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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45: 충주의 사도 이기연 형제와 충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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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4-09 ㅣ No.1359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45) 충주의 사도 이기연 형제와 충주 교회


충주의 사도 이기연, 북도로 귀양 가서도 천주교 씨앗 퍼뜨리다

 

 

충주목의 관아골이 있던 충주시 성내동 ‘관아공원’에 건립된 천주교 ‘순교자 현양비’. 충주에서 천주교인들이 처형된 장소는 충주시 봉방동의 옛 무학당 주변(현 충주우체국 부지)으로 알려졌다. 이곳에서 충주의 사도 이기연과 이부춘·이석중 부자, 권아기련 등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임성빈 제공.

 

 

충주의 최고 명문 가문

 

조선 교회 출범기의 지역 교회사에서 그 실체에 비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 바로 ‘충주 교회’이다. 충주 교회에는 충주의 사도 이기연(李箕延, 1739~1801)과 그의 아우 이최연(李最延, ?~?)이 있었다.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는 이기연이 1801년 고문을 못 이겨 배교했다가 다시 신앙을 증거하여 63세의 고령으로 사형을 당했다는 짤막한 정보가 나올 뿐이다. 하지만 초기 교회 창설에서 신유박해에 이르는 시기까지 충주 교회에서 그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앞서 이기연이 아버지 제사 때만 되면 집을 나가, 그 형 이세연(李世延, 1721~1804)이 통곡했다는 「송담유록」의 이야기를 짧게 소개했었다. 이기연은 권득신(權得身)의 외아들 권상익(權相益)에게 딸을 시집보내, 권철신 집안과 사돈을 맺었다. 「송담유록」은 이기연, 이최연 형제가 충주의 남필용과 포천의 홍교만, 그의 서종제 홍익만 등과 함께 권일신에게 서학을 배워 인근 여러 고을의 백성들이 휩쓸리듯 따랐다고 썼다. 이기연 형제는 청백리로 이름 높은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 이광정(李光庭, 1552~1627)의 6세손으로 충주 지역에서 명망이 우렁찬 최고의 명문이었다.

 

「송담유록」의 기록을 한번 더 찾아 읽으면 이렇다. “충주의 사족인 이최연과 이기연 형제가 권일신에게서 배워 오로지 사학에다 마음을 쏟았다. 그의 큰 형인 이세연은 근후하고 이름이 알려진 선비였다. 한번은 부친의 기일이 되었는데, 두 아우가 참석하지 않자 이세연이 통곡하였지만,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사족들과 무지한 백성을 가르쳐서 꾀니, 당시에 사학의 소굴로 일컬어진 곳은 내포의 여러 고을과 충주와 양근, 여주와 이천이라고 한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임금께서 몰래 사람을 시켜 이들 고을을 염탐케 하여 사학이 더욱 심하다는 것을 밝게 아셨다. 특별히 이가환을 충주목사에 보임하고, 정약용을 금정찰방에 앉혔다. 임금의 뜻은 그들의 무리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하고, 또 사학하는 무리에게 두려워 그만두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1795년 7월 25일에 이가환을 충주목사로 보낸 이유가, 이곳이 이기연 형제를 중심으로 한 천주교 세력이 특별히 기승을 부리므로, 이가환을 시켜 이들을 일망타진케 하려 했다는 것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뿐 아니라, 1795년 주문모 실포 사건 직후에도 충주는 사학이 창궐하는 핵심 소굴의 하나로 지목된 곳이었다.

 

1795년 이가환이 충주목사로 있을 당시, 이가환은 금육일을 골라 자기 집에 선비들을 초대해 고기를 대접해서 천주교 신봉 여부를 알아보았다는 얘기가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나온다. 천주교도에게 도둑을 다스릴 때나 쓰는 주리형을 처음 적용한 것도 이가환이었다. 황사영의 「백서」에 나온다. 당시 이가환이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이기연 집안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규장각본 「남보」에 실린 이기연 집안의 계보. 이기연은 빠진 채 이최연만 보인다.

 

 

이기연 이최연 형제

 

교회사 기록에 이기연의 이름은 있어도 그 아우 이최연의 존재는 전혀 포착되지 않는다. 「사학징의」에도 그의 이름은 없다. 하지만 「송담유록」에서는 이최연이 형 이기연과 함께 충주 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분명히 적고 있다.

 

현재 연안 이씨 삼척공파(三陟公派) 족보에는 이기연과 이최연 두 사람의 이름을 모두 파낸 상태다. 맏형 이세연과 둘째 이혜연(李惠延, 1732~1775), 셋째 이제연(李濟延, 1736~1767)의 이름만 있고, 넷째였을 이기연과 다섯째 이최연의 이름이 없는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최연이 사학에 연루된 것은 일단 분명한 사실이다. 규장각본 「남보(南譜)」에는 이기연은 여전히 빠진 채 이최연의 이름만 올랐다.

 

이기연이 충주 교회를 세우고 중심 역할을 한 것은 1785년 조선 교회 창설 직후부터의 일이다. 박종악이 1791년 12월 11일에 정조에게 올린 보고서의 별지에는 “충주에 사학하는 자들의 무리가 실로 많다”는 말이 나오고, “이기연은 「이십오언(二十五言)」 1책, 「성세추요(盛世芻)」 1책의 책자를 지니고 자수하여 관청 뜰에서 불태웠다고 합니다. 허물을 고치겠다는 공초를 받고 풀어 주었습니다”라고 썼다.

 

이 기록에 함께 등장하는 충주 지역 인물에 홍장보(洪章輔), 홍계영(洪桂榮), 최종국(崔宗國) 등이 더 있다. 특별히 홍장보의 집에서는 모두 16종의 사서가 쏟아져 나와 이목을 놀래켰다. 이들은 모두 한문으로 된 높은 수준의 교리서를 소지하고 있었다. 1791년 당시 충주 지역 교회가 내포와 달리 양반 지식인층이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당시 이기연의 배교는 그때뿐이었고, 이후 그는 다시 충주 교회의 확장에 온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충주 교회의 교세는 그 어느 곳보다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이기연의 이름이 관변 기록에 다시 나타나는 것은 신유년(1801) 3월 10일, 「일성록」의 기록에서다. 형조판서 조진관(趙鎭寬, 1739~1808)이 말했다. “지금에 사학하는 자들 중 물든 것이 조금 가벼운 자는 마땅히 먼 지방으로 내쳐야 합니다. 하지만 이기연을 북도(北道)에 정배한 일로 볼 때, 그가 있는 곳에서 접촉하는 데마다 독을 끼치니, 이는 깊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짧은 언급은 1801년 3월 이전 이기연이 북도에 정배되어 있었고, 그곳에서도 그가 부지런히 전교하는 바람에 해당 지역 백성 중에 천주교 신자가 생기는 문제가 발생했음을 알려준다.

 

 

형제의 뒷바라지

 

그런데 4년 뒤인 「순조실록」 1805년 8월 2일 기사에 나오는, 함경도 종성(鍾城)에서 동몽(童蒙) 교관을 하던 채경갑(蔡慶甲)이 올린 상언(上言) 때문에 이기연, 이최연 형제의 1801년 당시의 동선이 한 가지 더 포착된다. 1801년 부친 채홍득(蔡弘得)이 집 앞에서 타작을 하고 있는데 웬 사람이 들어와 밥을 달라고 청하므로 점심밥을 대접한 일이 있었다. 그 사람은 그날 종이 묶음까지 팔고 돌아갔다. 그 뒤 종성부사가 돌연 그 아비를 감영의 감옥에 가두고 사학죄인 이최연에게 곡식을 대주고 밥을 먹였다는 죄목으로 금화현(金化縣)으로 정배 보냈다. 채경갑의 상언은 아비인 채홍득이 밥을 먹인 것이 이최연이 아니므로, 부친의 귀양이 억울하니 특명으로 석방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해당 부서에서 유배안을 가져다 서류를 확인했다. 정작 채홍득은 사학죄인 이기연을 유배지까지 찾아가서 쌀 포대를 건네주어, 죄인끼리의 연통 금지를 범한 죄목으로 귀양을 간 것으로 되어 있었다. 채홍득이 유배를 간 것은 1801년 3월 이전의 일이었다.

 

이 묘한 상황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확인되는 팩트는 이렇다. 당시 이최연도 사학죄인으로 함경도 종성 땅에 머물고 있었다. 이최연은 그곳 사람 채홍득에게 부탁해서 종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유배가 있던 형님 이기연에게 곡식과 생필품을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이 일이 탄로 나는 통에 엉뚱하게 채홍득이 그만 유배를 가게 되었다. 「순조실록」에는 “구석진 먼 지역까지 사학이 점점 물들어가니, 조금이라도 의심할만한 단서가 있거든 사실을 자세히 살펴 조사케 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죄인끼리의 연통 금지를 범했다고 한 것은, 이최연이 형 이기연을 도우려고 사람을 중간에 두어 연통했다는 뜻이다. 부탁 당사자인 이최연은 당시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 알 수가 없다. 그에 관한 기록이 온전히 부재하는 것은 실로 비정상적이다.

 

당시 이최연은 형 이기연을 돌보기 위해 일부러 종성까지 올라갔던 걸까? 아니면 그 자신 또한 유배객의 신세로 종성에 있었던 걸까? 후자라면 기록이 없는 것이 이상하고, 전자라면 인근 고을로 가서 간접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보내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어쨌거나 채경갑의 상언으로 인해 충주 명문 형제의 사학 관련 행적 하나를 보탤 수 있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필자의 생각은 후자 쪽이다.

 

이기연은 함경도 꼭대기까지 귀양 가서도 근신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역 주민에게 포교하여 천주교의 씨앗을 퍼뜨리고 있었다. 이최연이 종성 사람 채홍득에게 부탁하여 형님을 도우려 했던 것 또한 채홍득이 이최연 또는 이기연을 통해 서학을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애초에 이들 형제가 충주 교회의 핵심이었음에도 유배형에 그쳤다면 그것은 배교의 다짐과 집안의 배경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1801년 10월 23일 「순조실록」 기사에 충청감사 윤광안(尹光顔)의 보고가 더 나온다. “사학죄인 충주의 이기연은 권일신과 체결하여 사학에 깊이 미혹되어 집안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집안으로부터 이웃 마을에 이르기까지 남녀를 속여 꾀어 한 고을을 그르쳤습니다. 스스로 와주(窩主)가 되어 기꺼이 사학의 괴수가 된 증거가 이미 드러나 자취를 가리기 어렵습니다.”

 

그는 유배지인 북도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했을 뿐 아니라, 주변에 접촉한 사람들에게 포교하다가 문제가 되어 다시 충주 관아로 끌려와 계속 갇혀 있었고, 이때 복심(覆審) 절차를 진행했다. 결국 그는 1801년 12월 17일, 집안 제사에 참여하지 않고 요언과 요서를 만들어 대중을 미혹시킨 죄로 목이 잘려 죽었다. 그의 나이 63세 때였다. 「순조실록」에 나온다. 충주 교회에 대해서는 한 차례 더 쓰겠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4월 4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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