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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성 베네딕도회와 용봉 성신마을이 함께 선 사랑의 무대(만남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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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7-19 ㅣ No.1412

[앞서 걸어간 길] 성 베네딕도회와 ‘용봉 성신마을’이 함께 선 사랑의 무대(만남 편)

 

 

성 베네딕도회, 정착촌이 사회로 건너오는 다리

 

병은 환자가 반, 의사가 반을 고친다고 한다. 이 두 역할을 제대로 한 사람들이 있다.

 

생활하던 곳에서 종이 한 장 들고 나오지 못한 베네딕도회 회원들은 한국전쟁 중에 함경도 함흥대목구 및 성 베네딕도회 덕원 자치수도원, 성 베네딕도회 연길 수도원을 잇고 ‘왜관 감목대리구’까지 맡는 ‘새 수도원’으로 출발했다. 그들은 험난한 시절 경북 칠곡군 왜관에 수도 공동체를 다시 세우면서 곧바로 본당 사목에도 투신했다. 본당에 나간 수사신부들은 현지의 가난과 질병에 직면했다. 그들 앞에 한센병 환자가 있었다.

 

‘한센병’은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유전적인 불치병으로 여겼으나 1873년 노르웨이 의학자 게르하르 아르메우에르 한센이 병균을 발견했고, 이후 몰로카이 섬의 성 다미안(1840-1889) 신부를 통해 전염병으로 알려졌다. 1941년 치료제가 발명되고 의술의 발전으로 완치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시대 한센병 기록이 있다. 조선 왕조의 세종, 문종, 광해군은 승려들에게 치료를 맡기는 등 구라사업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개항기에 입국한 개신교 선교사들이 수용소 겸 한센병 병원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한센병 환자들은 소록도 같은 일정 지역에 강제 수용되어 불임수술과 강제노역을 강요당할 만큼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이들은 해방과 한국전쟁 등 사회적으로 혼란할 때 강제수용시설을 탈출하여 유랑했다. 특히 경상도에는 한센병 환자들이 많았다.

 

 

성당 짓는 사람들

 

은양원에서 나온 천주교 신자 환자들 여섯 가구 10여 명이 1953년 성령 강림 대축일을 전후하여 경북 성주군 초전면 용봉리 영암산 지류 자락에 도착했다. 직접 흙벽돌을 찍어 기도집을 짓고 그 주위에 허름한 토담집을 세우고 생활했다. 그리고 사람이 몰려들었다.

 

이 지역 관할인 성주본당에는 이 무렵 독일인 정묵덕(鄭黙德) 엑베르토 되르플레(Egbertus Dorfler, 1898-1986) 수사신부가 3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그는 독일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서 1925년 사제품을 받은 직후 선교 파견되어 만주 연길 수도원 소속으로 사목하다가 1951년 중국 공산당의 압력으로 독일로 강제 추방당했다. 1956년 왜관으로 다시 선교 파견된 후 곧바로 성주본당 신부로 발령받았다. 성주본당은 한국전쟁 직전에 세워진 성당이어서 전쟁 후에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2대 주임이었던 독일인 왕묵도 레지날도(Reginaldus Egner, 1906-1975) 수사신부가 1954년에 성당을 지었다. 정 엑베로토 신부는 1956년부터 8년간 사목하면서 신자가 2,00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신부는 신자들의 극심한 가난 때문에 독일의 은인들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써야만 했다.

 

정 엑베르토 신부는 1958년 10월 용봉공소를 세우고 경당을 지었다. 이 마을은 산비탈 경치 좋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흐르는 물이 다른 마을로 들어가지 않도록 정착촌 바로 아래로 물길을 내어, 육지 안의 섬이 되었다. 정 신부의 일과에서 두 시간이나 걸리는 이곳에 미사를 봉헌하러 아침에 출발해 점심때쯤 돌아오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다행히 왜관 수도원에서는 독일 뷔르츠부르크 한센병구호협회와 미세레오르재단의 관심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수도원과 용봉인들은 경제적 자립, 치료, 사회와의 연계 등 세 가지 과제를 해결하는 데 돌입했다. 용봉인들은 발전 단계마다 ‘성당’을 지었다.

 

마을에 성심의원이 들어오고 또 농업에서 축산으로 경제적 구조를 바꾸어 가던 때인 1970년, 마을 입구에 작고 아름다운 성당을 새로 봉헌했다. 마을의 초기 사람들은 자신들 손으로 지은 계곡 안쪽에 있는 첫 경당에 애착이 강해서 수도원에서 마을을 지원하면서 성당을 지을 때 반발했다. 그러나 이 성당은 용봉공소가 외부로 연결되는 큰 상징일 수 있었다. 이 성당도 1960~70년대 한국 교회 건물의 대부인 독일인 안경빈 알빈(1904-1978) 수사신부가 설계했다. 그는 1958년부터 20년간 성당과 공소를 포함하여 무려 185개소에 달하는 가톨릭 건축물을 설계했다. 이 새 성당은 김천 평화동성당, 부산 분도병원, 수원 장호원성당 등 전국 곳곳에 형제 건물들과 연결되었다.

 

 

 

이 열림의 움직임은 계속되어 1973년 백천에는 마을로 진입하는 ‘성신교’가 놓였다. 마을을 고립시켰던 물을 건너 ‘여느 사람과 같은 일상’을 여는 초석이 되었다. 이를 기해 전신전보 취급소도 설치되었다. 나아가 1980년대 용봉인들은 두 가지 숙원을 풀었다. 우선, 1984년에는 1967년 개교했던 봉소초등학교 성신분교를 폐교하고(졸업생 112명 배출), 자녀들이 정착촌 밖 학교에 진학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1986년에는 ‘성신마을’이 용봉1동에서 용봉3동으로 분동되어 동장을 뽑았다. 이로써 자녀들의 출생 신고와 주민등록상 전출입, 영농자금 대출 등에서 행정적으로 ‘특수집단’으로 다루어지던 절차를 ‘남들과 같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이렇게 마련된 성장 동력은 초전성당을 건립하는 데 발휘되었다. 1980년 초전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자 용봉공소는 초전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초전본당은 1959년에 지은 공소 건물을 성당으로 계속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용봉공소의 성당이 훨씬 아름다웠다. 1998년 성신마을의 대표 김진국 사도 요한이 본당 평협회장이 되고 본당에서는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여 성당 건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용봉공소 사람들은 성당 건축비 마련을 위해 적극 나섰다. 청국장 등을 만들어 전국 본당으로 판매하러 다녔다. 새벽 4시에 나가 밤이 이슥해서야 돌아오는 것이 다반사였다. 드디어 2003년 성전을 봉헌했다. 신자들은 ‘담장 허물기’에 동참하는 성당을 지으며 자신들을 둘러싼 ‘담장’도 허물어갔다.

 

 

성심의원과 네 번의 의사면허증을 갱신한 수녀

 

환우들에게는 치료가 가장 직접적인 일이다. 1962년 왜관 수도원에서는 독일의 선교자금으로 용봉에 ‘성심의원’을 세웠다. 대구 파티마병원 의사이며 툿찡 베네딕도수녀회 대구 수녀원의 디오메데스 메페르트(Diomedes Meffert, 1909-1998) 수녀에게 병원 운영을 맡겼다. 디오메데스 수녀는 1982년부터는 아예 마을에 있는 병원 안으로 이사해 생활했다.

 

성심의원의 진료과목은 피부과, 내과, 외과, 산부인과였다. 공중보건의나 영리 목적의 병원들이 도시에 있던 당시, 진료과목을 넘어서는 온갖 질병 때문에 한센인은 물론 다양한 환자들이 모여들었다. 수녀는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의 ‘주치의’가 되어 갔다. 성심의원 앞에는 새벽부터 각지에서 물어물어 찾아온 환자들이 줄을 섰다. 자연히 진료를 기다리거나 혹은 진료를 늦게 받게 되어 당시 교통 여건상 그날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결국 마을에는 그런 이들이 머무를 대기실 건물이 생겨났다. 용봉마을은 이 드나드는 환자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뒤치다꺼리까지 하게 되었다.

 

디오메데스 수녀가 사랑을 실천하는 길은 험난했다. 그는 이 아름다운 일에 종사할 수 있기까지 네 번이나 의사 면허 시험을 치른 준비된 박사 수녀였다. 독일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내과 의사가 된 뒤 수녀원에 입회했다. 착복식 후 바로 함경남도 원산으로 파견되었는데, 이때는 일제강점기라 일본이 발행하는 의사 면허증을 다시 따야 했다. 해방 이후에는 북한 공산당이 허락하는 의사 면허증을 발급받았다. 그러나 그 직후 동료들과 함께 옥사덕에서 강제노역을 했고, 1954년 독일로 귀환했다. 수녀는 재입국을 기다리는 동안 외과, X선과, 소아과, 피부과 등의 의술 분야를 넓혀가며 일할 준비를 했다. 1958년 한국으로 돌아와 이듬해 다시 대한민국 의사 면허증을 취득했다. 연세대학병원 피부과에서 한센병에 대해 공부했다. 1961년부터 독일인 에나타 수녀와 함께 한센병 이동 진료를 나갔다. 이렇게 철저히 준비한 수녀는 1962년부터 1995년까지 완벽하게 봉사했다. 1983년 왜관 수도원에서 운영권을 대구대교구로 이관했지만 그는 계속 병원에 머물렀고 그의 봉사를 끝으로 병원은 문을 닫았다. 마을에서는 관계기관과 협의하여 병원을 간이 양로시설로 변경하고 1층에는 디오메데스 수녀의 유품 전시관을 만들었다.

 

 

‘작은 엑베르토, 작은 디오메데스’들

 

왜관 수도원에서는 수도원에서 관리하는 정착촌들의 중앙에 위치한 용봉에 성심의원을 세웠다. 또한 디오메데스 수녀는 굳이 용봉마을에서 살기를 고집했다. 어쨌든 용봉공소는 수도자들을 모시고 살면서,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진료받으러 온 사람들을 도우면서 성장해 갔다. 용봉인들은 받은 사랑을 ‘끔찍이’도 기억했다. 1985년 마을 입구에 왜관 수도원과 그 숨은 은인들을 기리는 송덕비를 세웠다. 마을 양로원은 ‘엑베르토관’이라 하고, 성심병원에서 근무하던 세 사람의 이름자를 딴 ‘디에모의 집’도 있다. 더욱이 마을 사람들은 ‘눈으로 볼 수 있었던 천사’ 디오메데스 수녀를 기려 주기(週忌) 미사를 봉헌한다. 그들은 수녀를 기리는 책을 두 권이나 펴냈다. 그렇게 그들은 ‘은인’들을 닮아간다.

 

용봉에서는 받는 이들도 비굴하게 의탁하지 않았고 주는 이도 베풂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함께 당당했으며 진정 서로 사랑했고 이 사랑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성장 에너지를 얻었다. 이쩌면, 용봉은 인간이 사회공동체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주님께서 마련하신 ‘무대’일지 모른다.

 

(자료 도움 김진국 회장, 김태규 신부)

 

* 김정숙 소화 데레사 - 프랑스 파리 Ecole des Hautes Etudes en sciences sociales에서 역사인류학으로 박사학위 취득하였다. 영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로 현재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대구가톨릭학술원 회원,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연구원, 「교회와역사」 편집위원, 대구문화재위원,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에세이작가연대와 가톨릭문인회 회원으로 역사서 「대구 천주교인들 어떻게 살았을까」 외 다수의 공저와 수필집 「대신 생각해 드립니다」 등이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21년 여름(Vol. 54), 김정숙 소화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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