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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26: 조선 입국로 개척, 만주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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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1-13 ㅣ No.2036

[성 김대건 · 최양업 전] (26) 조선 입국로 개척, 만주로 가다


만주행 여정 중 세관에게 붙잡힐 위기 가까스로 모면

 

 

- 신학생 최양업·김대건이 중국 상해 장가루에서 베시 주교가 마련해준 배를 타고 요동 태장하까지 항해한 것은 교황 파견 선교사들을 위해 조선 입국로를 개척한 첫 행보이다. 사진은 태장하 전경으로 청주교구 이태종 신부가 사목하는 차쿠성당 홈페이지에서 캡쳐했다.

 

 

신학생 최양업과 김대건 그리고 메스트르 신부와 드 라 브뤼니에르 신부, 길 안내인 범 요한은 1842년 10월 1일에서 2일로 넘어가는 자정 무렵 산동대목구장이며 남경교구장 서리인 베시 주교가 마련해준 중국인 신자 배에 몰래 오른다. 상해 장가루에 정박해 있던 이 배는 돛이 5개가 달린 150톤급 배였다. 우리나라 해군 참수리 고속정이 150톤급이나 이들이 탄 배는 나무배였기에 아마 크기는 참수리호보다는 훨씬 컸을 것이다. 배는 항해 준비를 모두 갖춘 후 4~5일께 장가루 항을 조용히 빠져나와 조선과 인접한 요동을 향해 모든 돛을 올렸다. 목적지는 만주대목구장 베롤 주교가 있는 양관(陽關)이었다. 최양업과 김대건이 교황 파견 선교사들을 위해 조선 입국로를 개척한 첫 행보이다.

 

 

소중한 선상 경험, 훗날 라파엘호 출항으로

 

항해는 시작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출항하자마자 역풍을 만난 배는 상해 앞 숭명섬 근해에서 12일간 꼼짝달싹을 못 했다. 그래도 최양업과 김대건, 메스트르 신부와 브뤼니에르 신부는 자신들이 경험했던 그 어떤 항해보다 행복했고 자유로웠다. 바로 신자인 중국 선원들 때문이었다. 선장을 비롯한 신자 선원들은 배가 멈추자 저녁에 그들은 이마를 갑판에 대고 엎드려 성사의 은총을 베풀어줄 것을 신부들에게 간곡히 청했다. 북경어만 배웠을 뿐 광동어를 몰랐던 메스트르 신부와 브뤼니에르 신부는 십계명과 관련한 대죄 항목을 한자로 적어 고해자에게 고하고 싶은 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게 하고 사죄경을 외워줬다. 이렇게 고해성사를 마친 후 사제들은 미사를 봉헌하고 신자들에게 성체를 영해줬다. 브뤼니에르 신부는 “장소와 상황이 한 선교사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을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종종 저녁때면 이목의 두려움 없이 밤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이 열심한 교우들이 그들의 일상 기도를 읊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때 우리는 곧 저와 동료 신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처지는 어떨까요? 어떻게 우리가 이 행복한 지점에 오게 되었는가!’”라고 감격해 했다.(브뤼니에르 신부가 1842년 10월 22일 태장하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지도자 쥐랜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양업과 김대건은 신자 선원들이 순조롭게 성사를 잘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 이 복된 광경을 지켜봤다. 둘은 아마도 곧 조선 땅에서 우리 신자들이 이들처럼 복된 성사의 은총을 체험할 것이라 가슴 벅차했을 것이다. 특히, 김대건에게는 이 경험이 자신의 삶에 큰 주추를 놓는 한 변곡점이 됐을 것이다. 김대건 부제가 조선의 작은 목선 ‘라파엘호’를 타고 서해를 가로질러 상해를 간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김대건은 이 항해를 통해 굳이 서양의 큰 배가 아니라도, 돛이 몇 개 달린 100톤 규모의 나무배라도 서해를 충분히 가로지를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을 것이다. 또 김대건은 라파엘호에 승선한 조선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하면서 분명히 이 항해의 추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바다가 폭풍우 휘몰아치는 거친 바다로, 중국인 신자가 조선인 신자로 바뀌었을 뿐 김대건이 탄 배는 하느님의 섭리로 순항하는 ‘구원의 방주’였다.

 

- 백가점 마을 전경. 오영환ㆍ박정자, 「한국 천주교 성지와 사적지」 캡쳐.

 

 

지역 유지의 도움, 세관 손아귀서 벗어나

 

10월 12일 순풍이 불기 시작했다. 5개의 돛이 모두 펼쳐졌다. 최양업ㆍ김대건 일행을 태운 배는 주변의 모든 배보다 빨리 앞서 나갔다. 4일간의 항해 끝에 배는 목적지인 요동반도 북단 작은 항구인 양관에 인접했다. 하지만 양관까지 하루 뱃길을 남겨두고 또다시 북풍이 불어 배를 멈추게 했다. 그래서 뱃머리를 서쪽으로 돌려 산동 해안 리타오(Li-tao)에 며칠간 정박한 후 10월 22일 태장하(太莊河) 항구에 닻을 내렸다. 배가 닿은 곳이 목적지인 개주(蓋州) 부근에 있는 양관(陽關) 교우촌이 아니었기에 서양인 신부들과 최양업·김대건이 신속히 은신할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길 안내인 범 요한을 보내 안전한 교우촌을 찾게 했다. 겁이 많은 범 요한은 태장하에서 가까운 차쿠 백가점(白家店) 교우촌으로 가서 두(杜) 회장을 홀로 보냈다.

 

최양업과 김대건, 메스트르 신부와 브뤼니에르 신부는 두 회장의 안내로 밤에 몰래 하선해 백가점으로 피신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야간 경계가 심하고 주변 상황이 좋지 않아 짐은 다른 배로 보내고 낮에 배에서 내려 일반인들에 섞여 항구를 몰래 빠져나가기로 했다. 일단 일행을 둘로 나누었다. 두 회장은 최양업을 데리고 세관을 통과했다.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 브뤼니에르 신부, 선원 둘은 세관을 우회해 강변으로 빠져나갔다. 이들 다섯이 길도 없는 질퍽한 강변에서 허둥거리고 있는 것을 본 세관들과 장정 20여 명이 “영국인이다”라며 악을 쓰고 달려들었다. 세관들은 신부들의 팔을 잡아채고 상관에게 끌고 가려 했다. 중국인 선원 둘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세관들이 브뤼니에르 신부에게 질문하자 그는 북경어로 “나는 외국 사람이오. 당신네 말을 알아듣지 못해요. 우리를 내버려 두시오. 당신들과 말하고 싶지 않소”라고 대답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때 김대건이 세관들과 자신들을 끌고 가려는 무리를 호통쳤다. 김대건은 “강남에서 장사하러 온 사람들에게 마치 도둑 취급을 해 달려들어 우리 체면을 상하게 하고, 아무 해도 끼치지 않은 사람들을 공연히 못살게 군다”고 이들을 비난했다.

 

“그 사람들이 와서 우리를 붙잡으며 여러 가지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부님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저는 우리가 소매 속에 감추어 가지고 가던 책 때문에 무척 걱정하였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여전히 붙잡고 질문을 하였으므로 제가 화난 소리로 ‘당신들은 안녕질서를 위해 정부에서 임명된 경찰관들이면서 무고한 인민을 모욕적으로 대한다’고 꾸짖었더니 우리를 내버려 두고 떠나갔습니다.”(김대건 신부가 1842년 12월 9일 백가점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앞글 내용 그대로라면 김대건의 임기응변으로 선교사들이 태장하 세관들에게 체포되는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브뤼니에르 신부의 편지를 좀더 들여다보면 김대건의 보고와 차이가 있다. 김대건이 자신의 재치로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 것은 순전히 자기 착각이었다.

 

두 회장과 최양업은 세관을 빠져나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회장은 상황이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직감했다. 다행히 두 회장은 태장하 세관들을 쥐락펴락하는 유지와 친분이 두터웠다. 두 회장은 세관 터줏대감인 유지에게 저들을 구해달라고 부탁했고, 서양 신부들과 조선인 신학생들은 호랑이 입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 하인을 데리고 숨이 턱에 닿아서 달려왔습니다. 포졸들이 그를 맞는 태도로 보아 그 사람이 이 지방의 유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우리 일을 몹시 걱정하는 것 같았고, 우리를 구해 주러 왔다는 것을 눈으로 알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조선 학생을 대신해서 어떻게나 세차게 말을 하고 몸짓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하던지 세관 관리들이 잡았던 먹이를 놓아주고 말았습니다. 저는 우리를 구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가 우상 숭배자이고 또 우리가 서양인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저는 정말로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친구인 우리 회장으로부터 우리 일을 부탁받았던 것입니다.”(브뤼니에르 신부가 1842년 10월 22일 태장하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지도자 쥐랜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혼쭐이 나갈 정도로 한바탕 소동을 겪은 최양업과 김대건, 메스트르 신부와 브뤼니에르 신부는 걸어서 1842년 10월 25일 차쿠 백가점 교우촌에 겨우 도착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1월 14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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