일도를 포기했다. 얼마 못가서 그 수도원은 해체되고 말았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기가 소수파에 속한다는 것, 이 세상 사람들에게 당연하고 논리적으로 보이는 것들에 자기가 대립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능력을 되찾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긴박한 과제이다." "현대 천주교 신자의 가장 긴급한 목표의 하나는 신앙의 사고 방식과 현세적 사고 방식 간에 적절한 거리를 자각하는 영성의 적극적인 요소의 재건이다. 1970년대 이후 사람들은 천주교 신자의 가장 시급한 문제가 '새로운', '열린', '신성한 영역으로 도피하지 않는', '세상을 향한', '세계와 연대한' 신앙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외쳐 왔다. 그러나 오랫동안 방황한 나머지 이제 와서야 '옛 영성', '세속에서부터 도피'(fuga saeculi)라는 영성과의 연결점을 재발견하는 것이 긴급한 과제임을 찾아내고 있다."우리는 천주교 신자라는 긍지를 가지고 고통 속에서도 환희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초대 교회에서 성서를 읽어 왔던 관행을 다시 익히도록 신앙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견뎌내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지상 낙원을 약속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삶의 어려움도 고통도 당장 없애 주시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 앞에서 현재 생활에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책임 있는 생활을 하기 위하여 부정 불의와 타협하지 말고 생명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우리가 믿는다면 희망은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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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 의식]Ⅰ·Ⅱ·Ⅲ, 한국갤럽, 1984, 1990, 1998년 참조.

2) 위의 책, 84-89면 참조.

3) 노길명, "현대 한국 천주교 신자들의 종교 의식과 신앙 생활 ― 사회 조사 결과를 중심으로,"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 한국 교회사 연구소, 2000년, 107면 참조.

 

[사목, 2002년 1월호, 진교훈(서울대학교 교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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