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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7: 중세 교회의 부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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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5 ㅣ No.161

[새로 보는 교회사 7] 중세 교회의 부흥기

 

 

카톨링가(家) 제국 교회(751-814년)

 

8세기의 로마 교황들은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를 겪었다. 725년부터 842년 사이에 격렬하게 벌어진 ‘성화상 논쟁’을 빌미로 동로마(비잔틴) 제국 황제는 로마 교황을 자신의 정치 권력 아래 묶어 두기 위한 방법을 찾았으며, 롱고바르디족은 영토를 확장하려고 끊임없이 로마를 위협하였고, 남쪽에서는 사라센이 이탈리아 반도를 위협하였다. 이렇듯 정치 · 군사력의 부재로 로마 교황청은 아주 위험한 지경에 빠져 있었다.

 

로마를 이 모든 위험에서 구하고 정치적인 안정을 누리도록 한 나라가 바로 프랑크 왕국이다. 751년에 프랑크 분국인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정 대신 피핀이 자카리아 교황의 동의를 얻어 프랑크 왕국의 왕위에 오르면서 교황청은 외부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됨은 물론 나아가 교황령 국가를 형성하였다. 또한 800년 성탄절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피핀의 아들 칼 대제(샤를 마뉴)는 영토 확장과 함께 교회 조직을 정비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따라서 피핀이 왕위에 오른 751년부터 샤를 대제가 사망한 814년까지를 중세 교회가 새롭게 도약하는 준비 기간이며 정리 기간이라 할 수 있고, 로마 교황이 서방 교회 우두머리가 되는 기초가 마련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교회 정비와 선교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 사람들이 바로 수도원 사람들이다. 정치 상황이 복잡하고 흥미로운 때이지만 여기서는 수도원의 활약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프랑크 왕국의 수도원

 

메로빙가(486-751년) 시대의 수도원 형성은 ‘고대 갈리아’(Vetus Gallica)라는 고르비에 수도원의 규정집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 규정집은 초대 교회 수도원 대부들의 훈령과 주교들의 권한과 일반 가정에서 생활하는 동정녀 과부들의 생활과 수도원의 규칙을 모은 것으로서, 여러 공의회 결정 사항도 들어 있다. 물론 이런 수도원은 모두 필사실을 운영하였는데, 후대 문화 계승에 크게 이바지하기도 했다. 이렇듯 이미 프랑크 왕국에는 아일랜드계 수도자들이 세운 여러 수도원이 있었고, 이 수도원은 왕과 귀족의 협력으로 확장되어 갔다. 수도자들은 수도 생활뿐만 아니라 이교도한테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의 몫도 해냈는데, 사도적 생활 개념이 수도원에 새로운 역할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다가 차츰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을 따르는 경향이 생기면서 베네딕도 성인과 스콜라스티카 성녀에 대한 공경이 퍼졌고, 두 성인 성녀의 규칙을 더 많이 수용하게 된다.

 

 

앵글로 색슨족 수도자들의 활약

 

8세기 이전 유럽의 모든 교회는 국가 형태의 교회를 형성하고 있어, 왕국과 수도원이 중심이 된 교회 관습이 형성되고 로마와 연관 없는 교회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8세기경부터 앵글로 색슨족 수도자들이 로마 교황의 특별 허가를 받고 선교를 하면서 프랑크 왕국의 교회가 로마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당시에 유럽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성지 순례자와 상인 그리고 선교사들이었는데, 그들의 여행 행로는 똑같았다. 차츰 순례자가 많아지자 여러 곳에 순례지가 생겼고, 특히 앵글로 색슨족 수도자들이 유럽 대륙을 순례하면서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순례가 퍼진 듯하다. 이때 교황이 프랑크 왕국에 순례자를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고, 이에 프랑크 왕국이 특별 여행 허가서를 주면서 보호에 나서자 순례자는 더욱 많아졌다. 그리하여 수도자 선교 순례자들은 선교에 성공한 지역에 수도원을 세우고는 신앙이 약한 지역을 교육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이들 수도자 순례객의 활약상을 두 사람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먼저 프리지아 지방의 사도라고 불리는 빌리브로르도의 이야기다. 교황 세르지오 1세는 열두 명의 동료와 함께 그를 프랑크 왕국에 파견하였다. 그는 당시 프랑크 왕국의 궁정 대신 피핀을 찾아가 보호를 요청하였는데, 이때 이들이 이제까지와는 달리 먼저 교황한테서 선교 허가를 받고 파견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빌리브로르도는 695년에 로마에서 주교로 서품되어 팔리움을 받고 클레멘스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돌아가 일을 계속한다.

 

한편 빌리브로르도의 뒤를 이어 두드러진 활약을 한 빈프리도는 같은 경로로 보니파시오란 이름을 받았다. 보니파시오 성인은 718년, 722년, 738년 세 차례에 걸쳐 로마를 방문하면서 대주교로 서품을 받고 게르만 민족한테 선교를 했다. 그는 특히 바비에라 지방에 여러 개의 교구를 성공적으로 조직하여 로마에 순명하는 교회, 로마와 긴밀한 유대를 가지는 교회로 정비했다. 그는 사제로서 대주교로서 선교사였지만, 근본은 늘 수도자로서 살았을 뿐 아니라 수도원 창설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당시 보니파시오 성인과 동료 수도자들은 빌리브로르도와 마찬가지로 교황의 파견 서찰과 프랑크 왕국의 보호 증서를 지참하고 상류충 지도자들을 통해 선교하였다. 이렇게 위로부터 시작된 개종은 집단으로 이루어져 교리 지식이 얕고 신앙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교육과 신앙을 다지기 위한 방법으로 수도원을 세웠는데, 수도원은 새로운 개종자를 교육하는 중심지로, 그리스도교 삶의 모범을 보여 주는 자리가 되었다. 이들 선교의 또 다른 특징은 신앙을 토착화한 것으로, 게르만 민족의 관습과 그리스도교 정신을 이어 주는 연결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또한 거의 문맹자였던 사람들을 신앙을 통해서 교육시켰다.

 

교회 쇄신과 조직 정비는 교황과 궁정 대신이었던 피핀과 보니파시오 성인의 뜻이 합쳐져 이루어졌다. 이들은 먼저 로마 교회의 원칙에 따른 교구 설정과 지역 구분을 위해서, 교구 성직자 · 수도자 · 신자들의 역할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742년부터 743년에 걸친 제1차 게르만 민족 공의회를 열었다. 또한 745년부터 747년 동안에는 프랑크 왕국이 공의회를 열어 교회법적인 체계를 세우는 분수령이 되었다. 이 공의회에서는 수도 생활의 쇄신과 신자들의 윤리 규범을 만들고, 교황의 회칙이 통용되도록 하였으며, 교회 교령은 국가 법률로 공포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프랑크 왕국의 교회가 재정비되니 이것은 교회에만 이로웠던 것이 아니라 왕국의 질서 회복에도 큰 힘이 되었으며, 그 뒤부터 모든 수도원이 각 지방의 교육과 문화, 자선을 행하는 중심이 되었다.

 

 

제국 교회와 수도원

 

771년경에 왕국의 실권을 잡은 칼 대제는 차츰 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면서 점령지 통치를 위해 개종을 요구한다. 800년에는 동로마 황제나 이슬람 세계의 칼리프와 대등한 서로마 제국의 황제에 오른다. 이러한 칼 대제의 황제 대관은 일반적으로 서유럽이 동로마 제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서로마 제국의 부활’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으며, 칼 대제는 콘스탄틴 대제와 같이 교회를 보호하고 교황좌를 수호하는 임무를 받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황제는 교회 문제에 깊이 개입하고 교회를 통한 통치를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제국 교회의 분기점이 된 것은 802년과 805년에 반포된 ‘일반 훈령’(admonitiones generales)이었다. 제국과 교회는 서로 도움을 주는 보완 관계에 들어가면서 이런 모든 활동을 수도원과 수도자한테 의존하였다. 이제 대수도원은 그들이 소속한 공동체와 함께 교회와 제국에 봉사하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수도원은 기도의 중심지가 되었을 뿐 아니라, 경제 · 사회 · 문화와 함께 군사 요충지가 되기도 하였다.

 

각 교구에서 수도원은 재산으로도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수도원의 모든 사람이 교회와 제국에 봉사하게 되었고, 일반 사람이 수도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황제의 허가가 있어야만 될 정도로 수도자나 지역이 제국 교회에 일익을 담당하는 한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산리퀴에(Saint-Riquier) 성은 수도원에서 건설한 것으로, 성의 가장자리 세 곳에 구세주와 동정 마리아 그리고 성 리퀴에한테 봉헌한 성당이 있다. 그 중심에 수도자들의 봉쇄 구역이 있고, 봉쇄 지역 바깥은 ‘거룩한 도읍’이라 하여 구세주 성당 소속의 다섯 개 경당이 있었다. 거룩한 도읍은 다시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칠천쯤 되는 거주민들이 흩어져 살았다. 여기에는 군인과 상인을 위한 지역 그리고 수도원장이 사는 지역이 포함된다. 모든 전례는 성당과 거주 지역 사이의 공간에서 거행되었는데, 수도원이나 거룩한 도읍이라고 했던 이 지역의 우두머리는 평신도 수도원장 안질베르토였다. 물론 모든 수도원이 산리퀴에 같지는 않아 수도원만 간단하게 지은 곳도 적지 않았다. 이탈리아 지역에는 대수도원을 많이 건설했는데, 황제나 교황의 영역 안에 있는 수도원은 대개가 거대한 모양을 갖추었고, 이런 이유로 외부 간섭을 받지 않았고, 수도원장까지도 자신들이 자유 선거로 선출하는 특례가 적용됐다.

 

제국의 영향을 받은 수도원은 파르파 수도원을 들 수 있다. 파르파 수도원은 롱고바르디 왕국 소속이었지만 775년 이후에 칼 대제가 모든 시민 권력이나 교회 권력에서 보호하는 제국 직속 수도원으로 만들었다. 파르파 수도원이 있는 자리는 로마로 향하는 길목으로 테베레 강을 통한 상업의 중심지였다. 뿐만 아니라 대성당을 중심으로 다섯 개의 성당을 가진 기도의 중심지이기도 했는데, 황제가 행차할 때에는 황제와 수행원을 모두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도시를 형성했다.

 

베네딕도 성인이 세운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교황의 영역 안에 있었다. 이 수도원은 순수한 수도원이었지만, 왕족과 귀족 자제들의 수도원으로 유명했다. 칼 황제 자신이 모든 수도원을 보호 육성하고 문예 부흥의 중심지로 삼음으로써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은수자나 칩거자 또는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불신하고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들한테 호의를 베풀었으므로 결과적으로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이 강요된 셈이다.

 

 

제국 교회 성직자들의 공동 생활

 

제국의 성직자들도 생활을 쇄신하면서 도시의 성직자는 행정관한테, 시골의 성직자는 영주한테 충성 서약을 하였다. 사제들 가운데는 공동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대성당에 종사하는 사제나 규정에 따라서 수도원에 살아야 하는 사제들이 있었다. 황제가 789년과 802년의 일반 훈시에서 사제관의 공동 생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어 수도자와 사제를 엄격히 구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수도자는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을 따랐지만 사제는 어떤 규범으로 공동 생활을 했을까? 사제들의 공동 생활 규칙은 성 크로데강고로 거슬러 올라간다. 750년경 메츠 성인은 주교로서 사제들한테 공동 기도와 공동 전례 그리고 침식을 같이하도록 하였다. 이런 생활은 초대 교회 예루살렘 공동체의 사도적 삶을 본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 크로데강고는 성 보니파시오의 교회 쇄신에 참가했고 그 일을 계속하면서 성직자들의 생활을 쇄신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여러 곳에 수도원을 세우면서 서고트족의 교회 관습 즉 주교 주변에 사는 성직자들의 모범을 적용하려고 하였다. 그는 34개 항에 달하는 규정집을 마련하여 성직자들한테 이 규정에 따라 살도록 요구하였다.

 

사제관의 책임자는 대부제와 수도원장과 비슷하였으며, 고해성사 책임자, 자선 책임자와 재정 관리 책임자도 있었다. 또한 공동체에는 공동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으며 외부 압력으로부터는 보호받았고, 공동체에 일이 있는 평신자는 봉쇄 구역 밖에 살았다. 사제관의 한 부분은 가난한 이들한테는 개방하여 자선 사업을 사도적 일로 여겼다. 성직자들은 대성당에서 로마 전례에 따른 전례 생활을 했다. 메츠 성인이 시작한 성직자들의 이러한 공동 생활은 다른 교구로 확산되면서, 813년에 열린 마곤자 시노드에서는 일반화한 사제들의 공동 생활을 인정하고 격려했다.

 

프랑크 왕국이 교회에 기여한 점은 크게 평가해야 한다. 특히 칼 대제는 유럽 제국을 형성해 나간 것은 물론 교회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한 사람이다. 정치적 통일만이 아니라 문예 부흥을 통해서 학문 세계를 구축하고, 모든 방면에 부흥을 꾀하는 과정에서 교회는 바로 그 중심에 있었다. 특히 수도원을 통한 교회 쇄신과 국가 조직 정비와 학문의 발달은 눈부실 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도 생활은 그러한 제국의 중심 역할을 하면서 더욱 굳건해졌다.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을 일반화하고, 성직자들한테도 수도원 규칙을 닮은 크로데강고 성인의 규칙을 강조함으로써 수덕 생활은 바로 수도자의 삶의 틀이 되었다. 또한 공동 생활을 후원하였고 개인적인 은수자나 칩거자 역시 교회의 권위 아래 수행하도록 하였으며, 전반적으로 규정되지 않았던 과부와 재속 동정녀의 형태도 옛 규정으로 제자리를 찾게 했다.

 

그러나 교회를 사유하는 제도가 생기고 봉건 개념으로 교회에 대한 주인이 생기면서 수도원의 주인이 생기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모든 수도원의 주인은 황제나 주교나 지주였고, 수도원을 세운 사람이 주인이 됨으로써 일반 신자가 수도원장이 되기도 했고, 한 사람이 여러 수도원의 원장이 되는 일도 생겼다. 따라서 수도원을 수입 원천으로 보는 수도원장 밑에서 수도원이 ‘모범 농장’으로 전락하는 일도 생겼다.

 

[경향잡지, 1994년 7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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