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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신학ㅣ교부학

[교부]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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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30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1. 생애

 

뽈리까르뽀는 스미르나의 주교로서 초대교회 때부터 큰 존경을 받아오고 있다. 그는 사도요한에게 직접 배웠고 그로부터 주교 임명을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사도적 권위를 지니며 사도교부(使徒敎父)로 불리운다. 사도교부들이란 1세기와 2세기 초의 교부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12사도 또 그 목격자들로 부터 직접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을 말한다. 따라서 사도교부들의 가르침과 주장은 사도들 다음으로 중요한 의미와 권위를 지닌다. 우리는 이미 로마의 끌레멘스와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주교 등을 살펴보았는데 이들이 사도교부들에 속하는 분들이다.

 

뽈리가르뽀 주교에 관한 역사적 증언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그의 순교록에 의하면 86세 되던해에 화형을 받아 순교하였는데 순교 연도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156년 경으로 보고있다. 110년에 순교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가 남긴 일곱 서간 중에 마네시아, 에페소 두 서간에 뽈리까르뽀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을 뿐 아니라 특히 이냐시오가 스미르나 교회와 뽈리까르뽀 주교 개인에게 각각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은 두 주교 사이의 친분관계를 알 수 있으며 뽈리까르뽀 주교가 당시 교회에 얼마나 비중있는 인물이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가 110년에 이미 주교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50년 이상 주교직에 재직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순교 직전 155년에 로마를 방문하여 아니체뚜스 교황(+166)을 만나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에 차이가 있던 부활절 경축 날짜에 대해 논의 하였으며, 조직적인 영지주의자로서 당시 교회를 괴롭히던 마르치온에게 "나는 네가 확실히 사탄의 맏자식임을 알고있다"는 말로써 단죄하였다. 교회는 그의 축일을 2월 23일에 지낸다.

 

 

2. 저서

 

2.1. 필립비 서간

 

14장으로 되어있는 [필립비 서간]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뽈리까르뽀의 작품이다. 이것은 뽈리까르뽀가 필립비 교회의 편지에 대한 답장인데, 필립비 신자들은 뽈리까르뽀에게 이냐시오의 서간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였었다. 이냐시오의 편지들을 보내면서 이기회에 뽈리까르뽀는 목자로서 정통교리와 교계의 가르침을 성실히 따르고 애덕을 실천할 것을 권고한다.

 

그런데 이 서간은 내용상 저술연대에 문제점이 있다. 제 13장에서 이냐시오의 편지들을 보내겠다고 하면서 이냐시오의 순교에 대해 알고 있는 점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냐시오가 순교한 110년을 염두에 두고 있는것이 확실한 반면 제 7장에 언급되어 있는, 이단 문제 특히 [사탄의 맏자식]이란 표현은 130년대에 활약하던 마르치온을 염두에 두고 있어, 두 연대 사이에 20년간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시대적 차이에 대해 학자들은 이 서간이 하나의 서간이 아니라 두 개의 서간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제 13.14장은 이냐시오가 순교한 110년 경에 쓰여진 첫째 서간이고, 제 1-12장은 130년 이 후에 쓰여진 둘 째 서간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제 1서간이 제 2서간으로 전해진 경우이다. 이러한 착오는 양피지로 되어있는 고대 문헌이 유통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착오이다.

 

2.2. 순교록과 성인 공경

 

171년 이 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뽈리까르뽀의 [순교록]은 뽈리까르뽀 주교의 영웅적인 모습을 알리기 위해 스미르나 교회가 필로멜리움 교회에 보낸 서간 형식으로 되어 있다. 공공 경기장에서 여러 순교자에 대한 처형이 있은 다음,끝으로 뽈리까르뽀 주교의 차례가 되자 스다씨우스 과드라뚜스 총독은 주교에게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살려주겠다고 휴혹하였다. 그는 "내가 86세가 되도록 섬겨온 그분은 나의 왕이며 구세주이시고 또 나를 조금도 해치지 않으신 그분이신데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는가!"하며 거부하였다. 경기가 이미 끝난 뒤라 총독이 그를 화형에 처하도록 명령하자, 군중은 장작더미를 쌓아 올리기 시작하였다. 포졸들은 그가 뜨거워 요동을 칠까봐 못질을 하려하자, 노(老)주교는 "염려말게. 이 불을 견딜힘을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못박지 않아도 장작불 속에서 버티어 낼 힘을 나에게 주시리라"고 안심시키고 당당히 순교하였다.

 

한편 우리는 순교록 18,2-3에서 성인들의 유해 공경의 기원과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후에 그분의 뼈를 모아드렸는데 이 뼈들은 우리에게 값진 보석보다 더 귀하며 금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적당한 장소에 그 뼈들을 안장하였다. 주님은 우리가 가능한 한 빨리 경건한 마음과 기쁨으로 함께 모여 순교자의 탄일을 경축할 것을 허락하실것이니 이는 먼저 싸운 이들을 기념하고 후에 싸울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위해서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미르나의 신도들이 순교한 주교의 유해를 안장했다는 도의적인 차원을 넘어, 순교자에 대한 공경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신도들이 성인의 유해(遺骸)가 모셔진 곳에 모여 기도하는 것은, 앞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을 기리며, 어느날 갑자기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해야 할 날이 자기 자신들에게 닥치더라도 선배 순교자들의 용기를 본받고 순교의 고통을 이겨 낼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하느님께 기도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초대 교회부터 순교자들의 유해가 모셔진 곳 특히 까다꼼바와 같은 곳에 신도들이 모여 기도하는 관습이 생겨났으며,박해가 끝난 시대에는 순교자들의 유해가 있는 곳 위에 성당을 짓는 관습이 생겨났다. 이 [순교록]은 성인들의 공경을 거북하게 여기는 프로테스탄트 형제들에게 역사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형우 신부님, 대구 대신학원 강의록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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