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5일 (수)
(백)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교육ㅣ심리ㅣ상담

[피정] 성령칠은12: 지혜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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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9 ㅣ No.57

[성령칠은 제12강의] 지혜(智慧, wisdom)의 은혜(9월 10일 목요일 오후, 마지막 강의)

 

 

(요한17:21)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입니다. (요17:22)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나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17:23) 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며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 사람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17:24) 아버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아버지께서 천지 창조 이전부터 나를 사랑하셔서 나에게 주신 그 영광을 그들도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지혜의 은혜를 청하면서 피정 강의를 끝냅니다. 이 선물의 2가지 측면만 봅시다. 지혜의 은총으로 우리는 하느님께 이끌려 갑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이끌려 가고 싶은 마음을 갖습니다. 교리 시간에 배운 기도에 관한 정의이다. 기도란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올리는 것이다. 하느님께 우리 마음을 들어올리는 것이다. 성바오로의 말을 기억하지요. 여러분의 생명은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 마음을 들어올릴 수 없다. 성령의 선물이 필요하다. 두 젊은이가 서로 사랑에 빠질 때에 그들 마음은 서로 서로에게 빠지고 고정되어 버린다. 성령은 이런 마음의 자세를 우리에게 주신다. 이런 마음의 자세 때문에, 우리 마음은 아버지와 하나가 되신 성자 안에 머물게 되고, 성자는 성부께 고정되어 버리신다. 아버지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당신 안에 있습니다. 그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해주십시오. 그것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과 주의와 전존재를 끌어당기신다. 아버지와 아들 안에 영원히 존재하는 사랑의 교환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부활의 로렌조 수사는 “우리의 마음을 들어올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묘사했다. 잘 된 표현이다.

 

나는 때때로 침묵 중에 생각을 모을 때

내 편에서의 어떤 노력도 없이

내 온 마음과 영혼이 들어올려져서

바로 거기에 머무는 것을 체험하는데

마음과 영혼의 중심과 쉼터를 찾았으므로

마치 하느님께 매달려 있는 것처럼

그분께 딱 붙어 버림을 체험합니다.

- 부활의 로렌조 수사 -

 

때때로 침묵 중에 내편에 노력도 없이 생각을 집중하게 될 때에 그것이 선물임을 체험한다. 내가 무언가를 체험하게 되는데 이것이 하나의 체험이다. 나의 온 마음과 영혼이 들어 올려짐을 체험한다. 들어 올려져서 거기에 머무는 것을 체험한다. 마치 하느님께 매달려 있듯이 그분께 붙어 버렸다는 것을 체험한다. 이것은 성령의 선물이다. 어떤 소녀가 성체 앞에서 기도할 때에 신부님이 물었습니다. 예수님께 무어라고 말하지? 즉시 “나는 아무 말도 안하고요 내 마음을 주님 마음에 던져 버립니다.” 이것이 사랑의 욕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머무시길 바란다. 예수님 안에 사랑의 욕구가 계시되어 있는 것을 본다. 그러면 이런 기도가 우리의 일상 생활로부터 유리(遊離)시키는 것은 아닌가? 이 기도는 우리가 해야 할 의무에서 차단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올바른 중심에다 놓아준다. 그 안에서만이 우리 일상생활의 모든 것이 중심을 찾게 됨을 알게 된다. 하느님의 선하심에 따라서 모든 것의 선함을 음미하게 된다. 기도는 하느님의 맛을 체험케 한다.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을 맛보게 된다. 기도가 우리에게 힘을 북돋아 준다. 이냐시오 성인의 좌우명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현존에 맛들이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이다.

 

작은 아이가 엄마 곁에 놀다가 노느라고 정신이 팔려 있지만 항상 엄마 곁에 있다. 놀이를 하다가 게임을 중단하고 갑자기 엄마 무릎 위에로 뛰어 오른다. 무릎에서 놀다가 다시 장난감에로 간다. 이 아이에게는 무언가 타오르는 것이 있다. 엄마의 사랑의 체험이 아이의 마음 속에 남아 있다. 성령이 이런 선물을 주실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은 우리를 취하셔서 평화롭게 하느님 안에 쉬게 해준다. 성자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쉬게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 맛들이게 해준다. 그리고 일상 생활로 돌아간다. 그러나 기도에서 체험한 뜨거운 것이 남아 있다. 우리 일상 활동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좀더 쉽게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매일 하는 업무에서도 발견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준다. 이것이 선물이므로 기도하여야 하고 기도하려고 시간을 내야 한다. 이냐시오 성인이 말한 것처럼 기도하려면 침묵이 필요하다. 우리 마음을 온전히 열어야 한다. 하느님이 당신 안에 우리를 환영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에 하느님을 환영해야 한다. (요한17:21)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이것은 우리 삶을 일치시켜 준다. 우리의 삶의 활동과 인간의 모든 능력을 일치시킨다. 그 기도가 우리를 하느님의 생명 안에 기초하도록 이끈다. 우리는 마침내 하느님 안에서 평화를 발견하게 된다. 복음의 한 문장이나 교회 기도문 하나나 누구로부터 들은 기도 하나라도 마치 만트라와 같이 될 수 있다. 만트라는 영감을 받은 문장으로서 우리를 하느님께로 던져 주는 말이다.

 

나는 성찬기도 제 2양식의 기도문을 좋아한다. 아버지 우리는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당신 현존 앞에 서서 당신을 섬기기에 합당하다고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선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름을 반복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랑과 신뢰와 주님께 내어 맡기는 자세로 주님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부르노 성인은 하느님의 풍요로움이여 하고 외치기를 좋아했다. 찻집을 경영하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드렸지요. “옴! 옴!”하면서 하느님께 이끌려 간다. 성령은 우리를 여러 가지 다른 길로 이끈다. 그러나 항상 하느님께 중심을 두도록 이끄신다. 하느님 안에 쉬게 하시고 사랑을 받게 하시고 사랑을 주게 하신다. 우리에게 힘을 북돋아 주신다. 우리는 기도 할 때에 시간을 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사랑의 욕구입니다.

 

기도를 왜 해야 하나? 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함께 있겠다는 욕구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전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순결한 영혼은 聖三(성삼)에 이끌려서 감탄합니다. 성부는 당신의 창조물에 감탄하십니다. “아! 여기 내가 만든 창조물이 있구나!” 성자는 당신 성혈의 대가를 관상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치르는 대가에 의해서 사물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성령은 순결한 영혼을 성전 삼아 머무신다. 순결한 영혼은 한 송이 아름다운 장미와 같다. 아름다운 장미의 향기를 맡기 위해서 몸을 굽히듯이 거룩하신 성삼은 그런 순결한 영혼에게 몸을 굽히신다. 하느님이 우리 마음 안에 당신을 어떻게 주시기를 원하는지에 대한 예이다. 이것이 하느님 사랑의 욕구이다. 이런 작은 피조물과 하느님이 일치하는 것은 놀랍고 훌륭한 일이다. 우리의 모든 이해를 능가하는 행복이다. 이것이 지혜 은혜의 첫 번째 측면이다.

 

두 번째로 지혜의 선물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지를 알아보자. 성부와 성자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의 교환에 어떻게 참여할지 알아보자. 우리 사목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는 사랑의 고리가 있다. 삼위(三位) 사이에는 영원한 움직임이 있다. 이것은 성부 성자 성령 위격마다 다른 위격 안에 상호 내재하시는 것을 말한다. 서로 영원한 존재의 사랑을 교환하시면서 내재하신다. 사랑은 불과 같아서 항상 움직인다. 성부 성자 사이에는 이런 움직임인 사랑이 오고 갑니다. 이것은 성령의 활동이다. 우리는 이런 움직임에 끓임 없이 참여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하느님이 창조물을 주신다. 이런 창조물은 하느님 말씀의 반영이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서 생겨났다. 피조물을 가지고 우리는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다. 태양아 달아 추위와 바람아 냉기야 주님을 찬양하라.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피조물을 받고 그것으로 찬양하여 그것들을 그분께 들어올립니다.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랑하는 아들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으로 하느님을 찬미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을 잉태하는 순간에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과 주의를 다 기울여서 받아들인다. 다음에 엘리사벳에게 말씀을 전한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통해서 마리아 안에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다. 마리아의 노래로 이 모든 것들이 하느님께 들어 올려진다.

 

목동들을 보자. 목동들은 단순한 마음을 갖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천사들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지시를 받았습니다. 모든 백성에게 나누어줄 기쁜소식을 받았습니다. 자기들끼리 그 메시지를 나눈다. 그 다음에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 올라간다. 목동들은 자기들이 보고들은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갔다. 하느님 아버지의 선물로서 무언가를 체험하고 예수 아기 앞에서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느님을 찬양하고 현양 했습니다. 시메온은 성령에 이끌려서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아기 예수를 팔에 앉고 아버지께 봉헌합니다. 나의 눈은 당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루가2:30)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31)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32)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항상 영원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사도직의 움직임입니다.

 

                         ↗ 루가  5:17   중풍병자 고침

루가 4:18-19  → 루가  7:11   과부의 아들

                        ↘ 루가 18:35   소경

 

루가 4,18-19 ;(루가4:18)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19)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가 5:17) 하루는 예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거기에 갈릴래아와 유다의 여러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앉아 있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병자들을 고쳐 주기도 하셨는데 (18) 그 때 사람들이 중풍 들린 사람을 침상에 눕혀 가지고 와서 예수 앞에 데리고 가려 하였으나....(24)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 그리고 나서 중풍병자에게 ”내가 말하는 대로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 들고 집으로 돌아 가라“ 하셨다. (25) 그러자 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깔고 누웠던 요를 걷어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 갔다.(26) 사람들은 모두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면서도 마음은 두려움에 싸여 “우리는 오늘 참으로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루가 7:11) 얼마 뒤에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동네로 가시는데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도 함께 따라 갔다. (12) 예수께서 성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마침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과 마주치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었고 동네 사람들이 큰 떼를 지어 과부와 함께 상여를 따라 오고 있었다.(14) 앞으로 다가서서 상여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젊은이여, 일어나라” 하고 명령하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셨다” 고 말하기도 하였고 또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 와 주셨다” 고 말하기도 하였다.

 

(루가 18:35) 예수께서 예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의 일이었다. 어떤 소경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41)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다.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그가 대답하자 (42) 예수께서는 “자,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고 말씀하셨다. (43) 그러자 그 소경은 곧 보게 되어 하느님께 감사하며 예수를 따랐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예수님의 선교의 시작을 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 속박에서 사람들을 풀어 주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중풍병자를 치유해 줄 때에 모든 사람은 주님을 찬양했다. 중풍병자를 해방시키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찬양하면 다시 성부께로 올라간다. 나인의 과부 아들이 소생될 때에 모든 사람이 경외심에 사로잡혀서 하느님을 찬양한다. 맹인은 치유된 후에 즉시 예수님을 따르고 그곳에 있던 사람이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이런 움직임이 계속됩니다. 이 움직임에 참여하도록 불렸다. 특별히 우리 사목을 통해서 참여하도록 불렸다. 성체성사 때마다 축성이나 성서를 통해서 우리는 성사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같은 성령을 통해서 빠스카 신비에 의해서 우리 마음과 신자들의 마음이 변모되고 거룩해집니다. 우리 삶과 신자들의 삶 전체가 거룩하게 해주는 성령에 의해서 하느님께 봉헌된다. 그분 통해서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봉헌됩니다. 성찬기도 제 3 양식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우리를 당신께 드리는 영원한 선물이 되게 하소서. 우리들의 일상의 삶에서 무언가가 이루어진다. 빠스카의 사건이 이루어진다. 빠스카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 삶 전체가 “아빠”를 외친다. 우리 삶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라는 부르심을 받았고 또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마침내 그분의 모든 축복에 대해서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 이것은 성령의 활동이다. 성모 마리아와 함께 기도합시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시고 그것을 엘리사벳과 다른 사람에 전하고 그런 사실이 마니피캇으로 하느님께 봉헌되는 것처럼 우리도 같은 뜻으로 성모송을 하자.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기를 빌며 끝까지 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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