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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71: 레이먼드 브라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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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2-15 ㅣ No.433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71) 레이먼드 브라운 (중)

요한복음, 선교보다 공동체 신앙 성숙에 초점 둬



요한 공동체

브라운은 「요한 공동체의 역사와 신학」(1979, 국내에는 개신교에서 「요한교회의 신앙과 역사」로 출간)에서 사랑받는 요한 공동체의 성장을 네 단계로 추측한다.

첫 단계에서는 예수님께 사랑받는 제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복음서 이전, 50~80년). 그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며 예수님의 초기 활동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이지만 열두 제자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는 요한 공동체의 창시자며 역사적 인물이고, 역사적 예수님과 요한 공동체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본다.

두 번째 단계는 복음서가 기록되던 때(90년경)로, 당시의 요한 공동체 삶의 정황을 알 수 있는 단계다. 요한 공동체가 사마리아인들과 반(anti)-성전적인 경향을 가진 그룹들을 받아들인 후 ‘유다인들’과의 갈등이 시작됐다. 공동체는 점차로 자신들이 불신자로 생각하는 ‘세상’, ‘유다인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들과 대립하는 입장을 취했다. ‘불신자들’과 소위 ‘숨은 그리스도인들’(crypto-Christians)은 유다인들로서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가졌으나 회당에 남아 있던 자들이다(요한 12,42-43). 그들은 야고보가 지도자로 있었던 ‘공교회’라고 불리는 그리스도인들로 여겨진다.

세 번째 단계는 요한의 편지들이 기록되던 때(100년경)로서, 요한의 폐쇄적인 공동체는 내적 분열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이 분열로 인해 요한복음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오게 되었다. 한 그룹은 소위 ‘공교회’를 향해 나아갔고 ‘반대자들’은 후에 가현적 영지주의로 알려진 방향으로 나아갔다.

네 번째 단계는 편지들이 기록된 이후, 요한 공동체 역사가 분열되고 와해된 단계다(1요한 2,19 참조). 이때 요한의 편지 배후에 있는 그룹은 공교회에 합병되었고, ‘반대자들’은 영지주의에 흡수되었다.

브라운의 갑작스러운 죽음(1998) 후에 사람들은 분명히 그가 무언가 작업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과연 그의 컴퓨터에는 요한복음에 대한 새로운 연구들이 저장돼 있었다. 그는 새로운 요한복음 주석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몰로니(Moloney)가 이것을 편집하여 나온 책이 바로 「요한복음 개론」(2003)이다. 브라운은 요한복음서의 풍부한 진가를 맛보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요한복음서 개론서를 준비했다고 한다.

브라운이 급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요한복음 개론」이 출간됐고, 이 책에는 그의 컴퓨터에 저장돼 있던 요한복음에 대한 새로운 연구들이 담겨 있다.


요한복음서 구성 단계

브라운은 첫 번째 요한복음 주석서에서(1966) 복음서 구성을 다섯 단계로 보았으나, 새 개론서에서는 세 단계로 재배열했다. 첫 번째 단계는 예수님의 활동과 제자들이 있었을 것이고, 열두 제자는 아니나 예수님의 제자인 사랑받는 제자가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예수님께 사랑받는 제자가 공동체 역사를 형성했을 것이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사랑받는 제자들의 제자들이 복음사가와 편집자로 활동한 시기이다. 이 이론들은 복음서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에 대한 브라운의 가설적인 대답이다. 복음서 구성에 대한 이론을 설명하면서 브라운은 주석가가 근본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에 대해서 다음 사항을 기억할 것을 요청한다. “현 형태의 복음서는 전체적으로 통일된 문서로 간주하고 연구해야 한다.” 이것은 그가 역사 비평 방법으로 성경을 주석했지만, 생의 끝에 가서는 성경 본문 자체에서 메시지를 끌어내는 방법(내러티브 방법)도 새롭게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복음사가, 편집자

요한복음 21장 24절은 저자를 예수님께서 사랑받는 제자로 기술한다. 고대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바로 요한(대부분 제베대오의 아들로 추정)이며, 복음서의 저자로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 비평의 연구는 그가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이 아니라고 본다. 브라운에 의하면, 그는 비록 이름이 알려지지도 않고 중요하지 않은 위치에 있었던 제자였으나, 그의 삶을 통하여 그리고 예수에 대한 사랑과 지식으로 요한 공동체의 발전을 구현했기에 이상화됐다고 본다.

사랑받는 제자는 요한복음서에 통합된 기본 증언에 책임이 있는 목격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기록된 복음서를 구성(복음사가)하고 편집(편집자)하는 데 책임이 있는 이다. 복음사가는 물려받은 자료를 적극적인 가르침으로 변경했다(특히 유다교의 축제와 제의에 대해). 그는 무엇보다도 믿음의 다양한 반응을 묘사하기 위해 예수님과 여러 인물과의 만남의 장면을 구성했던 뛰어난 극작가였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록할 때 그 자신이 파라클레토스-성령의 지속적인 활동을 구체화한 것으로 이해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간 후에도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에게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심을 알려주신다는 가르침이다.


영지주의와의 관계

브라운은 요한 전승에 끼친 영향들과 배경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연구한 후에, 요한복음서에 대한 영지주의나 성경 외의 헬라적 사상(필로)의 영향을 부정했다. 불트만 이후로 요한복음이 영지주의를 반박하기 위해서 쓰였다고 생각했으나, 브라운은 복음서가 영지주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요한 공동체가 분열됨에 따라 공동체의 몇몇 구성원들이 영지주의에 빠져들어간 것이라고 본다. 즉 영지주의가 요한복음서 형성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영지주의가 복음서를 수용한 것이다(영지주의는 기원후 2세기에 가서야 발전된 체계로 등장한다). 그리고 요한복음서가 보다 폭넓은 전통적 유다교, 즉 구약성경, 유다 관행, 그리고 당시의 유다 사상 세계의 산물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쿰란 문서의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사용하는 팔레스타인 유다인들이 요한복음과 유사한 용어와 사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목적

요한복음의 새 개론서가 제공한 가장 중요한 공헌 중의 하나는 복음서의 목적을 논하면서 변증의 암시들을 추적한 점이다. 브라운은 몇 가지 변증적인 측면이 복음서의 목적이라고 보기보다는 복음서가 발전된 상황과 관련이 있다고 통찰했다. 그 중 ‘유다인들’이라는 용어는 브라운이 가장 관심을 보인 주제다. 그는 ‘유다인들’을 그 이야기에서 예수님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유다인들과 동일시한다.

브라운은 복음서 이야기에서 그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요한복음서의 목적은 그리스도인 이방인과 유다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다(요한 20,31 참조). 복음서는 믿지 않는 이들의 개종보다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 발생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중점을 둔다. 복음서는 실현된 종말론을 강조하며 신자들은 이미 영생을 얻었고, 하느님의 자녀이며 어둠보다는 빛을 선택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심판을 견디어 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이끈다. 세례와 성찬례에 관한 것은 전례를 통해서 지상의 예수님과 친교를 나누는 감동을 주려는 것이다.

성령을 파라클레토스(보호자)라고 부르는 것은 목격자의 시대가 지나갔지만, 예수님과의 관계까지 상실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신자들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파라클레토스-성령은 그리스도인들 안에 있는 예수님 현존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서가 선교 문서였다는 증거는 많지 않지만, 믿음을 성숙하게 이끌고자 하는 요한의 목적은 또한 다른 사람들이 믿음의 행동을 하도록 인도한다는 역할도 한다(요한 17,22-23).


참고

영지주의(靈知主義 , Gnosticism)=고대에 존재했던 교파 중 하나로 기원 후 1~3세기에 활발히 전개. 정통 교리는 구원이 믿음(신앙, faith)을 통해 가능하다는 견해에 반해 영지주의는 구원이 앎(gnosis)을 통해 가능하다는 견해를 주장했다.

불트만(Bultman Rudolf, 1884~1976, 독일 신학자)=역사적 신학 연구과 더불어 복음서의 사료 이전의 여러 문서의 전승·성립 과정을 명확히 했다. 성경의 실존주의적 해석에 기초해 비신화화를 주장했다.

파라클레토스(parakletos)=헬라어에서 유래, 보호 · 중재 · 위로자 등으로 번역.

[평화신문, 2014년 12월 14일, 
이혜자 수녀(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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