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 (월)
(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교육 주간)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교의신학ㅣ교부학

[마리아] 우리들의 거룩한 어머니이신 마리아에 대한 이해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8 ㅣ No.19

우리들의 거룩한 어머니이신 마리아에 대한 이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이해는 신심적 차원에 있어 초대 교회때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논란과 문제점들을 야기시키고 있다. 사도시대를 지나 교회의 모습을 세우기 위한 교부들에게 있어 마리아 신심에 대한 교의적 확정이 필요하였기에 마치도 전쟁터와 같은 싸움을 겪은 후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확정하게 된다. 교의에 대한 확정에 있어 크게 논란이 되었던 것은 마리아의 동정성, 하느님의 어머니, 주님의 어머니, 원죄없이 잉태되신 분, 주님과 함께 하늘로 부름받은 분(승천) 등이 었다. 교의적 문제는 그것을 확정하기에 있어 단지 옳고 그름에 대한 단정이 아니라 신앙감을 바탕으로 한 신앙의 확정이다.

 

신앙감과 신앙에 대한 우리들의 식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즉 신심행위로 나타나는 모든 것들을 신앙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단정적으로 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앙감의 중요성은 모든 신앙의 출발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분의 말씀과 빵을 나눔을 통해 그 분이 누구인지 알았으나(루가 24, 13-35), 그들안에 이미 예수의 존재가 차지하고 있음이 있었다. 신앙감이란 바로 제자들에게 남겨진 그 분의 흔적과 같은 것이기에 그분이 바로 주님임을 고백할 수 있는 원천을 갖게 된다. 마리아에 대한 우리들의 개인적 차원에 있어 신심 행위들은 달라도 어머니로서의 공경행위라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모든 종교에 있어 마리아 공경이란 서로 동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슬람 종교의 경전에도 마리아 공경의 이야기가 나오며, 개신교의 첫 출발인 루터나 쯔빙글리 그리고 캘빈의 사상에서도 어머니로서의 공경의 차원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가톨릭 교회에 있어 왜 그렇게 교의적 차원의 확정을 통해 타종교에게서 마리아 신심에 대한 오해를 갖도록 하고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 마리아 신심의 근거

 

마리아 신심의 근거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마리아을 공경하는 가운데, 마리아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 자신을 흠숭한다. 마리아 공경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을 이른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차지하는 마리아의 독특한 위치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있어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사건에 결정적인 삶의 형태를 가짐으로서 우리들의 신앙 형태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하느님의 위치가 인간의 삶 속에 함께 이루어 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마리아의 자유로운 동의를 통해 신앙의 위치를 하느님과 우리들 간의 인격적 위치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이루어지소서’(Fiat)를 말함으로써 인류 구원을 위해 신적 영역을 인간의 영역으로 놓았던 것이다. 마리아의 신앙 행위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구원사건의 공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의 마리아에 대한 가르침은 단순히 신심 행위로서만이 아니라 어쩌면 오해를 야기할 수 있도록 하는 교의적 발전을 갖게 하는 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과 연결되어 있다. 마리아에 대한 공경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신심 행위의 아름다운 표현인 찬미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기도문 세가지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한다.

 

①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 루가 1, 46-56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집에서 석달 가량 함께 지내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마리아의 찬가에 대한 저자의 출처에 대한 문제는 마리아 본인이든지 타인에 의해 루가가 기록되었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리아 찬가의 신학적 소중함이라 본다. 마리아는 당신 자신의 응답이 겸손에서 출발한 하느님 구원사업에 대한 적극적 동참이라는 것이다.

 

② 3세기의 기도문: 천주의 성모여, 당신의 보호하심에

 

“천주의 성모여, 

당신의 보호하심에 우리를 맡기오니 

어려울 때에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물리치지 마시고 항상 모든 위험에서 

우리를 구하소서,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녀여”

 

오늘날 사용되는 이 기도문은 성모께 드리는 기도문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마리아는 동정녀요, 하느님의 어머니로 불리우고 있으며, 마리아의 중재성을 크게 강조한다. 이러한 중재의 개념은 오늘날 마리아를 통한 중재 능력의 커다란 신뢰를 보이고 있다.

 

③ 찬미가 아카티스토스(Akathistos)

 

교부 시대 그리스 전례(7세기)에서 가장 뛰어난 찬미가인 ‘아카티스토스’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여기 이 땅에 다 담을 수 없는 말씀이 계십니다. 

하늘에 부재함이 없이 장소를 바꾸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낮추심이었습니다. 

자신 안에 하느님을 맞아들인 동정녀의 아드님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 동정녀는 환호를 듣습니다. 

기뻐하십시오. 

한계 없으신 하느님의 한계여, 거룩한 신비의 문이여.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이론이요, 믿는 이들에게는 분명한 영광입니다. 

마리아, 당신은 동정성과 모성을 결합하시어 상반되는 것들을 하나로 모으셨습니다. 

기뻐하십시오.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은 그리스도 나라의 열쇠, 

영원한 참된 행복을 찾는 이들의 희망입니다. 

기뻐하십시오. 

오, 동정이신 신부여.”

 

이 찬미가는 어떤 신학적 의도를 갖고 기술하였다기 보다 마리아 공경에 대한 시적 찬미의 형태를 아주 아름답게 적고 있다. 이러한 시적 찬미가는 당시 마리아 공경이 단지 교의적 차원의 가르침이 아니라 대중 신심에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잘 드러낸다.

 

 

2. 마리아께 드리는 공경 행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 교회 헌장 55항:

- 마리아는 신뢰로써 주님께로부터 구원을 기다리고 받는 주님의 겸손하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분이다.

 

* 교회 헌장 56항: 

- 신앙 안에서 마리아는 아들의 인격과 사업에 당신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온전히 바치셨다.

 

* 교회 헌장 66 항:

-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아들 예수 다음으로 모든 천사와 사람들 위에 들어 높임을 받으신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한 거룩한 천주의 어머니로서 교회의 특별한 예식으로 공경받으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복되신 동정녀는 오랜 역사를 통해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받고 공경 받았고 신도들은 온갖 위험과 아쉬움 중에 그의 보호 아래 도움을 청한다.

 

- “이제로부터 과연 만세가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니, 능하신 분이 큰 일을 내게 하셨음이로다”(루가 1, 48)하신 마리아의 예언대로 특히 에페소 공의회(431) 이후로 하느님 백성의 마리아 공경은 존경과 사랑과 기도와 모방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였다.

 

- 교회 안에 언제나 있었던 이같은 마리아 공경이 비록 온전히 독특한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된 하느님의 아들인 성자가 하느님 아버지 성부와 성령과 함께 받는 흠숭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그 흠숭에 오히려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 올바른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시대와 장소의 조건이나 신도들의 기질과 품성에 따라 교회가 인준한 성모 신심의 여러 형태는 성모 마리아가 공경을 받음으로써 성자가 올바로 이해되고, 사랑과 영광을 받으며 성자의 계명이 준수되도록 하는 것이다.

 

- 그것은 성부께서 성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골로 1, 15-16), “성자 안에 모든 충만함이 머물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골로 1, 19).

 

* 요한 바오로 2세, ‘구세주의 어머니’, 18항

- 십자가 밑에서 마리아는 믿음을 통하여 자신을 비우는 충격적인 신비에 참여한다. 이것은 아마도 인간 역사에 가장 심오한 자기를 비움(케노시스)일 것이다. 믿음을 통하여 당신 아들의 죽음, 구원을 이루어주는 죽음에 참여한 것이다.

 

 

3. 신학적 성찰 - 우리들의 어머니로서 육화된 마리아

 

죄의 어둠 속에서 살던 인간이 구원의 빛을 얻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원죄로 인하여 스스로 죽음을 갖도록 하는 인간이 구원의 기쁨을 느끼기까지는 하느님의 끊임없는 사랑과 희생을 필요로 한다. 이와같은 구원을 계획하고 준비하는데 인간의 철저한 희생과 봉헌도 필요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인간의 바로 처녀 마리아였다. 하느님의 천사 가브리엘은 처녀 마리아를 찾아가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신혼의 달콤한 꿈을 갖고자 했던 마리아에게 크나큰 죄인으로 낙인 받아야 할 아기의 잉태를 선언한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며 반박한다. 이어지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은 성령과 높으신 분의 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사실 그것이 거짓이기를 원했을 것이다. 천사의 말대로 이루어진다면, 약혼을 한 요셉을 어떻게 보며 부모 형제 친지앞에 어떻게 나설 것인가? 그것은 한 순간의 희생도 아니고, 곱게 자란 나의 인생이,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아름다운 꿈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이다. 과연 높으신 분께서는 나의 불행을 원하시는 것인가? 참으로 처녀 마리아에게는 아기 잉태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일 것이다.

 

지금 나에게 마리아와 같은 원초적인 삶의 아픔이 하느님의 뜻으로 닥쳐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자리에서 졸도하지는 않겠는가? 그것이 비록 인류구원을 위한 일이라 해도 인간적 삶의 모든 포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리아의 모습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사업의 위대함을 찾아 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마리아는 당연히 공경과 존경의 대상이라고 단정지어 생각한다면 그 분의 위대한 협력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당연한 결과라고 만 할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당신이 하느님의 구원 협력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마음의 결정을 하게 된다. 먼저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고 하느님의 응답에 대해 거부를 하였기에 천사는 다시금 말씀한다.

 

천사는 마리아의 사촌인 엘리사벳의 잉태사건을 말하면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며 대답한다. 처녀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한다는 소식에 대한 마리아의 이 대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느님의 계명에 순응하겠다는 단순한 열심에 대한 응답이겠는가? 그러한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 다른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제2의 창조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일찍이 인간 세계에서는 없었던 일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짐을 희망하며, 그것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완전히 죽이겠다는 용감한 고백이다. 엘리사벳은 아무리 늙었어도 남편은 있다. 남자를 모르는 몸으로 아기를 갖는다는 것은 혁명이고 크나큰 두려움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을 주님의 종으로써 종임을 고백하면서 이루어지는 희망하는 것이다. 인류 구원을 위해서 처녀 마리아는 이와같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수용해야 했으며 그 일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처녀인 마리아 자신은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했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봉헌하는 삶 속에 이미 그 분 안에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인류 구원을 위한 고통의 십자가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서 하느님의 구원사업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벌써 마리아의 태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만일 우리 자신이 좋을 때만 주님의 종이고, 힘들고 어려운 일에서는 자신의 고집을 버리지 못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있다면 닫힌 마음을 마리아의 겸손한 마음으로 바꾸어 놓아야 하겠다. 주님의 어머니,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신 마리아의 신앙은 바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적으로 결정적인 응답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신앙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수동적인 응답이 아니라 마리아처럼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의 능동적 응답이 필요한 것이다.

 

주님의 종이 되기 위한 삶의 살고자 하는 우리들은 성모의 달을 보내면서 특별히 마리아의 삶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가난과 겸손을 응답임을 생각해야 하겠다. 즉 우리는 마리아가 인간적 고뇌와 고통을 갖고도 과감하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듯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하느님께 응답을 해야 하겠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갖고 살면서 우리는 어느 땐 어려운 시련이, 아니 지금 이 자리에서 남모르게 괴로움을 갖고 있는 우리들 이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련의 아픔은 아마도 주님의 어머니가 되신 마리아보다는 크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어 어려움과 시련에서 우리들을 보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도 이 자리에서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잉태함으로써 구원사업의 협력자가 되었듯이 우리도 우리의 삶과 마음 속에서 주님이 새롭게 잉태할 수 있도록 자신을 포기하는 삶과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맞겨 드리도록 하여야 하겠다.

 

[인천가톨릭대학교 김일회 신부님께서 신학교 홈페이지 자료실에 올려주신 자료입니다.]



1,33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