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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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23-24: 시노달리타스의 신학적 기초 (3) 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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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0-02 ㅣ No.761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23) 시노달리타스의 신학적 기초 3. 친교 1)

 

 

“교회는 함께 걸어가는 데에서, 회중의 모임을 통해서, 그리고 모든 구성원이 복음화 사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데에서 자신이 ‘친교’ 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실현한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 6항).

 

교회는 그 본성상 ‘친교의 공동체’입니다. 앞서 우리는 교회가 단순히 종교적 취향이 같은 이들이 ‘예수 동호회’처럼 모인 집합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불러 모으신’, 그분께 속한, 그분의 백성으로서 ‘신앙 감각’을 지닌 각 구성원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된 하나의 몸으로서의 교회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친교’는 이러한 하느님 백성인 교회가 지니고 있는 공동체적 특성으로, 그리스도인의 삶과 활동을 뜻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친교는 우리가 쉽게 떠올리게 되는 ‘친목’과는 다릅니다. ‘친교’라는 말은 희랍어 ‘코이노니아(koiinoina)’의 번역어로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어떤 것에 함께 참여함’을 뜻합니다. 성경에서는 복음 선포, 성찬례, 그리스도의 고통 등에 ‘함께 참여한다’고 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말하는 친교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친목, 우정의 교류’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넓고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의 친교는 민주주의적 관계에서 단순히 발생하는 차원을 훨씬 넘어서서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의 관계적 측면을 생각할 때 ‘교계 제도’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 교계 제도를 그 어떤 ‘위계적 질서’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 구성원의 제도적 관계를 뜻하는 교계 제도는, 중세 봉건 제도를 연상시키는 위계적 질서의 개념이 아니라 교회의 상호 관계적 ‘친교’를 뜻하며, 이는 삼위일체적 친교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서열이 아니라 역할과 관계의 다양성이자, 인간을 향한 주님 사랑의 폭과 깊이를 보여 주는 다양성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교계 제도는 하느님 백성과 분리되어 그 ‘위에’ 혹은 ‘밖에’가 아니라 이 백성 ‘안에’ 위치하고, 서로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에 관하여 “교회란 하느님 나라에 봉사하는 데 있어 교계적 질서 안에 살고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을 말한다.”라고 규정하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교계적 친교는 다양성과 역할의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발생하는 복음적 친밀성을 의미합니다. 교황과 주교들, 목자와 신자들, 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 지역 교회 간의 관계에서 지향하고 실현해야 할 목표이자 사명으로, 이에 대해 교회의 문헌은 “친교의 근본적인 의미는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말하며, 이는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평신도 그리스도인, 19항)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2023년 10월 1일(가해) 연중 제26주일 춘천주보 2면,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24) 시노달리타스의 신학적 기초 3. 친교 2)

 

 

교회의 정의가 ‘하느님 백성’이고, 하느님 백성이 지닌 특성이 ‘신앙 감각’이라면,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살아가는 양식이 바로 ‘친교’입니다. 결국 시노드적 교회가 되기 위한 요소로서의 친교는, 그 말 자체에 이미 함축되어 있지만 교회의 사명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저마다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교회)을 구성하는 유기적 연결을 이루고 있으며, 제 몫을 하거나 함께하지 않는다면 이 몸은 유지되기도 성장하기도 어렵습니다. 물론 이 몸을 살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그 성령의 활동에 각자의 자리에서 협력하는 것이 ‘친교’ 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처음 만드셨을 때에도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창세 2,18) ‘더불어’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사실 교회의 구성원들은 같은 말씀을 듣고, 한 분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며, 이 신앙으로 하나의 세례를 받았고, 같은 성령의 도유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모든 시간과 공간에 그리스도의 구원을 실현할 사명을 받아,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향해 역사 안에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여정에서 모든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또 그것을 지향하며 걸어가는 모든 구성원과 친교를 이룹니다. 이러한 교회 이해로부터 ‘함께 가는 사람들’, 곧 ‘동반자’ 사이의 시노달리타스가 도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건강한 소속감과 따뜻한 친밀함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올바른 신앙적 지향을 공유하고 신앙적 실천을 함께하는 데서 오는 건강한 소속감을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서열과 차등의 질서가 아니라, 정직하고 평등한 연대에서 오는 진정한 친밀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친교, 사람들 사이의 친교를 지향하는 교회는 당연히 하느님 앞에서 평등한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시노드적 교회란 바로 이런 평등과 일치, 다양성과 책임성이 공존하는 교회를 뜻합니다.

 

더불어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성장은 신자 각 개인이 세례성사를 통해 받은 ‘개별적 신앙 감각(sensus fidei fidelis)’으로부터 비롯되어, 신자들의 ‘친교’를 통해 ‘공동체적 신앙 감각(sensus fidei fidelium)’에 이를 때 가능합니다. 시노드적 교회는 결국, 이렇게 각 개인의 신앙 감각으로 ‘저마다 제 길에서’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면서도, ‘함께’ 그 사명을 수행해 나아가는 친교의 공동체를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2023년 10월 8일(가해)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춘천주보 2면,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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