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수도 ㅣ 봉헌생활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작은 형제회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2-12 ㅣ No.30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작은 형제회 (상)

 

 

프란치스코 영성과 수도회 창립

 

1200년경 교회는 분열된 조직과 단체들이 산재하면서 일치를 이루지 못했다. 이 때 기존의 교회 내에 존재하고 있던 수도회와 함께 순례하면서 복음을 전하던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수도회들이 생겨났지만 대다수의 수도회는 짧은 기간 존재하다가 소멸됐다. 그러나 이 때문에 당시 교회에는 새로운 수도회의 생성과 함께 다양한 종교적 생각과 그리스도교회를 반대하는 종파들이 생겨나게 됐다.

 

분열과 혼탁함이 내재돼 있던 당시 교회를 정화시킨 사람. 바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이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던 프란치스코는 부유함과 쾌락을 즐기던 부류의 사람이었으나 꿈속에서 체험한 하느님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형제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교회 안에서 교회의 사명을 실천해갔다.

 

1209년 교황 인노첸시오로부터 공동체의 생활양식을 구두로 인준받고 1221년 호노리오 3세에 의해 창립된 프란치스코회는 어떤 사업이나 고유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복음을 삶으로써 스스로 복음화되고 또 형제들을 복음화 시켜갔다.

 

프란치스코의 영성은 앞서 언급한 복음적 삶과 선교, 그리고 작음과 형제애의 영성이라 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과 형제들의 삶을 '순종하며 소유없이 정결하게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2회칙 1,1)으로 제시하며 당시 일반화되어 있던 정주적(定住的)인 수도승의 양식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과 사도들처럼 일정한 거주지 없이 순회하며 설교하는 생활을 수도생활의 기본으로 삼았다.

 

아울러 프란치스코는 성직자 중심의 수도생활 양식과 수도자 중심의 생활양식을 벗어나 귀족, 평민 모두에게 수도생활을 개방했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여자들을 위한 프란치스칸적인 공동체(성 글라라 수녀회)를 창설하였고 평신도들의 프란치스칸적인 생활을 위해 제3회를 창설, 평신도들의 수도생활을 도왔다.

 

프란치스칸의 거룩한 복음을 따르는 생활은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한 생활이다. 그는 자신과 초기 형제들이 선택한 생활양식을 교황 성하로부터 인준받으려고 노력했다.

 

프란치스코는 당시 교회에 반기를 들며 교회 없는 삶의 구조를 추구하는 복음적 운동들의 오류를 깊이 인식하며 그 근본적인 이유를 교회 안에서 삶을 택하지 않은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주 형제들이 교회와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최대한의 존경과 사랑을 드리라고 명했으며, 입회의 조건에 있어서도 '가톨릭 신앙과 교회의 성사'에 대한 시험을 전제로 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는 어떤 속화되고 불쌍한 사제를 만난다해도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라고도 가르쳤다. 그래서 그는 회칙의 마지막 부분에서 '형제들은 거룩한 교회의 발 아래 항상 매여 순종함으로, 가톨릭 믿음의 기초 위에 굳건히 서서 우리가 굳게 서약한 가난과 겸손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도록 합시다'라고 선언했다.

 

교회 안에서 교회의 사명에 이바지하도록 불림 받은 작은 형제들은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인 선교에 앞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작은 형제들의 선교 역사에 있어서 교회사적으로 의의를 갖는 것은 당시 그리스도교와 가장 적대적이었던 이슬람교도들을 한 형제로 받아들이고 홀몸으로 동방으로 건너가 이슬람의 술탄을 만나 평화와 화해의 정신을 전한 것이다. 그 후 지금까지 성지 이스라엘은 작은 형제들의 배타적인 선교지로 사도좌는 인정하고 있고, 회교도들도 작은 형제들만을 로마교회의 공식적인 대표자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같은 스승의 선교 모범은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와 그리스도교들에게 프란치스카니즘을 심어왔고 또 오늘날에도 아프리카, 러시아, 중국, 태국 등지의 선교를 활성화하고 있다.

 

프란치스코회의 공식 명칭은 작은 형제회다. 프란치스칸 영성을 요약해주는 말로서 작음과 형제애를 바탕으로 복음적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이 「작음」의 정신은 가난과 겸손이라는 덕목을 포함하고 있어 작은 형제들은 가난하시고 겸손하신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의 삶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소외된 이들과 하나가 되며 그들로부터 복음화되고 복음화시키는 것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인식하고 있다. 또 가난한 자들처럼 일과 노동을 통해 땀흘려 일하고 소박하고 단순한 생활을 영위하며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처럼 하느님께 신뢰하며 복음적 불안정의 삶을 살아간다.

 

프란치스칸들은 이와 함께 어머니가 자식을 기르고 돌보는 이상으로 형제들 상호간에 기르고 돌보는 정신을 자연과 우주 만물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시켜 가고 있다. 바로 이 우주적인 형제애, 만인의 형제가 되는 것이 프란치스칸의 형제애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은 프란치스칸의 정신은 작은 형제회를 비롯해 1517년 분리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와 1528년 분리된 카푸친 프란치스코회가 이어가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6월 3일, 주정아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작은 형제회 (중)

 

 

- 1965년 서울 수도원 축복식 장면.

 

 

한국 진출과 발자취

 

프란치스코 성인 생존 때부터 시작된 작은형제회의 해외선교는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선교로 이어져 한국까지 진출하게됐다. 1245년 중국에 발을 들여놓은 프란치스칸들은 1650년 조선선교계획을 시도했으나 조선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수도회의 공식적인 한국진출은 1937년 이뤄졌지만 한국과의 접촉은 이미 한국 최초의 신자인 이승훈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1784년 중국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이승훈에게 세례를 준 그라몽 신부는 예수회 회원이었던 것이다. 또 한국교회 안에 프란치스코회가 설립되기 이전에 한국인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이 먼저 배출됐다. 1921년 미국에서 유학 중이었던 고(故) 장면(요한) 박사와 장발(루도비꼬) 선생이 미국에서 재속형제회에 입회, 수도서약을 한 이후 한국에 들어와 프란치스코회를 소개한 바 있다. 평신도에 의해 한국교회가 설립된 것과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코 영성 또한 수도자가 아닌 재속회원에 의해 먼저 알려진 것이다.

 

이후 수도회의 한국진출이 본격화된 것은 1928년 캐나다 성 요셉 관구 형제들이 한국 교구 사제들의 피정을 지도하면서부터였다. 이를 계기로 서울과 대구교구에서는 프란치스코회의 피정 지도를 계속 요청했고 새로운 사목지를 찾고 있던 캐나다 성 요셉 관구는 일본에 이어 조선진출을 시도하게 됐다.

 

1937년 대전에 수도회 설립을 허락받은 프란치스칸들은 캐나다 관구 소속 도 요한겧 쥐스땡 형제 2명을 한국으로 파견, 한국 작은형제회 수도생활의 기틀을 마련하게 됐다. 이듬해 대전 목동에 「천사들의 성 마리아 수도원」을 개원한 선교사들은 기도와 학문, 전례, 다양한 노동활동을 강조하며 한국인 수도자들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2차 대전의 발발로 4 명의 캐나다 형제들은 전쟁 포로로 연행됐고 수도원이 폐쇄되는 위기를 맞았다. 4년간 옥고를 치룬 프란치스칸들은 45년 해방이 되면서 다시 대전 수도원으로 돌아와 수도생활의 터전을 복구하고자 노력했다. 이런 노력도 잠시, 6?5 발발로 한국에서의 프란치스칸들의 활동은 중단됐다.

 

그러나 이때 선교사들은 방인 형제들을 배출하기 위해 캐나다로 한국 형제들을 데리고 가 수도자를 양성했고, 캐나다 관구에서 양성된 방인 형제들은 훗날 한국 관구의 초석을 이뤘다.

 

1957년 교황청으로부터 정식으로 인준을 받고 다시 수련을 시작한 작은형제회는 이듬해 꼰스탄시오 쥬뽀니 신부가 진주 근처에 있는 나환자 공동체 가족 20명에게 세례를 주면서 나환자를 위한 사도직 활동을 처음으로 시작하게 됐다. 65년에서야 한국의 중심인 서울 정동에 수도원을 설립했고 이를 기점으로 한국 프란치스칸 체제는 진일보하게 됐다.

 

서울에 수도원을 세운 작은형제회는 71년 성북동에 신학원을 설립해 수도자 양성에 힘을 기울여왔으며 전국적으로 활동범위를 넓혀갔다. 캐나다 관구 형제들의 선교에 이어 이탈리아, 스페인, 멕시코 관구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프란치스칸의 한국선교는 활발했으며 작은형제회 수도공동체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한국지부였던 작은형제회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며 69년 프란치스코회 한국 총장대리구에서 자치 독립의 한국 준관구로 승격됐고, 87년 12월 10일에는 한국진출 50주년을 기해 로마 총본부로부터 「한국 순교성인 관구」로 인가를 받았다. 한국 안에서 프란치스칸의 영성을 전파하며 성장한 작은형제회는 스승의 모범을 따라 빈민, 나환우, 사회복지 등 소외된 이들을 위한 사도직활동을 확대시켜갔고, 선교의 정신을 이어 본당사목, 해외선교도 활성화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6월 10일, 이진아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작은 형제회 (하)

 

 

- 작은형제회 종신서원 모습.

 

 

작은 형제회의 '작음'(minoritas)과 '형제애'(fraternitas)의 영성은 가난과 겸손을 실천하고 사랑과 순종을 형제들에게 베푸는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형제들은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길 자청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일치를 이루면서 복음과 형제적인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작은 형제회의 사도직 활동은 크게 사회복지, 국내외 선교활동을 포함한 복음화, 교육, 특수사도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회복지활동은 나환우들을 위한 시설인 경남 산청 성심원에서부터 시작된다. 성심원은 1959년 이탈리아 작은형제회 콘스탄시오 쥬뽀니 신부가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나환우들을 치료하고 보호하기 위해 설립한 것. 60여명의 환우들이 쥬뽀니 신부와 함께 공동체를 이룬 성심원은 오스트리아와 교황청의 원조로 병원과 성당을 짓고 자녀들을 위한 보육소, 초등학교, 국수공장과 신협 등 부대시설을 갖추면서 하나의 부락을 형성, 자체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공동체로 운영되고 있다. 이와 아울러 작은형제회는 78년부터 행려자들을 위한 빈민식당인 서울 용산의 '베들레헴의 집'을 운영해 왔으며, 88년부터는 서울 제기동에서도 빈민식당인 '프란치스꼬의 집'을 운영해오고 있다.

 

노인복지에도 힘을 기울여온 작은형제회는 92년 진주 하대동에 노인요양원을 설립했고 98년 전남 장성에 '프란치스꼬의 집'을 신축했다. 특히 전남 장성의 '프란치스꼬의 집'은 노인종합복지센터로서 요양시설과 재가시설을 지역사회에 개방해 지역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작은형제회는 이같은 사회복지활동과 함께 복음화를 실천하기 위해 95년 순회공동체를 설립,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찾아다니며 공동체를 형성해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특히 교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농어촌이나 공소를 찾아다녔던 이들은 보길도와 동강지역에 순회공동체를 형성해 프란치스칸 삶을 증거하고 노화된 공소를 활성화시켜왔다.

 

복음화를 위한 이들의 노력은 이밖에도 인천, 수원, 대전 등지에서의 본당선교와 이스라엘과 러시아, 중국, 일본, 카자흐스탄 등 해외선교를 통해서도 실천되고 있다.

 

또 작은형제회는 혼인사목과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운영 등의 특수사도직과 수도자들의 교육을 위한 수도자 신학원 및 프란치스칸 영성학교, 프란치스칸 사상 연구소 운영 등의 교육사도직을 수행하면서 프란치스칸의 영성을 전파하고 있다.

 

프란치스칸 영성을 한국교회에 널리 알리는 데에는 이같은 수도회의 다양한 활동과 아울러 많은 재속회원들의 기도와 봉사를 빼놓을 수 없다.

 

8백년 동안 수천만에 이른 프란치스칸 가족은 프란치스코 남자수도회(1회)와 관상수녀회인 글라라회(2회), 수도생활을 하는 수도3회와 재속프란치스코회(3회)로 구성돼 있으며, 한국의 재속프란치스코회는 우리 교회 안에 수도회보다 먼저 존재했다.

 

재속프란치스코회는 1978년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새 회칙을 인가받으면서 붙여진 이름으로서 전세계 모든 평신도와 사제들에게 개방돼 있다.

 

제3회가 배출한 성인으로는 성 루도비꼬, 성 토마스 모어, 성 요한 비안네, 성녀 엘리사벳 등 60여명이 있으며, 그레고리오 9세부터 바오로 6세까지 20여명의 교황과 단테, 미켈란젤로, 라파엘, 빈첸시오 아 바울로회 창설자 프레데릭 오자남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들이 각계 각층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범을 따라 살았다.

 

한국의 재속회원은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 가운데 이미 있었다.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박해로 순교한 이들 가운데 3명의 조선인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제3회의 역사는 여기서부터 비롯되며 국내에서 활동이 시작된 것은 미국서 재속회원으로 서약했던 장면, 장발 형제의 활동에 의해서다. 국내에 돌아와 서울 혜화동 신자들을 중심으로 서울 형제회를 구성했으며 교구 안에서도 중추적인 활동을 해왔다.

 

이와 함께 오기선 (1907∼1900) 신부와 6?5 순교자인 이광재(1909∼1950) 신부가 한국 사제로는 처음으로 재속 3회에 입회해 프란치스칸을 증거해 왔다. 1939년 서울 형제회가 정규형제회로 발족됐고 이어 대전 형제회가 설립되면서 재속회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1960년대 전후를 계기로 전국에서 많은 재속 형제회가 창설됐으며 62년에는 전국의 형제회를 총괄하는 한국연합회가 설립됐다.

 

작은형제회와 함께 성장해온 재속회는 73년 형제들의 물질적인 보조와 상호간 봉사를 원활히 하기 위해 '형제신용협동조합'을 창설했고, 74년에는 서울 청장년 형제회를 발족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지속해왔다.

 

초대 장상인 아뽈리나리스 신부부터 이종한, 유수일 신부, 그리고 현재 관구장인 김찬선 신부에 이르기까지 118명(99년 현재)의 작은 형제들은 수많은 한국의 재속 회원들과 함께 스승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라 이 땅의 빛과 소금이 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6월 17일, 이진아 기자]



1,03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