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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교육 주간)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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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이 시대의 성령 어디서 찾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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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114

이 시대의 성령, 어디서 찾을 것인가

 

 

I. 다시 떠오르시는 성령

 

지금 전세계 교회는 2000년 대희년 준비에 한창이다. 각 지역 교회에서는 나름대로 크고 작은 시노드를 준비하거나 개최하여 희년의 진정한 의미를 따져보고 그 실천의 길을 찾고 있다. 이러한 준비 과정에서 1998년도가 이른바 ‘성령의 해’로 설정되었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특히 성령께 대한 깊은 가르침에 열성을 보이고 있으며, 거기다가 1967년도부터는 미국을 기점으로 하여 전세계에 퍼져 나간 ‘가톨릭 은사 쇄신 운동’(한국에서는 ‘성령 쇄신 운동’이라고 함)을 통하여 성령께 대한 이해와 역사(役事)에 대한 체험의 폭이 크게 넓어지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강조하는 만큼, 사람들이 언급하고 있는 만큼, 성령의 불이 ‘바르게, 뜨겁게, 깊게’ 타오르지는 않고 있다는 데 현대 교회의 문제가 있다. 지금 교회는 언필칭 성령의 역사이지만,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에만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할 정도로 잘못 가고 있다. 그렇기에 여기저기서 성령 세미나가 개최되고 대규모의 성령 대회가 열리고 있으나, 그것은 그저 행사로 끝나거나 결실이 있다 하더라도 생각보다는 훨씬 미약하게 나타나고 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의 원인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 시대의 성령,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고 자문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성령을 찾는다는 것은 표현상의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언제나 우리 사이에 계시면서 역사하시는 분이시고, 또한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이다(사도 10,44 참조). 그러므로 성령을 찾는다는 표현보다는 성령을 만난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요즈음 사람들은 성령을 따라 살기보다는 성령을 자기 마음대로 조정하고 이용하려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듯 보인다.

 

 

II. 성령께 대한 새로운 인식

 

이제 우리는 성령께 대한 올바른 인식을 먼저 가져야 한다. 성령께서는 도대체 누구이신가? 성령께서는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 분이신가?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 던지면서 우리의 과제를 풀어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9)라고 믿고 있다. 사람 마음 안에 사랑의 능력을 넣어주신 하느님은 바로 성령이시다(로마 5,5 참조). 사랑은 생명을 낳고 기른다.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의 입김이 불어넣어짐으로써 생겨났다. 그 입김은 하느님의 영에서 나온 것이며 하느님의 영은 곧 성령을 지칭한다는 것이 신학의 일반적 견해이다. 

 

성령은 상호관계의 매듭이시고 연결 고리이시다. 양자간 혹은 다자간의 연결은 내적, 외적 에너지의 교류나 나눔에서 이루어진다. 일방 통행적인 행보나 흐름은 상호관계를 조성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냥 흘러가 버리는 물과 같다. 성령께서는 일방적으로 흘러가 버릴 것을 묶어 서로 연결시켜 주는 능력이시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매듭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모두를 하나로 일치시키시고 화합과 평화를 이루게 해주시는 분이시다(에페 4,3 참조). 성령 안에서만이 모든 인간은 한마음 한몸이 될 수 있다. 우리 모두의 소망은 바로 성령으로 인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중심으로 모두 ‘하나’가 되는 것이다.

 

 

III.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성령

 

교황 요한 23세는 자신이 손수 작성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기도문” 마지막 부분에서 “이 시대에 당신의 성령 강림의 기적을 새롭게 하소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일치하여 절실하게 기도함으로써 어려움을 참으며, 성 베드로의 영도 아래 구세주 하느님의 나라인 진리와 정의의 나라, 사랑과 평화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도록 교회의 청을 들어주소서. 아멘.” 이렇게 공의회의 성공을 빌었다. 교황 요한 23세는 역사가로서 현대세계에 적응할 수 있기 위한 교회 쇄신과 변화를 누구보다도 원하면서, 이는 오로지 성령의 도우심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하며 공의회를 소집하였던 분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성령의 공의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령께 대한 가르침을 새삼스럽게 깨우쳐주고 있다. 인간과 교회의 쇄신 혹은 변화는 오로지 ‘새로운 성령 강림’을 통하여 “거듭 태어남”(요한 3,5)으로써 가능함이 확실하게 선포되었다. 성령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요한 3,8 참조)처럼 마음대로 활동하시며, 인간 자신과 인간사회가 당신 뜻에 어울리도록 이끌어주신다. “성령은 복음의 힘으로 교회를 젊어지게 하시며 항상 새롭게 하시어 신랑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완성시키신다”(교회헌장, 4항). 따라서 “교회의 사명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자신을 끊임없이 쇄신 정화하며 하느님 아버지와 사람이 되신 성자를 현존시켜 드리고 볼 수 있게 만들어드리는 것이다”(사목헌장, 21항). 이렇게 공의회는 인간의 잘못으로 추락하고 파괴된 인간 존엄성을 회복시키고 완성시킴으로써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는 데는 성령의 바람이 더욱 세차고 강하게 불어넣어져야 함을 천명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교회가 성령께 대하여 여러 가지 논리와 방식으로 언급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성령의 은총(이사 11,1-2 참조), 성령의 은사(1고린 12,8-10 참조), 성령의 열매(갈라 5,22-23 참조), 성령 체험 등에 대한 언급은 이제 일반화하여 모든 이에게 매우 친숙한 것이 되었고, 성령께 대한 인식도 상당히 확산됐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실 자체가 성령의 커다란 역사(役事)가 아닌가 생각한다. 성령의 “세찬 바람”(사도 2,2)이 불고 있다는 것은 이제 조금도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IV. 영의 분별 필요성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바로 성령과 관련하여 제기되고 발생되는 다양한 문제들이다. 문제의 초점은 성령께 대한 올바른 인식 결여가 사회와 교회에 커다란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참된 성령의 역사는 어떠한 것인가를 올바르게 분별할 필요성이 생겼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대에는 다른 어떤 때보다도 성령의 역사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반면, 성령의 탈을 쓴 악의 세력, 곧 악령들이 동시에 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이름으로 행하거나 말하면서 그것들이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것들이 순전히 인간의 욕망과 선입견에서 나온 것에 불과한 예가 많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는 악령의 장난이 아니고 무엇인가? 성령을 팔아 사람들에게 접근하거나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따위의 행위는 악령의 짓이 틀림없다. 그들은 성령의 뜻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성령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것이다. 성령과 악령은 겉으로는 분별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분별의 잣대는 분명히 있다. 그 잣대는 첫째로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이며, 둘째로 “주님의 방법대?I 하느냐, 하지 않느냐.”(사도 11,8 참조), 곧 성령의 열매(갈라 5,22 참조)의 유무이다.1)

 

 

V. 한국의 교회 및 신앙 쇄신 운동의 허실

 

한국교회는 200여 년의 짧은 역사일망정 세계적으로 신앙의 기적을 이루었다고 칭송을 받고 있는 터이다. 서구에서 갖가지 교회운동이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는 이때에도 유독 한국에서만은 활기를 띨 뿐 아니라 세계의 중심이 될 정도로 열광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상황이다. 성령 쇄신 운동보다 먼저 도입된 레지오 마리애, 꾸르실료, ME, MBW 등이 그 태동지에서보다 오히려 한국에서 훨씬 더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지금 한국에는 성령 쇄신 운동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모든 교구마다 그리고 거의 모든 본당에서 성령 세미나를 통하여 개인과 교회 쇄신을 꾀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좋고 풍성한 열매가 있기도 하지만 부작용도 상당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성령의 은사에 대한 인식 부족이나 그 사용상의 문제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눈앞에 나타나고 있는 말단적인 현상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교회의 지도자들인 주교나 신부들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새로운 교회 및 신앙 쇄신 운동이 도입될 때부터 올바른 지도와 감독을 철저히 했었어야 함에도, 처음에는 두손 놓고 방관만 하다가 문제가 야기되자 그때서야 책임 회피적으로 문제점을 들춰내는 식의 태만한 안일무사주의와 오만한 권위주의적 사목 태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결코 안일무사주의와 권위주의를 드러내는 무의식, 무책임, 무관심, 무성실한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시지 않으신다. 또한 교회는 거룩하고 보편된 생명 공동체이어서 성령의 따스한 기운으로 지속적인 발전이 있기 마련이지만, 교회의 사목자들과 신자들의 삶과 행위가 실제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거나 이에 반(反)함으로써 잘못된 결과를 초래한 예가 허다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처럼 열광적인 교회 및 신앙 쇄신 운동이 있음에도, 신자 각자와 교회 자체의 쇄신과 변화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찌하여 한국 신자 총 수가 300여 만 명이라고 하는데 냉담자가 90여 만 명이 되는 이유는 무엇이며, ’70년대의 활발했던 젊은 계층 중심의 입교 현상이 ’8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사그라지는 원인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더 나아가서 실제적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교회에서 소외당하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대체적으로 대규모 행사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겉으로는 세계에서 제일 열렬하고 왕성한 교회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속이 텅 빈 강정에 불과하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성령과 함께하지 않는 데 있다. 곧 사목자들이 너무나 인간 위주의 사고방식에서 교세 확장과 외적 발전에만 정신을 쏟고, 참 그리스도교적인 가치인 사랑을 바탕으로 한 정의, 평화, 일치는 입으로만 떠들어댈 뿐이지, 사실은 이를 외면하면서 안전제일주의와 현실타협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VI. 성령과 예언직 수행

 

구약에서 하느님의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히거나(판관 6,34; 14,7; 에제 1,3 참조) 하느님의 영이 내려(판관 2,10; 12,29 참조) 하느님 백성들을 다스리기도 하였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직(預言職)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생각이나 말을 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데 온전히 투신한 사람들이었다. 

 

사도들은 성령 강림 이후 성령으로 충만하여 복음선포에 온몸을 바쳤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닥쳐온 모든 고통과 죽음의 위험까지도 성령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온갖 박해를 당하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고”(사도 4,31),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오히려 하느님께 복종해야 하지 않겠는가?”(사도 5,29) 하면서 “성령께서 그 증인이심”(사도 5,32)을 굳게 믿었다. 이로써 그들에게는 순교의 월계관이 씌워지기도 하였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신묘하게 역사하신다. 교회는 때로 그러한 성령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해 현실과 타협하기도 한다. 한번 잘못 내린 판단이 사회와 민중에게 얼마나 큰 실망을 안겨주었으며, 이로써 교회가 그들에게서 어떻게 외면당하게 되었던가를 역사는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우리는 과거 이땅에서 발생한 안중근 의사의 예를 통하여 교회가 판단을 그르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그런데 이 시대의 교회에서도 역시 똑같은 오판과 선입견에 휩싸인 잘못된 판단의 예를 볼 수 있다. 이것은 모든 것을 껴안는 성령의 방향과는 어긋나는 행위이며, 동시에 성령의 역사 자체를 방해하거나 성령의 역사하심에 제동을 걸고 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양의 판문점 횡단과 관련하여 한국교회가 보여준 극심한 혼란과 양극화 현상은 이 시대에 성령의 이끄심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극명하게 다를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민족의 통일과 화합을 위한 올바른 길이 무엇인가에 대한 각자의 소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과연 어떤 길이 성령의 역사하심에 부응하는 예언직 수행의 길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 사건이 마무리된 지금 교회 구성원 모두는 다시 한번 성령의 진정한 이끄심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에는 지금도 표현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이는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를 바 없다. 교회제도나 장상들에 대한 비판, 또한 사목자에 대한 비판은 금기로 여기고 있어서, 그러한 사실이 드러나면 항의를 받고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기도 한다. 이러한 교회 체제와 제도 속에 자유와 해방의 성령께서 함께하신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거기에 성령께서는 떠나고 안 계신다. “사실 교회가 자기 안에 침투해 있는 억압 세력과 지배 세력과 결탁해 있을 수 있다.”2) 그러나 성령께서는 승리자이시고 해방자이시며(로마 8,11 참조),3) 진리는 항상 드러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진리와 정의를 외면함으로써 저질러진 잘못과 실수에 대한 책임을 하느님 앞에서 져야 할 사람들은 바로 성령을 등지고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사목자들이다.

 

 

VII. 성령의 거처

 

성령께서는 권력있는 기득권자들에게보다는 권력없는 자들에게, 압박자들에게보다는 압박받는 이들에게, 부유한 자들에게보다는 가난한 자들에게,4)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에게보다는 못나서 소외되고 굽혀 사는 사람들에게, 유식한 체하며 속이는 자들에게보다는 무식하나 순박하고 솔직한 이들에게 강림하여 계심을 우리는 확실히 믿는다. 성령께서는 약한 자들의 편이시기에 그들에게 모든 악의 세력을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주심과 동시에 당신 자신을 체험할 수 있도록 배려도 해주신다. 어린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사람들의(마태 18,3-4 참조) 말과 행동에 성령께서 계신다. 성령께서는 위대하고 지위가 높은 이들에게는 좀처럼 당신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으신다. 성령께서는 정의와 평화와 일치를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며 당신의 역사를 계속하신다. 그렇기에 성령께서는 순교자들에게는 계셨으나 박해자들과는 함께하시지 않으셨다. 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주교에게는 성령께서 함께하셨으나, 그의 정의롭고 진실된 삶과 행위를 음해하며 권력자의 편이 되었던 당시 그 나라의 군종 주교에게는 성령이 계시지 않았다. 미국 흑인들의 민권운동을 하다가 백인의 흉탄에 쓰러져 간 마르틴 루터 킹 목사에게는 성령께서 같이 계셨으나 그의 저격자와 백인 테러 집단에게는 성령이 계시지 않았다. 성령께서 함께하시지 않은 자들은 악의 세력 곧 악령의 종에 불과한 것이다. 민심과 역사는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조금도 변함없이 성실하고 정의로우신 분이시다. 그렇기에 이사야는 말씀을 전하기를 “주께서 야훼의 영을 내려주시며 … 이르셨다.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여라. … 주 야훼께서는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정의가 서고 찬양이 넘쳐 흐르게 하신다.’”(이사 61,1-2.11 참조)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말씀대로 살고 행하신 분이시다. 곧 예수님이야말로 성령과 완전히 일치하시어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신 분이시다.5) 

 

그러므로 잠잠히 타이르시며 역사하시는 성령께서는 예수님처럼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인간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놓는 이들에게 계시는 것이지, 혼란과 소란 속에 이루어지는 대규모 신앙 대회나 혹은 교회 안의 권력자들의 권위적 행위에서 만나지는 분이 아니시다. 성령 은사 행위에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한 사람의 삶 속에서도 성령께서는 얼마든지 체험의 기회를 주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령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것이니, 그러한 사람들은 바로 진리와 사랑의 나라, 정의와 평화의 나라, 화해와 일치의 나라, 자유와 해방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일꾼들이며, 이들이 곧 성령의 사람들이며 참된 그리스도인들인 것이다. 성령께서는 바로 여기, 열려있는 마음으로 자신을 불태우면서 모두를 껴안아 당신 안에 하나가 되도록 노력하는 사람들과 그러한 의지로 이루어진 공동체 안에 계신다. 겉꾸미는 탈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나서는 사람은 성령을 만날 것이다. 걱정되는 것은 항상 그러했듯이 2000년 대희년도 내실없는 맘모스적 겉치레 행사로 끝남으로써 막대한 비용만 낭비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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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 바우메르트, [예수는 주님], 리수현 옮김, 광주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7, 31-32면 참조.

2) J. 콤블린, [성령과 사명], 김수복 옮김, 가톨릭출판사, 1996, 122면 참조. 

3) 같은 책, 122면 참조. 

4) 같은 책, 129.131면 참조. 

5) 같은 책, 126.127면 참조.

 

[사목, 1998년 1월호, 리수현(전주교구 용안천주교회 주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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