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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화] 실학과 현대 유학의 토착화: 종합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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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2 ㅣ No.113

주제:실학과 현대 유학의 토착화 종합토론

 

 

제1주제 : 실학 사상을 중심으로 한 유교의 토착화

발표 : 최영진(성균관대학교 교수 · 한국 철학)

약정토론 : 김용헌(한양대학교 교수 · 철학)

제2주제 : 유학의 현대화 과정과 현황

발표 : 이상호(경산대학교 교수 · 동아시아학)

약정토론 : 유준기(총신대학교 교수 · 사회교육원장)

사회 : 조광(고려대학교 교수 · 한국사학)

일시 : 2002년 6월 17일(월) 오후 2-6시

장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4층 강당

 

 

조광 : 그러면 종합 토론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발표해 주신 최영진 교수님의 주제에 관한 토론을 진행하겠습니다. "실학 사상을 중심으로 한 유교의 토착화"라고 하는 제목의 발표였습니다. 원래 '유교의 토착화'는 무리가 있는 표현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토착화 위원들 사이에서도 거론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실학 사상이라고 할 때에는 유교 경전에 대한 재해석 내지는 그것을 현실에 적용시켜 보고자 하는 일련의 시도라고 개념을 규정해 보면 이것이 한국 유학의 토착화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이 아닐까 해서 이러한 제목을 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실학 사상을 중심으로 한 유교의 토착화를 논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실학의 개념, 유교의 개념 문제가 될 것입니다. 실학의 개념을 최영진 교수님께서 제시해 주셨습니다. 역사학 쪽에서, 제 자신이 강의를 할 때 일반적으로 실학이라고 한다면 몇 가지 특성을 들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실학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라면 원초 유학에 입각한 원전의 재해석, 원초 유학 또는 원시 유학을 중시했다고 하는 경향과 주자를 거부했다거나 벗어나려고 했다는 표현보다는, 주자 유일주의에 대한 거부 곧 주자를 존중하되 주자만을 내세우는 것에 대해 비판해 왔던 경향을 실학자들이 가진 것입니다. 이에 바탕을 둔 경세론과 이에 뒷받침이 되는 철학적 내용을 실학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실학 사상이 실제로 전개되어 나가는 과정을 연구사적으로 보자면 1950년대 남북한에서 만들어 낸 것이 실학이라는 개념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조선 후기에 실학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종전의 역사학계에서 실학을 생각할 때에는 대자적 존재로, 곧 헤겔(Hegel)의 존재론적 입장에서 안시히(An-sich)가 아니라 퓨어시히(Fuer-sich)로 해석해 왔지만 조선 후기의 실학은 안시히로 존재했다는 것이고 이것을 체계화해서 실학 학파로 규정한 것은 1950년대 남북한의 학계가 했다고 생각합니다. 최영진 교수님의 발표문과 간접적으로 관련된 말씀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실학이라고 하는 것이 조선 후기라고 하는 사회·역사적 맥락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사실이라고 할 때 곧 콘텍스트 내에서 텍스트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맥락에서 살펴본다면 실학이 유학의 또 다른 의미에서의 토착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최영진 교수님의 발표에 대해 김용헌 교수님께서 여섯 가지의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 이 질문의 전제로서 논평문의 서언에 보자면 유교의 시원에 대해서는 최영진 교수님의 의견과 약간 편차가 있어 보입니다. 최영진 교수님은 유승국 교수님의 이론을 원용하여서 동이의 사상이 선진 유학 형성에 상당히 중요한 기여를 했으므로 유학을 중국 사상으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동이 문화권에서 유학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김용헌 교수님은 일단 유교는 중국 사상이라고 전제를 하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이것은 공·맹 이후의 유학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여섯 가지의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해 주시기에 앞서서 이러한 김용헌 교수님의 견해에 대한 최영진 교수님의 입장을 들어볼까 합니다. 최영진 교수님께 부탁드립니다.

 

최영진 : 네, 여섯 가지 질문은 제 개인에 대한 질문이라기보다는 우리나라 학계에 대한 질문으로, 사학계, 한국 철학계가 공통적으로 답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사회자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 저의 개인적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직 정설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대 문화라고 하는 것이 검증된 확고부동한 자료를 가지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고대의 사상, 문화 형성의 차원에서 본다면 어떤 문화도 독자적으로 성립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서양의 경우에도 희랍 사상이 희랍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주변의 다양한 고대 문화와 상호 연관을 맺고 융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른바 은주 시대라고 하는 시대의 문화 형성도 한족 독자적인 것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변의 상이한 문화 집단들과의 상호 연관 속에서 중국 문화라는 것이 성립된 것입니다. 그래서 동이라고 불리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도 상당한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논어에 나오는 것처럼 공자 당시에도 이 지방에는 군자라고 불리는 문화 집단이 존재했습니다. 그렇다면 상당한 문화가 존재했을 것이고, 그것이 중국 고대 문화, 특히 공자가 받아들인 오경의 형성에는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또 중국 고대의 사서에 보면 동이족을 평가할 때 유교적 기준으로 인(仁)하고 양보를 많이 한다는 덕목을 투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나 불교는 전혀 이질적인 것이 일방적으로 수용된 것이지만 유교는 그때그때마다의 상호 연관성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유승국 교수님의 견해입니다. 저도 그 견해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사학 쪽에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조광 : 역사 쪽 말씀을 하셨으니까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일단 어떠한 사상을 논할 때 그 근본 사상이 논하고 있는 선험적인 곧 이전 사상과의 관계를 충분히 인정하지만 유교, 유학을 지칭할 때에는 공자를 시초로 파악해야 한다는 의견을 역사학계에서는 가지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공자의 입장에서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해서 자신이 정리한 사상의 계승적 정신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결국 공자 자신이 유학을 집대성한 것이기 때문에 공자 이전의 유학을 오늘날의 유학과 같은 차원에 놓고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가 하는 것이 역사학계의 견해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여섯 가지 질문에 대해 답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영진:먼저 1번 질문은 매우 타당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발표문의 범위를 한정지을 수밖에 없는데 이 논문의 목적은 성리학이라고 하는 기존 학적 체계에서 어떤 이탈 현상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곧 성리학과의 연관성 아래서 성리학과 대응되는 학적 체계의 성립이라고 하는 시각에서 살펴보겠다고 서론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경세론적(經世論的)인 측면은 언급하지 않은 것입니다. 실학 전반을 다룬다면 당연히 이 면도 포함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성리학에 대한 안티(anti)로서의 실학이라는 관점에서 이 발표문을 전개했습니다.

 

그 다음에 실학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아직 우리의 학계가 정리하지 못한 문제입니다. 제가 인용한 유봉학의 1990년대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도 실학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다산학, 담헌학, 북학파, 연암파의 사상이 있지 뭉뚱그려서 실학이라고 하는 것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고 견해를 밝힌 바가 있습니다. 김용옥은 "실학은 없다."라고도 말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오가와라고 하는 일본 학자의 말로는 실학은 18세기와 20세기의 합작품이라고 합니다. 곧 18세기에 완결된 학문 체계가 있지 않았고 20세기에 와서 당시의 조선학 운동의 일환으로 실학을 만들어 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학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개념에 대한 논쟁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성리학과는 다른 것입니다. 성리학은 학자들 스스로가 이미 규정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실학의 자기 규정은 없었습니다.

 

저의 견해로는 조선의 성리학과는 다른 흐름들이 있는데 이를 무엇으로 지칭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양명학과는 무엇이 다른가라고 하셨습니다. 양명학은 양명학이라고 하는 왕수인이 만든 학적 체계가 중국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조선에 들어와서 나름대로 저류로 발전해 옵니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주자학과는 다르고 중국의 양명학과도 다른 한국의 학이 성립됩니다. 그러나 실학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의 영향도 없지 않지만 독자적으로 발전되어 나온 것입니다. 철학사 연구에서도 실학이라고 한 주제로 내세워 연구한 것은 한국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 중국과 일본의 학계가 한국의 영향을 받아 연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의 실학에 대한 접근 방법은 성리학이 아닌 17-18세기의 당시 정통 성리학자들이 해 오던 작업, 곧 칠서를 중심으로 한 사단 칠정론, 인심, 도심설 등의 몇 가지 주제에 천착하던 흐름과는 구별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실학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조광 : 이 문제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실학 부분에 관한 글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헤겔의 존재론을 이용하여 김용옥, 유봉학 등의 실학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경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곧 실학의 존재 자체를 대자적 존재로만 규정할 수 있는가? 즉자적 존재도 존재가 아닌가? 조선 후기인 18세기의 실학은 즉자적이었지만, 그것이 대자화된 것은 적어도 1934-1935년 무렵을 전후해서 조선학 운동 특히 신간회 운동이 무산된 이후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운동가들이 주도한 실학 연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1950년대 남북한의 학자들에 의해 실학 사상의 특성이 밝혀지고 재정리된 것으로 보입니다. 실학 사상 자체가 존재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에 존재 문제부터 따지게 된 것입니다. 김용헌 교수님께서 다른 견해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용헌 : 저도 두 분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새로운 의견은 없습니다. 다만 대상화된 존재만 진정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가 하고 저도 생각합니다. 자신들은 인식하지 못했지만 기존의 성리학자들과는 다르게 학문적 문제점을 인식하고 다른 학문 활동을 모색한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것은 존재했다고 봅니다. 그런 입장에서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광 : 다른 분들 질문 없으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기호 남인측 문제를 중심으로 서경덕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최영진 : 아니 그것보다 2번 유형원에 관한 것 아닌가요?

 

조광 : 아! 2번. 유형원 ......

 

최영진 : 유봉학 이전에 지두한 선생이 말씀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익까지는 성리학자로 놓고 북학파부터가 실학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학을 어디까지나 성리학의 대응 개념으로 놓고 보고 있어서 이런 주장을 하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특히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隧錄)의 서문에 보면 도(道)와 기(器) 두 개의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성리학자들은 도의 문제를 마오쩌뚱(모택동)의 개념을 빌리자면 주모순(主矛盾)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기 곧 제도적인 문제를 부모순(副矛盾)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모순인 도의 문제를 해결한다면 부모순 곧 기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고 본 것입니다. 이렇게 본 것이 성리학이라면 반계 유형원은 기의 문제를 주모순으로 보았습니다. 도의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주모순인 기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 반계의 공헌입니다. 그렇다면 성리학과는 구별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들이 성리학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산의 경우도 이발기발설에 대한 논평까지 남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새로운 흐름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익은 더 말할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광 : 성호 이익의 경우를 보아도 기존의 성리학과는 다른 내용의 주장이 있으니까 실학자로 보아야 한다는 데는 동의합니다. 여기에는 학문적 근거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조선 성리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조선 성리학의 내용이 어디까지 미쳐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별도로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조선 성리학이 존재한다고 할 때 그 개념 안에 유형원이나 이익까지 포함시키는 것은 좀 무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 둘의 경우에 주희의 학설이나 15-16세기의 조선의 여러 학설들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주희, 주자 유일주의에 대해서만은 분명히 거부하는 태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번째 문제에 대해 김용헌 교수님 의견 있으십니까?

 

김용헌 : 네, 저도 동의합니다. 유형원이나 이익이 이기심성론의 측면에서 보자면 주자의 이론을 답습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럼에도 유형원이나 이익이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달리 말하자면 조선 사상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의미라고 하는 것은 주자와 얼마나 닮았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몇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예를 들어서 단순한 비유로 그들의 사상이 주자와 80%가 비슷하고 20%가 차이가 난다고 해도 그들의 역사적인 의미는 다른 20%에 있고 같은 80%에는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조선 후기의 사상사를 발전적으로 이해하자면 주희 또는 주자 유일주의로부터의 이탈에 무게 중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학자를 실학자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조광 : 지금 발제해 주신 분이나 토론자 그리고 사회자가 짜고 고스톱을 치는 모양이 되었습니다만 저희는 전에 전혀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방향으로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세 번째 문제로 ......

 

최영진 : 그 전에 2번 문제에 대해서 마저 답변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 각도에서 이제 허목이나 윤휴를 실학자로 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하나의 흐름의 시작, 곧 주자 유일주의에서의 이탈의 시원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노론계에서는 주자가례를 거의 절대시 하고 있는데 반해서 주자가례가 아닌 다른 문헌을 논거로 삼았다든지 하는 것에서 실학의 시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선 성리학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조선 사회에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성립된 성리학 이론이 조선 성리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곧 용어는 주자적인 것을 사용하고 주자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지만 송대나 청대가 제기한 것과는 다른 조선 사회가 제기하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 방안을 모색하는 가운데 우리 나름대로의 이론 체계가 성립되었다고 보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 동의학이 있습니다. 중국의 의학서를 가지고 그 약재료를 쓰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병이 낫지 않습니다. 풍토가 다르니까요. 그러면 약을 조금씩 다르게 처방합니다. 그래서 독특한 우리의 처방전이 생긴 것입니다. 유교도 이와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단칠정론 같은 경우도 중국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사화기라는 조선 시대에서는 사단칠정론이라는 이론 체계가 동원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후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이 제가 보는 조선 성리학의 개념입니다.

 

조광 : 네, 사회자가 또 맞장구 한번 치겠습니다. 적어도 성명이학 체계와 조선 성리학이라고 하는 것은 구별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조선 성리학이라고 한다면 그 양적 질적인 측면에서, 동아시아 철학에 대해 잘 모르기는 합니다만, 어깨 너머로 본 바에 따르면 동양에서 최고의 수준으로 중국을 능가하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조선 성리학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이 반계나 성호까지 포괄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문제에 대해서도 계속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영진 : 이것은 기호 남인의 대표적인 인물인 허목과 윤휴의 가계를 추적하다 보니까 모두 소북계였습니다. 남인은 남인이지만 소북계라서 매우 흥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북인에 대북과 소북이 있고 대북이 정통파인데, 오히려 소북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인에도 퇴계 계통의 적통 남인이 있고 조식 계통의 북인이 있었습니다. 이 둘이 결합해서 남인이 되었는데 남인 중에서도 북인, 북인 중에서도 비정통파인 소북계에서 이탈 현상의 시원이 있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일종의 이방 의식이라고 할까요. 역시 주류보다는 비주류 쪽에서 뭔가 창조적인, 곧 기존의 관념에서부터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해 봅니다. 이들이 공교롭게도 학맥을 따져 올라가다 보면 서경덕과도 연관이 됩니다. 역시 서경덕도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비주류입니다. 주류는 회제 쪽입니다. 이것도 흥미롭습니다. 서경덕이 이들에게 직접 영향을 주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경덕은 자연에 관해 주로 논의하고 인간의 심성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경학에 대해서는 남긴 작품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백호 윤휴 같은 경우에는 경학이 상당히 중요한 업적입니다. 그래서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내적인 연관성은 있지 않을까 하는 추정을 해 봅니다.

 

조광 : 계속해서 네 번째 문제, 천관에 관한 문제도 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영진 : 이황이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학적 연원을 따져 본 것입니다. 조선 후기에 오면 주류, 곧 지배 담론의 생산자들은 노론이었습니다. 남인 계열은 변두리로 밀려납니다. 이들은 북학파와 연관됩니다. 이와 다른 흐름의 맥을 찾아 올라가면 다산, 성호, 미수, 한강, 퇴계까지 학맥이 올라갑니다. 다산의 인격천관의 연원이 무엇인가? 어떤 학자의 주장도 논거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단순한 서학의 영향일까? 곧 천주교의 상제천관을 받아들인 것인지 아니면 다른 내적 토대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내적인 토대를 찾아 학맥을 거슬러 올라가면 퇴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제가 전에도 주장하여 어느 정도 받아들여진 것인데 퇴계의 주장은 성리학과도 좀 다르다는 것입니다. 율곡의 성리설은 주자학과 정합이 잘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퇴계의 이론은 주자학의 성리설로는 소화가 안 됩니다. 소화가 안 되기 때문에 퇴계의 주장이 계속 논의되는 것입니다. 퇴계의 이발설은 주자에 따르면 틀린 이론입니다. 물론 주자의 글을 보면 이발설을 긍정하는 언급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맞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퇴계를 주목하게 되었는데 주자학과 다른 주장을 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 천리관(天理觀), 곧 이(理)를 법칙적인 차원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존엄하게 여겨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고 그것에 대해 상제라는 개념을 원용하고 있다는 것이 다산을 이해하는 데 내적인 토대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입장에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또 다산의 이(理)를 비판하는 천관을 보면 거칠게 말해서 퇴계학의 대중화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퇴계는 이를 경(敬)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퇴계 정도의 학자는 이를 곧 진리를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일반 대중은 법칙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법칙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도덕적 행위가 담보되지 않습니다. 쉬운 말로 하자면 무서운 사람이 있어야 악한 일을 안 하고 착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산이 천을 이(理)라고 보는 관점을 비판하는가? 한마디로 천을 이라고 하면 누가 두려워하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계셔서 너를 바라본다."라고 해야 착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사견이기는 합니다만 이렇게 해서 퇴계와 다산의 연관성에 주목해 보았습니다.

 

조광 : 아주 재미있는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理)를 경(敬)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퇴계의 경우에 분명히 드러나지만 퇴계가 바라본 이와 다산이 바라본 이에는 또 차이가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합니다. 천의 개념도 그렇습니다. 다산의 경우에도 인격천, 상제천, 주재천 등의 개념을 언급하면서, 물론 선진 유학의 기본적인 골격에 기초를 두는 것은 분명하지만, 과연 선진 유학만을 가지고 자주 집권의 개념이 나오는가는 의문입니다.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주 집권의 개념은 판토하(龐迪我)의 칠극(七克)의 개념에서 나오는 것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체적으로 선진 유학에 기초를 두어 아니면 퇴계의 이와 경에 대한 사상에 영향을 받았겠지만 이 밖에 또 다른 요소도 다산의 경우에는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최영진 : 그에 대해서는 저도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런데 이른바 선이해적 토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주 집권이라는 개념이 아주 생소할 경우에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 법입니다. 또는 반대가 된다면 거부하게 됩니다. 그래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적인 토양은 선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산이 서학의 인격 천관을 저항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내적인 하느님관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퇴계의 천관을 이어간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해 보는 것입니다.

 

조광 : 김용헌 교수님, 보완 질문이 있습니까?

 

최영진 : 다산의 천관에 천주교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적인 토양이 또한 있지 않았는가 하는 데 대해서도 저도 동의합니다. 대학을 해석할 때, 우리나라의 주자학자들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중심으로 한 주희의 해석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윤휴를 보게 되면 고문 대학을 따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선의를 중심으로 한 해석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대학의 해석이 이익의 제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보이게 됩니다. 다시 말해 사물의 탐구가 격물치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 곧 성의(誠意)를 중심으로 대학을 해석합니다. 이것은 윤휴의 상제천을 강조한 것과 맥이 닿게 됩니다. 다산의 제자들도 이익의 제자들과 윤휴와 마찬가지로 공통적으로 성의를 중심으로 대학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조광 : 감사합니다. 질문이 좀 길어지지만 다섯 번째 질문에 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물성 동론과 이론의 이론적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최영진 : 이 주장은 주석에 나온 대로 조성산 선생의 이론을 축약해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남당집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내 평생의 목표는 유교와 불교를 분변하고, 인간과 동물을 분변하고, 오랑캐와 중화를 분변하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정적인 남인에 대해 강하게 대립하고, 동론 계열은 유화적인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이론자들은 논리에서 분별과 차별에 매우 강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층민에 대해 강경합니다. 이들의 논쟁이 학문적 논쟁만이 아니라 현실 인식과도 유기적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들이 기본적으로 관료이기 때문에 이런 입장이 더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남당이 영조에게 올린 상소문에 보면 영조를 무척 비판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정치 이념은 군신 공치, 곧 재상 중심의 정치 체제였는데 영조는 탕평책, 곧 군주 중심의 정책을 폈습니다. 이 상소문의 내용은 매우 강력한 것이어서 어떻게 신하가 왕에게 이런 말을 하고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물론 동론자들도 비판 의식이 있었지만 이론자들이 매우 강한 비판 의식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관해 역사학자들의 연구가 진행 중이어서 정설이 아니고 여러 가지 이론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광 : 이 문제는 북인계 남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론적으로 정리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인물성 동론과 이론에 관해서도 철학 분야와 발을 맞추어 가려고 하지만 역사 현실에서 동론과 이론이 어떤 기능을 했는가 하는 측면에서 분석하여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여섯 번째 질문에 대해서도 마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영진 : 인물성 동론이 북학파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주장은 학계에서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다만 유봉학 선생이 초기에 주장한 것이 마치 인물성 동론이 북학파의 이론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오해될 여지가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학계에서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다만 다산과 인물성 이론자, 호론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하는 것에 관해서는 학계에서 정식으로 제기된 것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제가 재작년에 논문으로 발표하고 사상사학회에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성리학 전공자로서 인물성 동론에 관해 흥미를 가지고 다산의 중용에 관한 주석서를 읽어 가면서 호론의 입장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다산이 드러내 놓고 인물성 동론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또 중화장에 관한 다산의 해석을 보면 이것을 성인의 차원으로 보아야지 인간의 보편적 논의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 나옵니다. 저는 처음에는 이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래서 인물성 이론에 관한 남당과 다산의 구절을 일대일로 대비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명이 다르니까 성이 다르다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남당은 성리학자이기 때문에 물에 대해서도 도덕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간과는 질적으로 근본적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물에도 도덕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다산은 물에 대해서 도덕성을 인정하지 않고 중립적인 곧 탈도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양의 이론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이런 면은 분명히 구분되는 것으로 서학의 영향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호 계열, 한국의 양명학 계열에서도 물의 도덕성을 부정한 논의가 나온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습니다. 그 서강대의 ......누구죠?

 

조광 : 서정태 교수입니다.

 

최영진 : 네. 그런데 서강대의 서정태 교수의 논문을 연구해 본 결과 그렇게 명확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역시 성호 계열의 영향보다는 서학의 영향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아직은 문제 제기 상태이기는 합니다.

 

조광 : 김용헌 교수님, 보완할 것이 있습니까?

 

김용헌 : 없습니다.

 

유준기 : 제가 한 말씀 하고 싶습니다. 특히 천주교가 조선 후기에 들어 올 때 유학자들이 많이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이에는 신유담의 서학변 등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박학풍이 있는데......신유담도 어릴 때 불교, 도교 등 여러 다른 학문에 관심을 많이 가졌었습니다. 성리학자의 집안에서 이런 이른바 가학에 빠지는 일이 조선 후기의 일부 실학자들 사이에서 나오는데 혹시 그 배경을 알고 계시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영진 : 글쎄요. 그것은 조선 후기뿐 아니라 ......주자 자신도 한 때 불교에 빠질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성리학자들이 노장 등 이단 사설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표현하지만 내적으로는 다 연구해 봅니다. 심지어 주자는 창동계에 관한 주석서를 쓰기도 했습니다. 율곡도 [순원]이라고 해서 노자 도덕경에 관한 주석서도 썼습니다. 또 남당 한원진도 장자에 대한 주석서를 낸 바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은 당시 지식인들의 일반적 성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개인의 성향에 따라 그런 것을 매우 싫어하기도 하고 지적 호기심이 많은 사람도 있고 한 차이가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합니다. 조광 : 조선 후기에 관해서 말씀드리자면, 18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오면 조선 성리학이나 유학 자체에 대한 일정한 자신감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다른 학문에 대해 탄력적인 ......

 

최영진 : 관용적인 ......

 

조광 : 관용적, 탄력적 태도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정조연감의 사례이긴 합니다만, 정조가 천고백선을, 곧 신하들에게 세계 명작 100선을 뽑도록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불경도 들어가고 도덕경이 들어갑니다. 이것은 정도전의 불씨잡변이 나온 15세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지식인의 사상적 탄력성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정조 자신은 평생 동안 단 한번도 이단 사상에 접한 적이 없다고 하기는 했습니다. 과연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 당시의 분위기로 보자면 상당히 개방적인 성격이 강화되고, 다른 사상뿐 아니라 비정신적인 부분까지도 확대되어 나가 새로운 문화적 분위기가 양성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박물학적인 경향으로까지 나가게 된 것은 이 당시의 그러한 시대상의 산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최영진 교수님은 실학의 성립을 성리학의 계승, 비판, 이탈이라는 세 가지 양상의 복합체로 보고, 이것이 바로 유교가 당시 어떻게 변화, 계승, 발전되어 나갔는지를 정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조선사에서 실학이라고 하는 학문 체계가 나타나게 된 것은 유교의 또 다른 의미의 토착화의 강화가 아닌가 하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맞습니까?

 

최영진 : 네, 맞습니다.

 

조광 : 그럼 다른 질문 있습니까?

 

방청객 : 조금 전 유학이라는 말과 유교라는 말을 쓰신 거 같은데 이것을 구분해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본에서는 유학이라고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광 : 네, 'Confucianism'은 원래 중국에서 나온 여러 가지 개념을 하나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곧 유학, 유도, 유교, 유술 모두 같은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학이라고 한다면 철학적 연구 대상으로서 하나의 학문 체계이고, 유교는 실천과 신앙을 겸비한 사상의 측면을 강조하고, 유술은 경세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유도는 유교의 도덕적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학이라는 용어는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사용하는 것이고 오히려 우리 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입니다. 유학, 유도, 유술, 유교 등 많은 용어가 있는데 강조하는 부분에 따라 약간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제 옆에 유학의 대가가 있는데 제가 번데기 그 앞에서 주름잡은 것 같아 민망합니다. 최영진 교수님?

 

최영진 : 아주 적합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조광 : 또 다른 질문 있으십니까?

 

곽승룡 : 유학이 천주교와도 연관이 많은데 문외한이어서 간단한 질문 두 가지만 하겠습니다. 먼저 최영진 교수님이 다산의 천관, 인격신이 퇴계의 천관, 상제천과 내재적 연관이 있지 않는가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서학과도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다산의 천관과 인간관을 같이 살펴보면, 4세기 경에 교부 오리게네스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당시 희랍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유다교의 사상인 성서를 종합한 유명한 분입니다. 이분을 연구하다 보니 다산의 인간관 특히 영명성 관계가 매우 유사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금장태 교수의 인간관, 천관에 관한 글을 보면서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명성 문제는 오리게네스와 매우 같습니다. 물론 영명성 문제는 성서에 근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산의 천관에도 있는 영명성 문제가 퇴계와도 연관이 되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최영진 : 네, 다산에 보면 영명무형지체(靈明無形之體)라는 말이 나옵니다. 상제도 영명하시고 또 하늘이 사람을 나을 때 영명무형지체를 부여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송영배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천주교 자료에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외적인 영향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적으로 보면 주자가 대학의 명명덕을 해석할 때의 용어와 매우 같습니다. 주자는 인간의 본질인 명덕(明德)을 허령불매(虛靈不昧)라고 했습니다. 곧 무형하고 영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현만 다르지 주자의 명덕에 관한 해석과 거의 일치합니다. 그래서 한자로 번역할 때 주자의 용어를 차용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또 다산이 그런 말을 할 때도 주자가 말한 것과 유사하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곽승룡 : 그렇다면 퇴계라기보다도 직접 경전에서 온 것으로 보아야 합니까?

 

최영진 : 네, 그렇습니다, 경전이라기보다는 경전의 주석에서 ......

 

김용헌 :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다산의 영명은 주자학에서 말하는 영명과는 다르지 않는가 합니다. 왜냐하면 명덕은 마음인데 기로 환원이 됩니다. 아무리 허령이라는 말을 써도 그것의 구성 요소는 기가 됩니다. 주자학에서 모든 것은 기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다산은 세상에 물질적 존재와 비물질적 존재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서양의 심신 이원론, 영혼과 물질의 이론과 유사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동양적 용어를 차용했다 해도 그 구체적 내용은 서양의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최영진 : 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용어만 차용했다고 했지만, 다산이 말하는 인간의 영명성의 내용이 무엇인가? 물론 사천하는 종교적인 것도 있지만 다산학은 상당히 도덕 지향적인 것입니다. 인간이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상황의 선악을 판단하고 실천할 수 있는 내적인 선험적인 역량이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본다면 물론 영명한 인간의 마음의 존재론적 구성에 대한 이해는 상당히 다르지만 구체적인 내용에 들어가서는 그렇게 큰 거리가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김용헌 : 네.

 

조광 : 또 질문 있습니까?

 

곽승룡 : 김용헌 교수님 말씀대로 연고주의도 유학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유교적인 생각이 지배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곧 경직화된 부분인 혈연, 지연, 학연 등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꼭 나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유학에는 월드컵의 히딩크 식의 서양적인 학연보다는 실력을 강조하는 부분은 없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상호 : 유교 민주주의에서는 유교에 그런 것이 있다고 봅니다. 유교에는 연고주의적인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에 관해서는 국내 보다는 다니엘 벨과 같은 외국인들이 말을 합니다. 예를 들어 연로한 분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에게 세제적인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로 사상을 국가 정책에 구체적으로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유교의 현실화 현대화 방안인 것입니다. 또한 실력 위주의 등용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연고주의에 관해 함재봉 교수 등은 유교 민주주의 유교 정치론 등 아시아적 가치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현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역 사회에서는 다 연줄이 지배합니다. 현실적으로 그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그런 문제를 보지 않고 공리 공론화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영진 : 그런데 이것이 유교에 대한 잘못된 인식입니다. 유교에서는 원래 연고주의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연고주의를 비판합니다. 이것은 소인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군자는 연고주의를 벗어나서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공정한 게임을 하는 것입니다. 논어에도 소인은 비이불주라 했습니다. 곧 소인은 짝짓기만 좋아하지 보편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합니다. 그것이 와전되어 유교가 그런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유석진 교수는 오히려 이런 것 때문에 우리 나라 기업이 잘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보지는 않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연고주의, 학연이 부정적인 면이 80%이지만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가 민주화된 데에는 연고주의가 기여한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없었다면 김영삼, 김대중 씨가 강력한 반독재 투쟁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기능적인 면도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합니다.

 

조광 : 다른 질문 있습니까?

 

박일영 : 좋은 공부했습니다. 두 분과 연관이 되는 질문입니다. 오늘의 주제인 조선 유교의 한국적 토착화가 일종의 현실적 개혁 정치의 실패라는 계기를 가지고 성리학에서 심성의 문제로 발전한 데서 이루어졌고 이것이 비판적으로 계승된 것이 실학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실학 사상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는 방향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동아시아를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근대 자연 과학이 발전하는 데 사상적으로 부응하는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근대화되는 데는 인간의 심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가면서 정신과 물질을 분리하여 보아서 근대 자연 과학과 부응하는 측면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16-18세기의 경우에 그것이 상당히 부응하는 측면이 있었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있어, 그리고 앞으로의 세계에서 다시 인간과 자연의 상호 연계성, 또는 우주, 인간, 신의 대통합 이론도 나오고, 어떤 학자는 온 생명이라고 하여 우주 전체를 유기적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환경 운동을 하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곧 분리된 인간과 자연의 통합의 흐름이 없는지요? 이상호 교수님은 분리된 교단의 재정비를 강조하셨습니다. 교단으로 재정비되어야 제대로 기능한다는 점은 수긍이 됩니다. 그런데 다시 심성 논쟁 쪽으로 가는데, 실학에서 이루어진 인간과 자연의 분리가 아닌 통합의 방향으로 가는 흐름은 없는지요? 곧 인간, 자연, 우주의 통합의 방향으로의 운동은 없는지요? 천주교에서는 소공동체, 영성 개발, 영성 수련 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큰 조직보다는 오히려 작고 내면적인 것을 강조합니다. 이런 것과 연관성을 찾을 수는 없는지요?

 

최영진 : 네,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제가 먼저 답하고 싶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분리가 우리나라 실학의 총체적 흐름은 아닙니다. 다산에게서 나타나는 하나의 특징적 측면입니다. 다산 이전의 성리학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점은 자연의 탈도덕화입니다. 그래서 물을 향유해야 할 종과 같은 존재로 봅니다. 이것은 상당히 그리스도교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좋은 것인가 아닌가는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실학에 대해 가장 관심을 많이 가진 때의 화두는 근대화였습니다. 이때에 실학이 각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는 오히려 다시 성리학적 사유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학자 중에는 담헌이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를 성리학자보다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가 오고 싹이 돋는 것도 인의예지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생태학적인 시각입니다. 그래서 생태학 하는 분들은 담헌을 매우 중시합니다. 그리고 이런 운동이 학문적 차원에서는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하나의 예화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표적인 실학 연구자인 이우성 교수가 성리학을 매우 비판적으로 보고 계셨는데, 요즈음은 성리학에서 앞으로의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자연과 인간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일종의 중세적 사고가 포스트모던한 사회에서 재조명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상호 : 다른 종교는 지나친 세속화가 문제가 되고 있는데, 유학의 현대화 과정에서 유교는 애초에 성속의 구분 없이 출발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사회적 지위와 교육과 관련하여 그런 구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나친 세속화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에 가장 좋은 모델이 성리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수양론과 종교적 경건성을 확보할 방안이 많습니다. 수양에서 경에 대해 설명을 많이 하지만 현재 그에 나아가는 실천 지침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성리학자들은 구체적으로 정좌법 등 실천적인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불교적인 모습이 강하지만, 실천 윤리 지침이 있는데 현대화를 위해서는 이런 것의 개발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주자학이 모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습니다.

 

조광 : 다른 질문 있으십니까?

 

김영미 : 종교화를 하지 않고 현대화가 가능한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교육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유교적인 맥락 안에서 서구의 교육을 토착화할 방안이 없는가에 관해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이상호 교수님은 학자적 관점에서 보고 계시는데, 저는 학문은 현실과 접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교가 종교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래서는 토착화 관련 비교 연구가 불가능하다고 여기게 되어 일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유교관을 존중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제도적인 종교를 강조하지 않으려고 하는 흐름이 있는데 유교를 종교화하는 것은 현대적 맥락과는 동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유교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먼저 고치는 작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유교의 장점을 개발한다면 서구의 종교가 주지 못하는 좋은 것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특히 현대의 청소년들이 찾고 있는 아시아적 심성으로 돌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상호 : 계속 문제가 되는 것은 종교라는 용어입니다. 이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지 않아 문제가 됩니다.

 

김영미 : 그것은 이해했습니다. 다만 종교적인 접근을 한다고 해도 그 내적인 내용을 일반 대중에게 전달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력을 하되 성공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원불교를 예로 들어 볼 수 있겠습니다. 원불교가 종교로 시작했지만 사회와 다른 모든 차원과 연관을 시켜 사회에 깊숙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런 차원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상호 : 물론 현대화에서 그런 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현대화의 척도는 그런 부분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를 이야기한 것은 현재 교단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현대화를 위한 노력에 의미가 있는 것은 유교 공동체주의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유교의 정치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발표문 뒤에 나오는 시스템에 관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서구의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대립의 논의를 차용한 것이기는 하지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광 : 이제 시간이 상당히 많이 흘러 여기서 정리할까 합니다. 오늘 주제로 실학과 현대 유학의 토착화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두 분의 발표 내용은 유교 또는 유학의 자기 성찰과 그것이 외적인 사회적 기능을 통해 사상을 형성해 왔다는 것을 전제로 말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측면이 천주교 신앙의 토착화를 논하는 데에서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목, 200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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