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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성령의 현존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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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115

성령의 현존과 활동

 

 

I. ‘잘 알려지지 아니한’ 하느님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니체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의 셋째 조목의 첫 구절인데, 이 고백으로써 신경은 마무리된다. 성부에게서 연유하고 성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생명은 교회와 개인 안에서 활동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고 내면화하기 때문이다. 성부로부터 비롯하고 성자를 통하여 중개되는 모든 것은 성령 안에서 완성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주님이시다. 

 

“우리는 성령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조차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사도 19,2)라고 말할 정도로 성령은 성삼위 가운데서 가장 알려지지 아니한 위격이시다. 성령은 ‘교회의 영혼’으로서, 활동과 힘과 생명의 원리로서 교회를 살리고 영감을 주고 교회를 인도하고 성화 은총을 통하여 우리 안에 머무는 하느님이시다. 견진성사가 이러한 성령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또한 우리가 특히 성령 쇄신 운동으로써 그분과 은사에 대해 숙고할 기회를 갖지만 그분에 대한 관심과 인식은 여전히 미미하다. 성령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그리스도교는 도덕주의와 율법주의, 형식주의에 기울게 되고, 순전히 인간 노력을 통하여 종교적 이상을 추구하는 ‘자연 종교’로 환원되고 만다. 계명은 사랑의 충동에서가 아니라 처벌에 대한 공포심에서 마지못해 외적으로만 준수할 따름이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기도와 신심생활은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형식에 불과할 것이다. 영성생활을 주도하는 성령의 역할에 대하여 무지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말씀에 전혀 맛들이지 못한다(14,25-26; 16,12-13 참조).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의식에 ‘낯선’ 하느님이시다. 그 근본 원인은 우리의 무관심과 무지의 탓이겠으나 성령이 성부와 성령처럼 인간적 표상을 통해 성서에 계시되지 아니한 때문이기도 하다. 성서는 성령을 간접적으로만 묘사할 뿐이고 성령의 신원보다는 역할과 현존에 더 관심을 쏟는다. 그런데도 가톨릭의 전통 성령론은 성령의 신적 정체성에 치중하여 그 역동적이며 폭넓은 활동을 주목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성령을 ‘성화주’로 칭함으로써 그 역할을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계승 발전시키는 활동에만 국한시켜 버렸다. 그리하여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에 종속된 성령론이 되고 말았다.

 

성령의 활동과 현존을 가리키는 성서의 표징들 곧 물, 불, 구름, 바람, 숨 따위는 자연의 주요 요소들로서 성령이 생명, 사랑, 자유, 힘, 열정, 일치, 신비와 관련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그것들은 성령이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 자체로 우리를 내면에서 변화시켜 하느님을 닮게 해주는 성화주라는 사실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령의 광범위한 활동과 친숙한 현존을 가리킨다. 우리의 생존과 활동에 필수적이며 우리의 삶에 너무나 가까운 요소인 이 표상들처럼 성령은 우리와 아주 친근한 분이므로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하느님이 되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성령은 인간적 형상이 아니라 그 같은 표징들을 통하여 역사와 세상 안에서 당신 행위를 계시하신다. “기묘한 섭리로써 세계의 진로를 인도하시며 세상의 모습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은 사회 발전을 돕고 계신다”(사목헌장, 26항). 또한 성령은 “인류가 그리스도의 은총과 성령의 힘으로 저 숭고하고 영원한 하느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로 도달할 수 있도록”(종교자유선언, 15항) 곧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개입하고 놀라운 업적들을 이룬다. 성령이 자신을 나타내는 것은 다만 이 폭넓은 행위의 효력으로써뿐이다. 그분의 모습은 그분의 업적과 선물과 은사들에 의해서만 파악될 뿐이다. 

 

금년은 제삼천년기를 준비하는 두 번째 단계의 둘째 해인 ‘성령의 해’이다. 교황이 지적한 대로 “희년 준비의 일차적 과업은 성령의 현존과 활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포함한다. 성령께서는 성사들 특히 견진성사에서 그리고 교회의 선익을 위하여 불어넣어 주시는 다양한 은사와 역할과 직무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활동하신다”([제삼천년기], 45항). 그러나 성령과 관련하여 대희년을 준비하는 금년을 우리는 성령에 대한 인식의 전기로 삼아 풍성한 영적 결실을 맺도록 해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영역 밖에서도 광범위하게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동적 현존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 소고에서 우리는 성령의 폭넓은 활동에 대한 성서적 안목에서 시작하여 그분의 고유한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

 

 

II. 창조와 구원의 영


1. 하느님의 ‘루아흐’

 

영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루아흐(ruach)는 바람, 공기의 움직임, 숨, 호흡을 의미하는데 이스라엘은 영에 대한 체험을 그것들과 결부시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바람은 불가항력적이고 신비로운 힘을 지닌다. 가공할 힘과 생명력을 지닌 바람은 하느님께 예속되어 있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조종될 수 있다. 하느님은 생명을 지어내고 보존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루아흐는 하느님의 입김이다(출애 15,10). 루아흐는 생명력, 생명 자체의 동의어인 숨을 가리키기도 한다. 사람이 호흡할 때 살아있고 호흡이 멈출 때 죽는다. 숨은 곧 생명이다. 인간이 죽을 때 루아흐는 사라진다(시편 78,39; 집회 3,21). 살아있는 것들의 숨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고(창세 2,7) 숨을 주는 분은 하느님이시다(시편 104,29). 

 

바람 : 자연의 힘을 대표하는 바람을 하느님께서 결정적 순간에 이용하여 창조와 구원의 계획을 실현하신다.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홍수를 끝낸다(창세 8,1). 이집트 노예 시절에 바람이 불어와 재앙을 일으킨다(출애 10,13.19). 출애굽 때에 강한 돌풍이 불어와 홍해를 말렸다(출애 14,22-23). 이스라엘이 바다를 지나고 이집트인들이 바닷물에 잠겼을 때 모세는 이렇게 노래했다. “당신의 세찬 콧김에 바닷물이 쌓였고 물결은 둑처럼 일어섰으며 바닷속 깊은 데서 물이 엉겼습니다”(출애 15,8).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루아흐를 역사 안에서 체험하였다. 

 

숨 :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빚은 아담의 코에 숨을 불어넣으시자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창세 2,7). 모든 생명의 원천이고 모든 생명체를 살게 하는 숨이 하느님의 루아흐이다. 살아있는 하느님의 영이 모든 생명체의 효력있는 원천이다(욥 33,4). 하느님 홀로 생명의 숨을 관장하는 주인이시다(민수 16,22; 27,16). 생명은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의 숨이다. 하느님의 생명력은 인간 안에서 작용하는 하느님의 힘이다. 

 

구약성서 안에서 영은 아직 독자적 주체가 아니라 하느님의 속성 또는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방식으로 나타난다.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곳에 영은 작용한다. 영은 생명력과 활동력으로 충만한 하느님이시다. 영은 곧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입김은 온 피조세계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행위이다. 이 행위를 통하여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 안에서 활력과 생명을 주는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하느님의 영은 만물을 창조하는 생명력이시다. 창조의 시작 때에 원초의 물 위에 감돌고 있던(창세 1,2) 영은 말씀과 함께 혼돈을 정돈하여 질서를 잡아주는 창조의 역할을 맡는다. 영이 창조계를 문란케 하는 무질서 위에 감돌고 말씀이 질서의 한계를 설정할 때 우주와 인간 세상 안에 일치와 평화가 실현된다. 영은 창조된 모든 것 안에서 활동하는 주역이시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어 모든 것을 지탱하는 분이시다”(지혜 1,7; 7,22; 8,1 참조). 영은 인간에게 예술적 감각과 감수성을 주시고 통찰력과 슬기도 부여하신다(욥 32,8; 다니 1,17; 5,11 참조). 영은 건축술과 예술의 재능까지도 선사하신다(출애 28,33). 성소의 건립을 위하여 하느님은 브살렐에게 영을 채워 주신다(출애 31,3-5). 영은 인간에게 창작 능력을 줄 뿐 아니라 인간의 문화에까지 영감을 주신다. 농업, 법률, 정치, 예술 등 광범위한 분야에까지 창조 능력을 발휘하신다. 인간의 모든 창작활동은 하느님의 영이 주시는 선물이다.

 

 

2. 종말론적 선물

 

신약성서는 하느님의 영을 종말시대의 선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완성하시는 분 곧 새 창조의 영으로 묘사한다. 예수님의 세례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분 위에 임하였다(마르 1,9; 마태 3,13; 루가 3,21). 첫 창조의 순간에 하느님의 ‘기운’이 혼돈의 물 위에 휘돌고 있었듯이 영은 세례 때에 비둘기의 형상으로 요르단 강 위에 생명력으로 감돌았다. 예수님의 세례와 파스카 이래로 성령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가장 훌륭한 선물로서(루가 11,13) 세상에 충만히 임할 수 있게 되었다. 

 

하느님의 영은 예수님을 통해 ‘부어지는’(요엘 2,28 참조)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수이시다(요한 4,10 이하; 7,38-39 참조). 성령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낳고 기르는 생명수이시다. 이 생명수는 십자가 위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다(요한 19, 34). 성령은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세상에 보내시는 새 창조의 영이시다. 성서에서 성령은 간혹 물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물은 영의 창조 역할을 잘 나타낸다. 물이 있는 곳에 생명, 일치, 깨끗함, 부드러움이 있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며 더러움을 씻어주는 정화수이고 놀라운 위력을 지닌다. 물은 모든 것 안에 스며들어 가고 또 그 모든 것을 같은 목적지를 향해 이끄는 힘을 지닌다. 성령은 만물 안에 침투하여 그것들을 그 목적지인 하느님께 이끄시며 완성하신다. 그러므로 성자와 교회를 이 세상에 탄생시키신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로이 태어난다. 

 

바오로에 의하면 새 창조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한 성령을 ‘마셔’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되어 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새 창조를 시작하셨으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 있으면 새 피조물이 된다. 이 새 창조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을 자신과 화해시키는 것이다(골로 1,20).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시작된 새 창조에서 영이 펼치는 활동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현재화하며 그리스도인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속을 완성하는 일 곧 성화행위이다. 

 

성령의 충만한 ‘부어짐’으로써 ‘살리는 영’(2고린 3,6)의 시대 곧 종말시기가 시작되었다. 성령의 선물은 구원의 결정적 시기의 특징이고 표징이다. 성령의 선물들은 우리들을 거룩하게 하면서 장래의 궁극적인 실재들을 약속하고 미리 누리게 하며 준비시키기 때문에 종말론적 선물이다.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성령의 선물들은 미래에 완성될 충만한 성취를 위한 보증이므로 담보라 불린다(로마 8,23). 성령은 첫 선물 곧 담보이며 장래 완전한 선물의 보증이시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현존은 우리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시다(로마 8,11). 종말론적 선물은 선취까지도 뜻한다. 곧 영은 마지막 완성을 향하여 우리들을 성화한다. 사멸할 우리의 존재를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이끈다.

 

 

III. ‘생명을 주시는 주님’

 

성령은 하느님의 선물일 뿐 아니라 그것을 선사하는 분이기도 하다.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시다.

 

 

1. 자유의 영

 

성령은 그 자신의 의지와 자유를 가진 ‘위격’으로서 고유한 목적과 의도를 갖고 실현하고자 하며 언제나 그 자신의 자유 안에서 행동하신다. 성령은 인간이 파악할 수 없고 포착할 수 없는 초월적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생명, 사랑일 뿐 아니라 그것들을 주는 분이시다. 또한 동시에 언제나 인간이 기다려야 할 분으로 현존하신다. 성령은 바람처럼 자유로이 활동할(요한 3,8) 뿐 아니라 인간을 해방하는 자유의 영이시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갈라 5,13; 5,19 참조). 신앙인에게 부어지는 성령은 하느님의 능력인 동시에 은사를 주시는 하느님 자신이므로 교회는 성령을 ‘당신’이라 부르고 “오시옵소서!”(묵시 22,17)라고 기도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행위에 응한다. 성령을 통하여 인간은 삼위일체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며 그분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다. “우리는 영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습니다”(갈라 5,24). 인간이 성령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고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지만 여전히 성령 앞에서 피조물로 존속하며 성령은 언제나 인간 앞에 있다.

 

성령은 하느님의 위격적 사랑이시므로 무엇보다도 생명의 원천 곧 창조의 원리이시다. 성령은 피조세계 안에 있는 움직임과 생명의 근원이시다. 새로운 어떤 것이 생기는 곳이면 생명이 깨어나고, 실재가 자신을 넘어 그 목표에 도달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성령의 활동과 현존의 면모가 드러난다. 성령의 현존과 활동을 통하여 피조세계는 이미 초자연적 목적과 특성을 지닌다. 또한 성령은 특별한 방식으로 은총질서 안에서도 근원이시다. 그분은 인간 존재들이 하느님과의 친교를 발견하는 곳이면 어디든 활동하신다. 하느님과 이루는 사랑의 일치는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충동에 매인 종으로서가 아니라 자유인으로서 하느님을 섬긴다. 성령은 인간의 생명과 세계를 파멸과 죽음으로 이끄는 자기 중심적 욕망에서 자유롭게 하는 “자유의 영”(2고린 3,17)이시다. 이 영의 파견으로 새계약의 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마음 안에 새겨져 우리를 내면에서부터 움직이게 하는 내적 법이고 그래서 자유의 법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참 자유이다. 이 자유는 성령의 많은 은사와 결실들 안에서 나타난다. 성령의 열매는 기쁨과 평화이다(갈라 5,22 참조). 성령의 현존은 빛과 평화를 가져다 준다(로마 14,17 참조). 영의 가장 고귀한 선물과 결실은 사랑인데, 자신에게 얽매이지 않고 사랑의 봉사로써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자가 진정 자유인이기 때문이다(갈라 5,13 참조).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이 자유는 박해와 고난의 상황 안에서조차 자신을 포기하는 사랑 안에서 충만히 드러난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와 전승은 성령을 저항과 극복 및 인내의 힘으로 묘사한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도 하다(요한 15,26 이하). 진리를 깨달아 진리의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해준다. 신앙의 인식을 일으키고 성장시켜 준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고 되새기게 하여 그분을 위한 증인이 된다. 죄와 정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준다. 이리하여 성령은 폭력과 거짓으로 억누르려는 노력에 저항하여 빛에 참 실재를 가져다 주고 하느님의 영광의 빛이 또 다시금 세상 위에 비쳐지도록 해준다. 성령은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불결해진 것을 깨끗이 해주고 메마른 것을 기름지게 하며 차가운 것을 덥게 해주고 병든 것을 고쳐주신다. 성령의 성화행위 안에서 인간과 세상의 종말론적 변혁과 성취가 실현된다.

 

 

2. 사랑의 영

 

성령은 죄와 죽음의 세계 안에서 새로움을 창조하신다. 새사람, 새생활, 새 공동체, 새 관계와 새 질서, 새 사회와 새 세계를 만드신다. 그분은 신앙인들의 마음과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만이 아니라 그들이 있는 모든 곳에 현존하며 모든 곳에서 활동하신다. 성령은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서 해방시키며 변화시키고 치유하는 능력이시다”(E. 슈바이처). “성령의 경륜은 변혁과 새 창조이다”(L. 보프). 성령은 사랑과 정의와 평화와 자유를 세상 안에 일으키는 하느님의 창조력이시다. 성령은 하느님의 종말론적 선물이므로 하느님은 성령의 충만한 부어짐을 통해 역사를 그 완성으로 이끄신다. 성령은 고유한 능력으로써 종말의 완성을 향해 하느님의 일들을 이끌어 가면서 완성하신다. 성령은 창조적 원천으로서 피조세계 속에 하느님의 미래(종말의 완성)를 향한 새로운 계획과 노력을 일으키며 이 미래를 향해 나아가도록 작용한다. 그분은 피조물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함께 신음하며 구원의 자유를 향해 부르짖는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시므로 창조의 종말론적 완성자로 세상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모든 것을 성취하신다. 성령은 하느님의 위격적 사랑이고 또 사랑의 영이시므로 창조의 고통을 겪으신다. 곧 창조를 위하여 탄식하신다. 창조는 타자에게 가서 그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자기 자신 밖으로 이탈하고 제한시키는 활동이다. 성령은 하느님의 위격적 사랑이시므로, 강생 때에 성자가 인간과 결합하여 그를 새로이 창조하기 위하여 하느님 밖으로 이탈하여 자신의 신적 본질을 포기하고 종의 모습으로 자신을 제한하신 것처럼(필립 2,6 이하 참조) 성령도 인간과 세상 안으로 들어와 그것들을 거룩하게 하고 완성하기 위하여 자신을 한정하신다. 성령은 타존재 안에 들어가서(성령 강림) 그 존재를 살아 움직이게 하며 하느님과의 친교 속에서 모든 것을 완성하신다. 성령은 바람처럼 불가항력적 자유의 힘으로서 활동하며 물처럼 피조계의 모든 것 안에 부드러운 생명력으로서 스며들고 불처럼 모든 것을 정화하면서 자기 사랑 안에 용해시켜 하느님 안에서 완성하신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때까지”(1고린 15,28) 성령은 탄식하며 성취시켜 나가신다. 창조의 원리, 생명의 힘으로서 우주의 창조에 개입한 성령은 부활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을 깨끗하게 하고 종말의 완성을 향해 피조계를 이끄신다.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성령은 우리의 죽을 몸까지도 다시 살리는 부활의 원리이시다(로마 8,11 참조). 그분은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의 힘으로 정의와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인간 자유의 원동력이시고, 자유와 책임 속에서 역사를 엮어 나가는 인간의 모든 힘을 분출시키는 원천이시다. 곧 역사를 가능하게 하는 정의와 일치의 근원이시다. 

 

개인의 내면성과 관련된 성령의 모든 활동 곧 성화행위의 중요성이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된다. 성령의 활동은 개인의 내면 안에서 가장 명백히 체험되고 나타난다. 그렇지만 성령의 활동이 개인적 내면의 영역에 한정될 수는 없다. 피조계 안에서 펼쳐지는 성령의 폭넓은 활동이 인정되고 회복되어야 한다. 성령의 내면화, 개인주의적이고 사사로운 영성화가 극복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체험하며 성령과 함께 경험되는 하느님의 새 창조의 세계에 대한 희망 속에 산다. 그는 역사 속에서 희망의 표징들, 새로움의 가능성을 믿고 이웃들이 경험할 수 있는 표징들을 만들어내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다. 이와 같이 성령의 활동을 구원과 교회의 지평에서뿐만 아니라 창조와 세계 역사 전망에서 파악할 경우에, 그리스도 신앙은 세계의 역사적, 물질적 현실과 이 현실을 결정하는 요인들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 없다. 모든 피조물은 생명을 창조하는 영의 은밀한 활동에 참여한다. 성령은 인간의 이성을 바르게 인도하며 인간의 발전, 세상의 회복을 위한 새로운 노력을 일으키신다.

 

 

3. 생명의 영

 

성령은 하느님의 생명 자체이시므로 우리가 그 생명을 누리도록 해주신다.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을 누리어 새롭게 창조되는 것을 동방 신학에서는 신화(神化), 서방 신학에서는 성화라 부른다. 신화 또는 성화의 새로운 변화는 피조물인 우리의 인간적 본질을 박탈하지 아니한 채 본체적 일치로써 우리를 하느님과 결합시킨다. 하느님은 우리를 아들의 본성과 영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자신과 닮게 해준다. 

 

세례 때에 일어나는 이 변화는 삼위일체와 우리 사이의 새 관계를 설정해 준다. 이 관계는 세례가 우리에게 전해 주는 새 인식과 새 사랑에서 발생한다. 새 인식은 하느님께서 자기 자신과 피조물을 아시는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 피조물을 알게 해주는 신덕이다. 새 인식은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기 인식에 참여함으로써 누리게 되는 신덕이다. 새 사랑은 하느님께서 자신과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게 해주는 애덕이다. 망덕은 하느님을 더욱더 알려는 신앙의 욕구이고 하느님과의 더욱 긴밀한 일치관계 안에서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려는 사랑의 욕구이다. 신덕과 애덕은 우리의 지성과 의지를 변화시켜 우리가 하느님처럼 알고 사랑하게 해준다. 삼위일체의 생명은 상호 인식과 상호 사랑의 생명이므로 신화에 의하여 우리는 성삼위가 서로 알고 사랑하는 것과 같이 성삼위를 알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성삼위가 상호간에 주고받는 같은 인식과 같은 사랑에 동참하게 된다. 이 동참이 곧 우리가 성령으로 영위하게 되는 신, 망, 애덕의 삶이다. 

 

성령은 성화 은총으로 이 기본적 향주삼덕(向主三德)을 주실 뿐 아니라 삶을 통하여 이 삼덕을 완성하는 데에 유익한 도움을 주신다. 그것이 곧 성령의 일곱 가지 선물이다. 인간의 지성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는 슬기, 지각, 의견, 지식의 선물이 있고 인간의 의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용기, 효경, 경외심이 있다. 슬기는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세속 사랑보다 귀하게 여기는 지혜이고, 지각은 구원의 진리를 지성의 한계 내에서라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의견은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을 도와주고, 지식은 믿을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을 식별하게 해주는 은사이다. 용기는 신앙생활에 수반되는 모든 장애를 극복하게 해주는 힘이고, 효경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증진시키며 경외심은 자녀의 심정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도와주는 은사이다. 성령의 모든 선물은 일곱 가지에 한정될 수 없다. 일곱은 전부를 가리키는 상징적 의미의 숫자이다(이사 11,1-2 참조). 

 

성령은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의 원리이시다. 성부는 성자의 본성 안에 우리를 동참시키심으로써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하신다. 성령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삶을 살도록 이끄신다. 우리는 실제로 성령에 의해 새로이 탄생된다(요한 3,5-8 참조). 성자께서 우리 가운데 잉태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다(1베드 1,23; 1요한 3,9). 자녀로서 우리가 영위하게 되는 삶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곧 하느님의 씨앗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습이 여러분 안에 갖추어질 때까지 나는 여러분 때문에 다시 산고를 겪고 있습니다”(갈라 4,1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일찍부터 ‘그리스도를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이라 불리었다. “성부에 의하여 우리에게 파견된 성자는 처음부터 계셨고 거듭 나셨으며 항상 새로이 우리의 마음 안에 태어나신다”(디오그네투스). 성령이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탄생시키신다. 그분은 마리아 안에서 그리스도를 잉태시키신 일을 우리 안에서 계속하신다. 그리스도의 피와 영혼을 형성시켜 주신 성령은 우리 각자 안에서 그리스도를 신비로운 방식으로 태어나게 하신다. 

 

기도는 하느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의 신, 망, 애덕의 삶을 드러내는 여러 가지 형태들 가운데 하나이며 또한 성령의 현존방식들 중 하나이다. “우리는 무어라 기도해야 마땅할지 모르고 있으나 영께서는 … 탄식으로 몸소 대신 빌어주십니다”(로마 8,26). 성령은 기도하게 해주실 뿐 아니라 그분 자신이 기도 중에 선사된다.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의 친밀함 속으로 이끌어들인다”(토마스 데 아퀴노). 기도에 대한 고전적 정의는 ‘영혼의 호흡’이다. “기도로써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숨을 들이마시고 숨을 내쉬고, 하느님은 우리 안에서 숨을 들이마시고 우리 위에 숨을 내쉬신다”(프란치스코 드 살). 기도는 숨이 육신의 생명인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명이다. “기도하는 것은 숨을 쉬는 것이다”(키에르케고르). 기도는 하느님의 ‘루아흐’(숨)를 들이마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호흡하는 것과 흡사하다. 호흡은 우선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이다. 들이마신 공기는 몸 전체에 생기를 준다. 그 다음에 마신 공기를 밖으로 내쉰다. 이같이 기도는 우선 성령 곧 하느님의 사랑의 숨을 들이마시는 것이다. 하느님을 자신 안으로 맞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가슴의 운동으로 공기를 Æo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공기가 폐 안으로 밀려들어 온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도할 때 이 사랑의 숨이 들어오도록 마음을 열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성령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오로지 마음을 열어주기만을 원하신다(묵시 3,20 참조). 결과적으로 기도는 성령 곧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이는 것 또는 들이마시는 것이고 또한 자녀다운 사랑 안에서 성령을 하느님께 내쉬는 것 혹은 되돌려 드리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내적 기도는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 이 사랑의 호흡인 것이다.

 

 

4. 성령에 대한 신뢰

 

‘성령의 해’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령의 폭넓은 활동과 역동적 현존을 깨달아 성령께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겠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여러분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은 나에 관해 증언할 것입니다”(요한 15,26). ‘협조자’(parakletos:곁에 불려온 분) 성령께 대한 예수님의 신뢰는 대단하였다. 예수님은 자기 뒤를 이어 강림한 성령이 자신의 모든 일에 협조하는 분임을 확신하셨다. 이 신뢰 덕분에 예수님은 자신의 떠남과 관련하여 “내가 물러가는 것이 여러분에게 이롭습니다. 사실 내가 물러가지 않으면 협조자가 여러분에게 오시지 않을 것입니다.”(요한 16,7)라 단언하실 수 있었다. 인간적 견지에서 보면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두고 떠나가기에는 ‘너무 이른’ 때였다. 제자들이 스승의 사명을 이어받기에는 그들의 생각조차 유치했고 그분의 정체를 이해하기에는 신앙도 미숙하였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성령께 대한 전폭적 신뢰 덕택에, 자기 현존의 ‘공백’을 성령의 역동적 현존이 충만히 채워주리라 확신하셨다. 예수님께서 성령께 부여하신 협조자라는 칭호 안에는 성령의 광범위한 활동과 그에 대한 신뢰가 담겨있다. 성령에 힘입어 예수님은 말씀과 행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증거하고, 세상의 구원을 위한 메시아 사명을 수행하고, 종으로 자신을 온전히 아버지께 바치고 아버지와의 일치 속에서 '끝까지' 봉사의 삶을 영위하실 수 있었다. 성령께 대한 신뢰가 고달픈 지상의 여정을 걷는 예수님께는 위로, 용기, 인내, 기쁨의 원천이었다. 아울러 예수님은 세상에서 아버지께 건너가는 순간에 제자들에게 성령께 대한 신뢰를 촉구하셨다. 종말의 때와 표징을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위로부터의 힘’인 성령께 대한 관심과 신뢰를 촉구하시면서 선교 사명을 일깨우셨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내릴 성령의 능력을 받아 …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사도 1,8). 

 

성령은 교회 공동체, 역사와 개인 안에서 활동하고 현존하신다. 그분은 말씀, 직무, 성사, 은사 안에서 자신을 넘겨주신다. 말씀과 더불어 직무를 통하여 성사를 현실화하신다. 교회의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엮어지는 성령과 인간들의 공동 역사이다. 성령은 그분이 주시는 선물들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신앙은 성령의 업적이고 그분은 성사 안에서 활동하시고 역사 안에서 현존하신다. 사람들의 불신이 그분의 현존 표지들을 무시할 때라도 그분의 사랑은 언제나 신실하다. 성령은 예수님의 사명을 계속하는 영이시고 일시적인 세상의 긍정적 가치들을 충만한 완성으로 이끄는 미래의 담보이시다. 그래서 성령께 대한 신앙은 인류의 미래와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해결될 가능성을 믿음을 뜻한다. 성령의 행위에 자신을 개방한다면, 일치에 대한 더욱 큰 자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성령이 모든 이 안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이 성령은 각 사람 안에서 유일한 방식으로 현존하는 신적 위격이시고, 하느님의 이 현존을 새로이 인식하게 해주신다. 이래서 성령께 대한 신앙은 미래를 향한 희망이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창조주이신 성령이여 우리 맘에 임하소서. 

고귀한 은총으로 모든 만물 돌보소서”(Veni Creator Spiritus)

 

[사목, 1998년 1월호, 최영철(부산가톨릭대학 교수, 신부, 교의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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