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수도 ㅣ 봉헌생활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성 바오로 딸 수녀회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2-13 ㅣ No.46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성 바오로 딸 수녀회 (상)

 

 

성 바오로 딸 수도회는 알베리오네 신부가 사회 홍보 수단을 이용한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설립했다. 원내는 알베리오네 신부.

 

 

창설자와 역사

 

성 바오로 딸 수도회는 알베리오네(Giacomo Alberione, 1884-1971) 신부가 사회 홍보 수단을 이용한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1915년 6월 15일 테클라 메를로(T. Merlo, 1894-1964) 수녀와 협력해 이탈리아 알바시에 설립한 활동 수녀회이다.

 

1884년 4월 4일 이탈리아 구네오주 포싸노의 성 로렌조의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난 알베리오네 신부는 어려서부터 사제의 길을 꿈꿔오다가 1890년 브라에 있는 소신학교에 입학한다. 이곳에서는 그는 별로 나쁜 것이라는 생각 없이 친구들에게서 빌려 읽은 책에 좋지 않은 영향을 받고 학교를 중단하게 된다. 그로부터 알베리오네 신부는 사회 홍보 수단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몸소 체험하게 됐다.

 

그후 알바의 신학교에 다시 입학한 그는 1900년 12월 31일 4시간의 성체 조배를 통해 큰 빛을 얻고 『주님과 새로운 세기의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수행하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의무를 절감한다.

 

당시 시대는 새로운 홍보수단으로서의 인쇄매체를 통해 교회 정신을 거스르는 경향이 급속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에 알베리오네 신부는 자신의 체험과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해 대중 속에 홍보 매체를 통해 복음을 선포해야 할 사명감을 갖게 된다.

 

1907년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알바신학교에서 영적 지도와 교수 생활을 하기 시작했고 1913년 알바 교구의 주간지인 「가제타 알바」의 편집 책임을 맡게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인식한 그는 다음해인 1914년 8월 20일 성 바오로 수도회의 전신인 「작은 노동자」인쇄 학교를 설립했다.

 

교회 내 여성들의 사도직 참여에 대한 열정을 높이 평가하던 그는 이어 1915년 6월 15일 인쇄 학교 인근에 「여성 작업실」을 마련했다.

 

바로 이때 알베리오네 신부는 당시 21세의 재봉 교사이자 교리 교사였던 데레사 메를로를 만나고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다. 데레사 메를로는 1894년 2월 20일 이탈리아 북부에서 탄생했다.

 

그녀는 현대 문명의 이기를 이용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실천하려는 알베리오네 신부의 뜻을 가장 깊이 꿰뚫은 최초의 여성으로 뜨거운 사명감으로 사회 홍보 수단을 통한 복음 선포에 평생을 바치고 1964년 2월 5일 선종했다.

 

수도생활에 대한 열정을 가슴에 품고 있던 데레사는 알베리오네 신부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 이곳에서 젊은 여성들에게 재봉 기술과 교리를 가르치고 서원을 개원해 인쇄학교에서 제작된 책을 보급하고 성물들을 판매했다.

 

이어 1918년 12월 이탈리아 토리노로 진출해 교구 주간지를 발행함으로써 고유의 사도직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이 공동체를 부르는 명칭이 따로 없었으나 주위 사람들이 성 바오로 사도에 대한 신심이 두텁다는 것을 알고 「바오로 딸」로 부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1922년 7월 22일 9명의 회원이 첫 종신서원을 했고 데레사 메를로는 테클라라는 수도명으로 초대 총장으로 임명됐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이제 바오로 딸 수도회가 독립된 수도회로서의 면모를 갖췄음을 파악하고 1924년 2월 같은 영성 안에서 기도생활로써 사회 홍보를 위한 사도직을 돕는 관상 수도회 「스승 예수의 제자 수녀회」를 설립했고 1938년 10월에는 본당 사목을 돕는 「선학 목자 예수 수녀회」를 설립했다. 그 후에도 주간지, 라디오, 영화 등 새롭게 나타나는 첨단 매체들을 이용해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주력했던 알베리오네 신부는 여러 수도회를 창립하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했으며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1971년 11월26일 선종한 그는 현재 시복 조사 중이다. [가톨릭신문, 2002년 6월 30일, 박영호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성바오로 딸 수녀회 (하)

 

 

바오로딸은 스승 그리스도를 사회 홍보수단을 통해 전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영성과 사도직 활동

 

바오로딸 수도회의 고유한 정신은 한마디로 「바오로적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끊임없는 복음 선포의 길을 걸었던 바오로 사도와 같이 바오로 딸의 회원들은 오늘도 세상을 향해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바오로딸은 사도 성 바오로처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스승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살며, 그 복음 서적·음반·영화·방송 그리고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인간 문명의 총아인 사회 홍보수단을 통해 전한다.

 

왕성한 집필가이며 설교가였던 사도 성 바오로의 영성적 특징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갈라 2, 20)는 것이며 이 그리스도란 「길·진리·생명이신 스승 예수 그리스도」(요한 14, 6)이시다. 이 영성을 성 바오로의 사목적, 보편적, 사도직 정신에 따른 미사와 묵상, 성체방문 등을 통해 믿어야 할 진리, 따라야 할 길, 살아야 할 생명이신 예수를 만나고 배우며 전한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며 세상에 그리스도를 주신 첫 사도로서, 모든 사도들의 인도자이신 사도의 모후 분위기 안에서 성장해 나간다.

 

바오로딸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60년 당시 명수대본당(현 흑석동본당) 주임 이경재 신부의 요청에서 비롯된다. 이신부는 사회홍보수단을 통한 복음 선포라는 사도직 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테클라 수녀에게 수 차례 한국 진출을 요청했으나, 당시로서는 회원이 부족해 일본 관구가 성장할 때까지 파견이 보류됐다. 1960년 12월 12일 비로소 일본 관구에서 3명의 수녀가 파견됐고, 2년 후 명수대본당에서 현재의 서울 강북구 미아9동으로 수녀원을 이전했다. 이에 앞서 1961년 충무로에 성바오로 서원을 개원하고 1962년 3월에는 「성바오로 출판사」를 성바오로 수도회와 공동으로 등록하고 최초로 「가정의 복음서」(현 합본 복음서)를 출간했다.

 

12월 미아리로 이전 후 종로 성바오로 서원을 개원하고 2년 후인 1964년에는 일본에서 제본(製本) 기술자 수녀가 임시로 파견되면서 출판 사도직이 활기를 띠게 된다.

 

초창기 연 3종 가량 출간에 그쳤던 성바오로 출판사는 이내 다양한 종류의 서적들을 활발하게 간행하기 시작했고 서원들이 전국에 속속 들어서면서 교회의 출판문화가 활성화되는데 크게 기여한다.

 

1967년부터는 서원뿐만 아니라 타 서점을 통해서도 책을 보급하기 시작했다.1969년 처음으로 레코드 「엄마께 드리자」를 제작한데 이어 1974년 12월에는 본원 내에 「시청각 교리교재 연구소」를 설립해 첫 카세트 테이프 「세상에 외치고 싶어」를 제작했다. 이어 영화필름(1975), 슬라이드(1979), 비디오 테이프(1984) 그리고 CD(1990)를 제작 보급하기 시작했다. 1978년에는 「시청각 통신성서 교육부」를 설치해 「신구약 성서 입문과정」(1979), 「바오로 영성 사상 과정」(1984), 「신구약 성서 중급과정」(1985)을 차례로 개설했고, 각 교구 홍보국에 회원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방송 사도직에도 활발하게 참여해 1981년 2월에는 필리핀 라디오 베리따스 한국어 방송(1991년 1월 중단)에 2명의 수녀를 파견한데 이어 1989년 평화방송 라디오국, 1994년 12월 CATV에도 회원을 파견했고 1995년 3월 자체 TV 제작 스튜디오에서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1994년 3월에는 성서 묵상 월간지인 「야곱의 우물」을 창간했고, 같은 달 31일에는 「성 바오로 출판사」에서 분리 · 독립해 「바오로딸」로 출판사 등록을 했으며, 1996년에는 대중 문서 선교 강화를 위해 「열린」 출판사로 새로 등록했다.

 

사회 홍보수단의 발전과 함께 컴퓨터 통신이 새로운 선교 수단으로 부각되자 1993년 BBS(사설전자게시판)을 구축해 컴퓨터 통신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고, 인터넷의 발전에 따라 홈페이지를 개설해 하이텔에 「가톨릭 정보」를 제공했다.

 

「인터넷의 바다」에 뛰어든 바오로딸은 정보의 보고로서 인터넷과 사이버 세계를 복음화하는데 큰 힘을 기울이고 있다. 1980년 최초로 2명을 이탈리아로 파견한 바오로딸은 1981년 11월 1일 관구 승격 후 회원수가 더욱 증가해 10여년만인 1992년 파키스탄에 1명, 대만에 2명, 그리고 이듬해에는 러시아에도 1명을 파견했다. 테클라 수녀의 탄생 100주년인 1994년 1월 「선교 계획」을 발표한 바오로딸은 그 해 마카오에 2명, 1996년 3월에는 중국 연길에 3명을 파견했다. [가톨릭신문, 2002년 7월 7일, 박영호 기자]



1,03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