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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정진석 추기경 선종: 삶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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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5-04 ㅣ No.659

[정진석 추기경 선종] 삶과 신앙 I


호적보다 교회에 먼저 올린 이름… 결국 목자의 길을 걷다

 

 

- 정진석 추기경이 1998년 6월 29일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거행된 서울대교구장 착좌식 및 감사미사 후 퇴장하면서 신자들에게 강복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한국교회 두 번째 추기경이자 청주교구장과 서울대교구장으로, 교회법 학자와 교회 서적 집필자 등으로 60년 사제 생활을 마치고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 정진석 추기경. 정 추기경이 쉼 없이 걸었던 사제의 길은 곧 신앙의 길이다. 정 추기경이 이 땅에 남긴 ‘신앙인 정진석’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가정생활이 곧 신앙교육

 

교회에 큰 족적을 남긴 성직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정진석 추기경도 1931년 12월 2일 서울 수표동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가정에서의 양육이 곧 신앙교육인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정 추기경은 태어난 지 4일 만인 12월 6일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니콜라오’로 유아세례를 받았다.

 

정 추기경의 유아세례와 관련해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호적상으로는 태어나기도 전에 유아세례를 먼저 받은 것이다. 정 추기경의 호적상 출생일은 1931년 12월 7일로 기록돼 있어 ‘공적인 출생’보다 하루 빨리 유아세례를 받았다. 지금 생각으로는 의아스럽기도 하지만 과거 가톨릭 집안에서는 유아세례를 통해 교회에 먼저 이름을 올리고 그 후에 호적에 이름을 올리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 1942년 12월 20일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노기남 주교(가운데) 서품식에서 소년 정진석 추기경(왼쪽 맨 앞)이 노기남 주교, 복사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서울대교구 제공.

 

 

정 추기경의 어린 시절 신앙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은 외할아버지였다. 장롱을 만드는 공장을 운영했던 외할아버지는 서울 명동본당 회장을 지낼 만큼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다. 정 추기경은 출생 후 줄곧 수표교 근처 외할아버지 댁에서 지내며 신앙을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었다. 기도가 일상인 삶이었다. 어린 시절 어둑어둑한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듣던 어머니 이복순(루치아)씨의 말이 “진석아, 만과(晩課) 바칠 시간이다!”였다. 지금은 ‘만과’라는 용어가 생소하지만 오래 전 저녁에 가족들이 십자고상과 성모상 앞에서 드리는 만과는 어린 아이가 끝까지 자리를 지키기에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정 추기경은 추기경 시절에도 어릴 때 만과를 바치던 때를 회상하곤 했다. 가족 모두가 저녁마다 바치는 기도이니 싫다 좋다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으로는 싫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기도가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됐고 정 추기경의 삶에도 두고두고 영향을 끼쳤음에 감사했다. 한번 세워진 신앙의 기초가 일생토록 지탱됐다.

 

정 추기경은 9살 때인 1939년 7월 23일 명동대성당에서 첫영성체를 했다. 이후에도 신앙적 분위기에 둘러싸여 살았지만 사제가 되겠다는 꿈을 처음부터 꾸었던 것은 아니다. 소년 시절 정 추기경은 발명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새로운 발명품으로 세상에 도움을 주는 일이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보았던 발명가들의 위인전은 정 추기경에게 과학에 대한 흥미를 심어줬다.

 

 

전쟁 체험이 삶의 방향 바꿔

 

그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1학년 재학 중에 터진 한국전쟁은 정 추기경 삶의 방향을 바꿔 놓았다. 과학의 발명품들이 사람에게 선익을 주지 않고 살상 무기로 이용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전의 꿈에 회의감이 들었다. 사제의 길을 생각한 것도 이 무렵이다.

 

- 사제품을 받은 정진석 추기경(왼쪽 다섯 번째)이 1961년 3월 19일 첫 미사 후 가족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정 추기경 오른쪽이 어머니 이복순(루치아) 여사. 서울대교구 제공.

 

 

그러나 외아들이었던 정 추기경이 신학교에 가려면 그 시절에는 주교의 허락이 필요했다. 집안의 반대도 넘어야 할 산이었다. 하지만 정 추기경이 “어머니, 제가 신학교를 가고 싶은데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었을 때,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음에도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외아들이 사제가 되기를 이미 원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머니는 노기남 대주교를 찾아가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노 대주교는 처음에 반대했다. 외아들을 신학교에 보내면 부모는 혼자 살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어머니의 고집 앞에 노 대주교는 결국 신학교 입학을 허락했다. 정 추기경은 훗날 주교가 돼서 사제서품식을 주례할 때면 새 사제들의 부모님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자신의 신학교 입학 허락을 받아 냈던 어머니의 굳은 믿음을 되새기곤 했다. 정 추기경은 2006년 추기경 서임 발표 직후 “어머니께서 살아 계시다면 무엇을 해 드리고 싶으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1996년 6월 6일 편안하게 잠을 청하듯 선종한 어머니를 떠올리고는 “절을 하고 싶어요. 끝없이 많이….”라고 답하며 무한한 존경과 애정을 드러냈다.

 

- 2011년 3월 27일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사제품 금경축 행사에서 정진석 추기경이 사제단 대표로부터 선물을 받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정 추기경이 사제가 되는 데는 한국전쟁 체험이 하나의 계기가 됐지만 그에 앞서 1942년 12월 20일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한국인 최초의 주교인 노기남 주교 서품 미사 참례도 정 추기경에게 사제가 되는 실마리가 됐다. 정 추기경은 노 주교 서품식에서 복사로 뽑혀 난생 처음 주교 서품식을 볼 수 있었고 자신이 미사를 주례하는 상상을 했다고 회상했다.

 

정 추기경이 한국전쟁 후 어렵사리 입학 허락을 받아 신학교에 들어간 것은 1954년 봄이었다. 신학생 시절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였던 정 추기경은 자신이 번역하고도 책이 나올 때는 신학생 이름을 책에 올리는 것은 성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이 번역자로 표기되는 일을 겪곤 했다. 그럼에도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일은 정 추기경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은퇴 후 서울 혜화동 주교관에서 생활하던 시절에도 교회법 서적을 포함해 매해 책을 내는 것을 자신과의 약속이라며 끝까지 지켰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삶으로

 

주교가 된 정 추기경은 1970년 10월 3일 청주 내덕동성당에서 청주교구장에 착좌했다. 청주교구 첫 한국인 교구장이라는 역사가 새겨졌다. 그러나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시 청주교구 사제들은 절대다수가 미국인이었고 서품 연차도 정 추기경보다 대부분 높았다. 또한 당시에는 사제들에게 생활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할 정도로 교구 형편이 어려웠다.

 

- 2005년 12월 4일 서울대교구 생명의 날 행사에서 정진석 추기경이 평화방송 소년소녀합창단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1998년 정 추기경이 28년간의 청주교구장 사목을 마치고 서울대교구장으로 자리를 옮길 때 청주교구민들은 “주교님, 청주교구를 잊지 말아 주세요”라고 눈물겹게 말했다. 사실 정 추기경은 28년 전 청주교구장으로 부임할 때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할 것이라 여겼고 서울대교구장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청주교구장 재임 시절 하느님께 ‘교구 사제 100명을 달라’고 기도했던 일이 106명으로 성취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고 서울로 떠난 것은 큰 감사와 보람이었다. 1998년 6월 29일 정 추기경은 명동대성당에서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했다. 후임 염수정 추기경에게 교구장 자리를 물려주고 2012년 5월 10일 교구장에서 퇴임하기까지 14년간 서울대교구를 이끌었다.

 

이제 정진석 추기경은 우리 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신앙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것은 오늘을 사는 신자들의 몫이다. [가톨릭신문 정진석 추기경 선종 특집호, 2021년 5월 3일, 박지순 기자]

 

 

[정진석 추기경 선종] 삶과 신앙 Ⅱ - 추기경이자 교구장으로서의 그는…


교회 성장과 쇄신 이끌며 눈부신 사목적 성과 이룬 목자

 

 

- 2006년 4월 21일 서울 명동 주교관 앞마당 성가정상 앞에 앉은 정진석 추기경. 서울대교구 제공.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추기경으로서의 활동뿐 아니라 정진석 추기경이 청주교구장과 서울대교구장으로서 이룬 사목적 성과는 그 자체로 주목할 만하다. 젊은 나이에 첫 한국인 청주교구장이 된 정 추기경은 가난했던 청주교구에 놀라운 성장과 성숙을 가져왔고, 새 천년기를 맞은 서울대교구를 비롯해 한국교회 전체에 쇄신의 기틀을 마련했다.

 

 

첫 한국인 청주교구장

 

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교회법을 공부하던 중 미국에 잠시 머물던 1970년 6월, 정진석 신부는 자신이 주교에 임명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최초의 한국인 청주교구장이었다. 그것도 39세의 젊은 나이에 교구장 주교가 됐다. 당시 청주교구장은 메리놀 외방 전교회 선교사가 맡고 있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었지만 정 추기경은 늘 그랬듯이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

 

정 추기경은 교구 운영을 위해 두 가지 목표를 설정했다. 하나는 본당의 자립적인 운영, 또 하나는 한국인 사제 양성이었다. 아울러 신앙의 위기를 겪는 신자들을 위해 신앙 교육을 바탕으로 한 신앙 내실화와 복음화, 그리고 가정사목의 강화에 힘썼다.

 

특히 정 추기경은 자신은 굶어도 신학생은 양성한다는 각오로 성소계발에 힘써, 1990년 교구 신자 수 8만 명에 신학생 수 80명을 확보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러한 노력에 대해 “신자 수 1000명당 신학생 1명이라니, 전 세계에 이런 교구는 없다”고 치하했다.

 

정진석 추기경이 1970년 10월 3일 청주 내덕동주교좌성당에서 제2대 청주교구장으로 착좌하고 있다. 서울대교구 제공.

 

 

28년간 청주교구 성장 이끌어

 

정 추기경은 교구의 성숙과 발전을 위해서 순교 영성에 주목했다. 박해기 교우촌이자 가경자 최양업 신부와 선교사들의 사목 활동 거점이었던 배티성지의 땅을 확보하고 성역화에 박차를 가했고 1999년 양업교회사연구소를 설립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회사목과 사회복지는 정 추기경의 한결같은 관심사였다.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사회사목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수도회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판단에서 정 추기경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수도회들의 진출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병들고 약한 이들을 위해서 병원도 필요했다. 가난한 교구의 재정으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지만 정 추기경은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1998년 3월 청주성모병원을 개원했다. 병들고 가난한 이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생각에 그간의 고생을 모두 잊고 감사의 기도를 바쳤다.

 

그러던 중 정 추기경은 주한 교황대사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됐다는 소식이었다. 이로써 28년 동안 교구장으로 재임하며 지역 복음화율과 신자 대비 본당 수, 사제 수 등에 있어서 전국에서 가장 높은 성장을 이끌었던 청주교구를 떠나게 됐다.

 

 

새 천년기 사목 쇄신

 

정 추기경은 새로운 세기를 코앞에 둔 1998년 4월 3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됐다. 그해 6월 29일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교구장 착좌식이 거행됐다. 정 추기경은 이후 2012년 6월까지 14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직을 수행하며 서울대교구의 새로운 면모를 다지고 새로운 천년기 한국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밝혔다.

 

- 2006년 3월 25일 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에서 열린 정진석 추기경 서임 축하 리셉션에 참석한 신자들이 정 추기경에게 축하인사를 전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서울대교구장으로서 정 추기경은 교구 시노드 개최로 새로운 천년기를 시작했다. 새로운 세기를 맞는 교회의 쇄신을 지향하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가르친 친교의 교회상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비 단계(2000년)·준비 단계(2001~2002년)·본회의 단계(2003년) 등 4년에 가까운 회의 여정을 거치며 논의한 내용들은 시노드 후속 교구장 교서 「희망을 안고 하느님께로」에 담았다. 총 208쪽 분량의 이 교서는 새천년기를 향한 서울대교구의 청사진일 뿐 아니라 한국교회가 세상 안에서 나아갈 바를 제시하는 나침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시노드를 통해 종합되고 확인된 변화와 쇄신의 여정을 걸어가던 2002년, 정 추기경은 「서울대교구 사목체계 쇄신에 관한 교령」을 공포했다. 이는 교회 대형화의 문제를 해소하고 친교와 일치를 바탕으로 하는 복음적 공동체를 위한 지역 중심 교회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는 구체적으로 지역 담당 교구장 대리 제도, 지구장 중심 교구 운영, 공동 사목 등의 사목적 조치들로 구현됐다.

 

- 2007년 11월 26일~12월 3일 실시한 한국 천주교회 주교단의 사도좌 정기방문 ‘앗 리미나’(Ad Limina) 일정 중 정진석 추기경을 비롯한 한국 주교단이 베네딕토 16세 전임교황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바티칸 미디어.

 

 

가정과 생명

 

청주교구장 시절부터 가정사목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정 추기경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위협받는 시대, 교회를 생명의 최후 보루로 자리매김했다. 그 첫걸음이 생명위원회의 설립이었다.

 

당시, 산업과 결탁한 의학과 과학은 무분별한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나섰다. 정 추기경은 “인간 배아를 실험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인간 생명을 파괴하는 비도덕적인 행위”임을 강조하고 2005년 10월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를 발족하는 동시에 성체줄기세포 연구에 100억 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생명위원회는 교회의 인간 생명 수호 노력의 중심으로서 다양한 생명운동을 펼쳐왔다.

 

- 2008년 12월 7일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봉헌한 제1회 서울대교구 생명수호주일 미사 후 정진석 추기경과 신자들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정 추기경은 그밖에도 서울대교구장 재임 시절 문화의 시대에 걸맞게 명동대성당 일대를 문화 공간으로 조성하는 개발 사업을 추진했다.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면서 민족화해 문제에도 큰 관심을 갖고 파주시에 민족화해센터를 건립하기도 했다.

 

 

학자이자 사목자

 

정 추기경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남다르다. 어려서부터 ‘책벌레’로 불렸다. 1950년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입학, 과학자를 꿈꿨지만 전란 속에서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긴 그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신학도가 됐다. 신학교에서도 방대한 독서량과 탁월한 학업 성취로 유명했다.

 

뜨거운 학구열은 사제품을 받은 후에도 이어졌고, 이는 곧 왕성한 집필로 나타났다. 지금까지 정 추기경이 펴낸 교회법 관련 저서와 역서는 모두 65권, 1961년 사제품을 받은 후 매년 최소한 한 권씩의 책을 펴낸 셈이다.

 

- 정진석 추기경이 2013년 3월 19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알현하고 있다. 바티칸 미디어.

 

 

그는 학자인 동시에 철저하게 사목자였다. 너그럽고 겸손하며 따뜻한 인품은 누구나 그를 가까이 여기게 했다. 그의 이러한 성품은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이라는 사목 표어에서도 드러난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그는 언제 어디서든 기꺼이 만나는 어진 마음을 지녔다.

 

2012년 6월, 서울대교구장직을 물러나면서 가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정 추기경은 “그저 매일을 ‘이날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성실히 살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서 매순간을 살아갔기에, 정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 재임 시기 동안 “특별히 생각나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했기에 그에게는 모든 것이 희망이었다. 하느님이 모든 것이었기에 그분이 주신 생명은 존엄한 것이며, 하느님 섭리를 탐구함에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가톨릭신문 정진석 추기경 선종 특집호, 2021년 5월 3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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