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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대림절에 새기는 종말론적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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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119

대림절에 새기는 종말론적 희망

 

 

우리는 금세기 마지막 대림절을 맞고 있다. 21세기와 2000년대가 시작되기 직전의 이 시기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표현에 따르면, ‘새로운 대림(待臨)의 계절, 기다림의 계절’(「인간의 구원자」 , 1979, 1항)이기도 하다. 대림절이 인류의 구세주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시기인 한에서 현 시기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분명 희망의 시기일 터이나,  대규모의 피해를 야기하는 폭우와 태풍, 그리고 지진 등의 천재나 인종 내지 종교 전쟁과 살륙행위, 방사선 피폭, 그리고 착취와 기아 등의 인재가 연속적으로 돌발하는 세기말의 충격적 사태에 직면하여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온 인류와 창조세계의 미래가 매우 불투명하고 불확실하게 느껴지는 전환기 속에서 대림절에 담긴 종말론적 희망에 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1. 희망의 존재 인간

 

인간은 본시 희망을 지닐뿐 아니라 희망의 존재이다. 인간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완전한 처지에서 세계 안에 태어나 미래에서의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희망으로 이끌리며 생활하기 마련이다. 유년기의 소망으로부터 시작해서 일상적인 꿈과 동경 안에서 이러한 원초적 희망의 내용들이 표출된다.

 

물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삶을 영위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내일조차 미처 생각할 겨를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에 허다하며, 쾌적하거나 아니면 강박적인 일상에 만성이 된 나머지 현실적 희열과 행복에 젖어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다수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는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내면 안에서 깊이 억압된 채 머물러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며, 후자의 경우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재난이 엄습하여 대규모 피해가 숨돌릴 사이없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상황 안에서 현실세계가 불투명하기 그지없음을 체험하고 또 현실 속에서 이룩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훨씬 능가하는 질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동경과 희망을 지니고 있음을 별로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될 것이다. 

 

불완전한 현실보다 나은 미래의 삶에 대한 희망이 인간 존재를 관통한다. 현실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기에 노동, 휴식, 사랑 등의 일상사가 가능하고, 유한한 형태로나마 만족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와 문명 세계의 건설이 가능하다. 이 희망은 현실의 모순과 균열, 부조리와 암흑, 그리고 불완전한 세계가 결코 궁극적인 것이 아니고 언젠가 더 선하고 완전한 상태로 변화하고 개선되리라 기대하는 원초적 자세이다. 

 

본연의 의미에서 희망은 여하한 형태의 공상이나 망상과는 구별된다. 공상이나 망상은 현실적으로 이룰 수 없는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에 사로잡히면서 소외된 현실세계를 변화시키려 거의 노력하지 않고 현재의 잠재적 가능성과 전혀 상관없는 미래를 거론함으로써 실제로는 지성을 마비시키고 행동을 촉발하지 못하게 하여 당사자를 비현실적 몽상가로 만들뿐이다. 그런데 동서양의 여러 종교들이 표방하는 희망이 불의하고 소외된 현실을 정당화하려는 지배세력의 시녀 역할을 하는 망상적 위로의 성격을 지니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이러한 종교의 역기능에 대한 반작용으로 금세기에 이르러 내세에서의 복락을 거부하고 현세 위주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점증하고 있다. 그들이 내세에 대한 추상적 기대 때문에 종교인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수세기 동안 현세 질서의 개선을 위해 수행해야 할 의무와 과제를 등한시한 것을 비판하면서, 내세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가지기보다 현실상황의 개선을 위해 투신할 것을 촉구하고 있음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2.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희망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불완전성과 세계의 비구원성에도 불구하고 온 인류와 세계가 사랑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때문에 영원히 살아남아 완성되리라고 희망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의 종말 실재로서의 하느님의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역운(歷運), 특히 부활 속에서 선취적으로 이미 발생하였다고 믿는다. 그분의 부활은 죽음의 한계를 뛰어넘어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인생과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하느님의 궁극적 계시이다. 그분의 부활을 통해서 계시된 진리는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모든 세력, 곧 죽음까지도 무력화시킨 하느님의 진리로서 종말론적 성격을 지닌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서 동서고금, 온 인류의 최종 희망에 대한 궁극적 해답을 얻게 되었기에 종말론적 희망을 만난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역사적 역운 속에서 무엇이 발생하였는지를 아직 온전하게 알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계시가 궁극적으로 발생하였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종말의 ‘이미’와 ‘아직 아니’의 긴장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분의 부활신앙에 입각한 종말론적 희망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전혀 희망을 지니지 않은 사람들과는 달리 의연하고 자유로운 삶을 가능하게 만든다.

 

또, 우리는 이러한 종말론적 희망을 지닌 삶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체험한 순수한 사랑과의 만남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사랑은 본시 상대방 “너”를 존재하게 하는 원초적 힘이고 그의 삶이 영속하기를 바라는 힘이다.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너는 얼마 후에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영원히 살아 머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네가 존재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영원히 너를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마련이다. 

 

우리가 자신의 불완전성과 세계의 비구원성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께서 인류와 세계를 창조하시고 영원히 존재하기를 바라는 몰아적 사랑 자체이심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베풀어진 몰아적 사랑을 현실 속에서 다양하게 선물로 체험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죽음을 넘어서는 삶까지 희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3. 종말론적 희망과 역사내적 투신

 

종말론적 희망은 약속된 하느님의 최종 미래를 단지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만이 아니라 목표를 향한 자기 투신을 통하여 완성시켜야 할 약동적인 힘이기도 하다. 최종적으로 다가올 것에 대한 기다림은 그냥 앉아서 기다리는 정지의 상태가 아니라, 기다리고 있는 것을 향하여 마중나가는 약동적인 과정을 불러일으킨다. 하느님으로부터 약속된 미래가 피안적이기에 막연히 기다려야만 하는 미래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투신을 촉구하는 약동적 미래라는 사실이 예수의 십자가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분의 십자가는 소외된 현실 속에서 구체적 노력인 회개와 화해, 그리고 원수마저 포용하는 보편적 사랑을 촉구한 투신행위의 귀결이었다. 십자가는 현실적으로 수수방관하는 자세를 허락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도래한 세계 종말에 직면해서 현실 안에서 작용하는 희망의 힘으로 적극 참여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현실 세계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지금 이미 체험하고 있는 현실의 개선을 위해 감연히 투신하고 종말론적 희망의 표징들을 현실 속에 심음으로써 빈곤과 재난의 절망적 처지 속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믿을 만하다는 증거를 보여 주어야 할 사람들이다. 하느님 안에서 기대하는 최종 미래와 우리의 손에 맡겨진 차안의 미래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응하는 것이다.

 

종말론적 희망은 하느님 사랑의 미래를 희망하기 때문에 미래를 확실히 열어 보이는 현실 안에서의 용서와 화해의 힘으로 나타난다. 용서와 화해의 힘으로부터 나오는 질적으로 새로운 시작만이 폭력 대 폭력, 억압 대 복수의 악순환이 지속되는 현실 세계 속에서 진정으로 새로운 미래를 가능하게 한다. 원수를 포용하며 형제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가장 원형적인 몰아적 사랑이 예수의 인격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었음은 주지되어 있다.

 

 

4. 새천년을 기다리는 대림절의 종말론적 희망

 

앞으로 불과 한달 후에 다가올 2000년대를 기다리는 대림절에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종말론적 희망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계기술에 의거 전자정보화가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진 세계 안에서 ‘새로운 열의와 방법, 그리고 표현’을 통하여 수행되는 ‘새 복음화’를 이룩한 자기쇄신의 기반 위에서 현실세계를 각인하는 지배와 정복 지향적인 ‘죽음의 문화?문명’과 대조되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 곧 나눔과 섬김이 생활화되는 ‘사랑의 문화?문명’ 사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투신함으로써 종말론적 희망의 실상을 드러낼 것이다. 역사적 대전환기에 드러나는 ‘시대의 징표’에 유의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여 이를 실현하고자 그리스도인들이 결연한 자세로 투신할 때에, 새 천년대에 온 인류와 세계의 구원을 위한 종말론적 희망의 표징으로 사회와 세계 안에서 확고히 자리잡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성서와 함께, 1999년 12월호, 심상태(신부,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장) /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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