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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친교의 해와 사회교리: 사형제 폐지와 사회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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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5-17 ㅣ No.1936

[친교의 해와 사회교리] 사형제 폐지와 사회교리 I

 

 

나의 양심, 남의 양심

 

“형제 여러분, 구원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하여 우리 죄를 반성합시다.” 미사를 시작하면서 사제가 이렇게 권고하면, 미사에 참석한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돌아봅니다. 양심성찰에 걸맞은 다소곳한 모습입니다. 교회가 윤리와 도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의 교우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생각과 다른 면이 있더라도 일단은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거나 최소한 침묵을 지키지요.

 

그런데 사회윤리가 주제가 되면 양상이 달라집니다. 사회윤리는 자기 양심을 넘어서 남의 양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함께 바뀌어야 할 부분을 이야기하다 보니 자연히 남의 양심을 언급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남의 양심을 다루는 태도와 방식은 자기 양심을 다룰 때와는 사뭇 다릅니다. 내가 한 짓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고, 남이 한 실수나 잘못은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짓이 됩니다.

 

그래서 남의 잘못에 대해 비판하거나 처벌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곧잘 냉혹한 시선으로 ‘가차 없이 벌하고’,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곤 합니다. 죄인이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사형에 처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가장 고통스럽게 죽기를 바라는 저주를 퍼붓기도 합니다.

 

 

교회와 사형제 폐지

 

교회는 죄인이 응분의 대가를 치르기를 원하는 여론에 관계없이 사형제 폐지를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2267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랫동안 합법적인 권위(국가)가 통상적인 재판 절차에 따라 사형을 선고하는 것은 비록 극단적이지만 일부 범죄의 중대성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자 공동선 수호를 위해 용납되는 수단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사람이 매우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의 존엄성이 박탈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또한 국가가 시행하는 형벌 제재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확산되는 한편 시민들에게 합당한 보호를 보장하고 동시에 범죄자에게서 그 죄에 대한 속죄의 가능성을 앗아 가지 않는 더욱 효과적인 수감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따라서 교회는 복음에 비추어 ‘사형은 개인의 불가침과 인간 존엄에 대한 모욕이기에 용납될 수 없다.’고 가르치며 단호히 전 세계의 사형 제도 폐지를 위하여 노력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회 회칙 「모든 형제들」 제7장도 사형 제도를 국가가 범하는 ‘살인’으로 보고 폐지를 촉구합니다. 한국 교회도 이러한 가르침에 발맞추어 지난 3월 13일 현직 주교단 25명 전원과 전국 16개 교구 7만 5843명이 참여해 ‘사형 폐지/대체 형벌 입법화를 위한 입법 청원’을 국회에 공식 제출한 바 있습니다.

 

 

사형제 존속을 바라는 입장

 

이런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사형제를 과연 폐지해야 하는지 의구심을 갖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교회는 인권을 이야기하지만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한 사람의 인권까지 챙겨야 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사형 제도를 통해 전체 사회의 안녕을 도모할 수 있다면 이 제도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개선하면서 신중하게 운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쉽게 무시할 수 없습니다.

 

사실 과거에는 교회 내에서도 사형제에 찬성하는 기류가 있었습니다. 탁월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만 하더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범죄로 사회를 힘들게 한다든지, 누를 끼치면,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를 죽이는 것은 현명하고 유익한 것”(『신학대전』 제2권 2부, 64문, 답변 2)이라고 전제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사형은 하느님의 법에 의거하여 규정된 것이며, 범죄자의 처형은 전체 사회의 안전을 위한 것으로 악의 근본적인 근절은 선한 사람에게 유익을 주며 사회의 안전과 안녕, 그리고 발생 가능성이 있는 범죄를 억제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신학대전』에 실려 있는 이런 논리는 오늘날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남기고 있습니다. 사형에 찬성하는 이들이 그저 복수심이라는 감정에 휘둘리고 있다고 폄훼할 일은 아닙니다. 타인의 생명을 고의로 침해하는 행위는 공동체의 자유롭고 평화로운 공존을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침해하는 것이며, 이에 대해 가해자에게 자신의 생명도 침해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사형제의 존재 의의이며 목적입니다. 이 효과가 현실적이고 객관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타인의 생명을 침해하는 자에 대해서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타인의 생명도 소중하고 보호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한다는 점에서 사형 제도가 필요하다는 입장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사형제 폐지에 대해 교회가 지금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느냐는 시선도 존재합니다. 우리나라는 1997년 12월 30일 이래 더 이상 사형 집행을 하지 않고 있어 2007년부터 ‘실질적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논란을 불러일으킬 '사형제 폐지’를 들고 나오지 않아도 당장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는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할 논란거리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걸까요?

 

 

솔기 없는 옷

 

1983년 전 시카고대교구장 조셉 버나딘 추기경은 ‘일관성 있는 생명윤리’(Consistent ethic of life) 개념을 제시합니다. 낙태, 사형, 전쟁, 빈곤 등에는 생명에 대한 폭력이 공통적으로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폭력에 대항해서 생명을 지키고자 한다면, 어느 하나를 반대하는 동시에 다른 것을 찬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입은 옷이 “솔기가 없이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요한 19,23)이었기 때문에 로마 병사들이 제비를 뽑아 누가 차지할지 결정했다는 내용이 나오지요. 그처럼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은 서로 이어져 일관성 있게 선포되고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솔기 없는 옷’의 개념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 사회교리를 현실에 적용할 때 교회 논리의 내적인 일관성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한번 더 생각하게 합니다.

 

사회교리의 저변에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사안을 일관된 입장에서 관찰하고 판단하게 하는 내적 논리가 깔려있습니다. 이 내적 논리를 이해하지 않고서 교회의 윤리적 판단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음 호에는 사회교리가 전제하고 있는 생명 수호의 논리를 소개하면서 왜 교회가 사형제 폐지에 앞장서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월간빛, 2023년 5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친교의 해와 사회교리] 사형제 폐지와 사회교리 II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입니다, 신부님.

 

교회가 사형제 폐지, 낙태 반대와 같은 주제에 대해 입장을 밝히면 진퇴양난의 난처함을 토로하는 분들도 늘어납니다.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에 대해 신자로서 반대할 수도, 그렇다고 찬성하자니 주위의 시선이 따갑습니다. ‘사형제가 왜 폐지되어야 하는가, 낙태를 왜 반대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 교회가 ‘인권 존중’과 ‘생명 존중’이라고 하면 너무 원론적이고 이상적인 반론이라고 듣습니다. 인권과 생명을 우습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이 너무 미묘해서 소중한 가치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현실에서 드물지 않게 일어나니까요.

 

예를 들어 에크모(ECMO) 인공 심폐 보조장치가 하나밖에 없는 응급실에 에크모 적용을 필요로 하는 환자 두 사람이 동시에 도착했을 때 한 사람은 포기할 수밖에 없지요. 이 힘든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인권이나 생명 존중을 몰라서 환자를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사형제나 인공임신중절 같은 문제도 비슷한 면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원칙을 아는 것과 그 원칙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라는 것이지요.

 

 

철 지난 이야기입니다, 신부님.

 

학문적인 설명을 원하는 분들을 위해 그리스도교 윤리와 근대 윤리 사상의 토대를 이루는 자연법 사상을 들어 사형제 폐지와 낙태 반대의 이유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는 하느님의 법, 근대 이후로는 인간의 보편적인 이성에 입각한 자연법이 모든 법의 근본으로 자리매김되었던 바 있습니다. 그 기초로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사형제 폐지와 낙태 반대의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전통적인 설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이 요즘에는 그리 환영받지 못합니다.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는 하느님의 법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교회의 입장일 뿐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설득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반론입니다.

 

보편적인 이성에 따라 합리적으로 설명해도 요즘은 그 ‘보편적인 이성’ 자체를 불신하는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법이란, 각각 다른 형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일종의 폭력이라는 것이지요. 초등학생과 대학생을 같은 링에 올려 권투시합을 시키는 것이 폭력이듯 상황과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보편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게 잘못이라고 합니다. 이런 지적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닙니다. 20세기 전반을 전체주의의 소용돌이에서 헤맸던 경험, 그리고 제국주의의 횡포에 시달린 경험이 있어 나오는 지적이지요. 독일의 나치즘과 독재자 히틀러만 해도 독일 정신을 내세우며 합법적으로 선출된 권력이었습니다. 현대 인류는 ‘누구나 지켜야 하는 법’이라고 강요하는 가운데 실제로는 법을 통해 강자의 이익만을 챙긴 사례가 너무 많습니다.

 

 

다원화된 사회와 상대주의

 

최근에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온갖 주장이 불관용과 폭력의 원천일 수 있으며, 오직 상대주의만이 다원적 가치들과 민주주의를 지켜 낼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서구 위주, 가부장적 남성 위주, 기득권 위주의 윤리와 법을 강요하지 말라는 입장에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근본적인 가치와 법이 있다는 교회도 덩달아 미심쩍게 보입니다.

 

 

담론 윤리학과 그 한계

 

한편으로 세상에 보편적인 것은 없고 상황에 따라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상대주의는 사회 문제를 풀 수 없다고 보는 흐름이 있습니다. 절대적이고 객관적이라고 널리 인정되는 가치들에 대해 말하는 것,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현재 상황에서, 그럼에도 일반적 윤리적 결정에 합리적인 토대를 제공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대화를 통해서 모두가 따를 윤리 기준을 정하자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뜻이나 자연법 같은 전통적인 기준은 포기하더라도 대화를 통해서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정해 따르게 하면 합리적으로 도덕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를 ‘담론윤리학(discourse ethics)’이라고 합니다. 상호 존중과 소통, 그리고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을 강조하는 현대에 담론 윤리학이 주목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런데 대화를 통해서 모두가 따를 윤리 기준을 정하자는 이 주장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의 절충주의에 빠질 수 있고, 더 나은 인간이 되게 하는 윤리와 도덕의 목적을 잊어버릴 위험이 따릅니다.

 

 

좋은 뜻을 가진 사람들, 그러나…

 

상대주의적 윤리관이든 담론 윤리학이든 보다 윤리적인 삶과 사회를 바라는 선한 뜻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 교회만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유일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유한 방식으로 인권, 평화와 정의, 부의 공평한 분배나 환경에 대한 존중을 증진하려 노력하고 있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좋은 뜻을 가진 이들이 모여도, 서로가 동의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는 각자의 노력이 모두의 성공으로 이어지기 힘들다는 데 있습니다. 교회는 인간적 가치를 증진하려는 이런 공동 노력에 동참(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 「보편 윤리를 찾아서」, 3항 참조)하면서 복음의 빛 아래 인내와 존경으로 선의의 모든 사람과 대화를 나누려고 합니다.

 

사형제 폐지와 낙태 반대를 호소하는 교회의 목소리 저변에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선과 가치의 확고한 토대를 알리고 인식을 증진함으로써 더 인간적인 세상의 건설에 이바지하려는 뜻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호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월간빛, 2023년 6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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