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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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에스테르, 은총의 중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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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2-04 ㅣ No.781

[레지오 영성] 에스테르, 은총의 중개자

 

 

보스턴의 한 보호소에 앤(Ann)이란 소녀가 있었습니다. 앤의 엄마는 죽었고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엄마의 죽음과 아빠의 폭력과 보호소에 함께 온 동생의 죽음이 겹쳐 앤은 결국 정신병에 걸리고 눈까지 안 보이게 됩니다. 앤은 수시로 자살을 시도했고 괴성을 질러댔으며 회복 불능 판정을 받았고 정신병동 지하 독방에 수용됩니다.

 

모두가 앤에 대한 치료를 포기했을 때 노(老) 간호사인 로라(Laura)가 그녀를 돌보겠다고 자청했습니다. 로라는 앤의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날마다 과자를 놓아주고 책을 읽어주고 기도해주었습니다. 한동안 앤은 로라의 사랑을 못 본 척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끈질긴 로라의 희생 덕분으로 앤은 정신이 돌아왔고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년 뒤 정상인 판정을 받습니다.

 

앤은 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졸업하고, 한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 수술도 받습니다. 어느 날 앤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를 돌볼 사람 구함!”이라는 신문광고를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도 그런 아이는 가르칠 수 없다고 말했지만 앤은 믿었습니다. 그리고 헬렌 켈러를 자신처럼 바꿔놓습니다.

 

먼저 태어난 사람만이 새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습니다. 로라는 앤을 낳았고 앤은 헬렌 켈러를 낳았습니다. 로라로부터 앤 설리번을 통해 헬렌 켈러에게로 흐르는 사랑의 은총이 있습니다. 앤은 로라로부터 흐르는 은총을 헬렌 켈러에게 전해준 ‘은총의 중개자’였습니다. 어느 날 앤 설리번이 헬렌 켈러에게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라고 물었습니다. 헬렌 켈러는 “선생님이 나를 꼭 안아주신 거요.”라고 대답합니다. 사랑은 그렇게 흐르고 그렇게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서 은총을 중개하셔

 

내가 받은 사랑을 포옹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도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사랑의 중개자 역할을 하십니다. 물이 포도주가 된 기적이 일어난 그릇은 ‘정결례’에 쓰이는 항아리 ‘여섯’ 동이입니다. 여섯(6)은 창조 ‘여섯’ 째 날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던 때를 기억하게 합니다. 새로 태어났을 때 이름을 지어줍니다. 새로 태어나게 한다는 말은 ‘세례’를 준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포도주로서 ‘교회’를 태어나게 하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지금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서 교회가 탄생하게 하는 은총을 중개하고 계신 것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들어봅시다.

 

“카나에서 예수님의 어머니께서는 혼인 잔치에 필요한 것을 당신의 아들에게 청하신다. 그런데 이 혼인 잔치는 또 다른 잔치, 곧 당신의 신부인 교회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몸과 피를 내주시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상징한다. 그리고 새 계약이 맺어지는 시각에, 십자가 아래에서, 마리아께서는 ‘새 하와’로, ‘여인’으로, ‘살아 있는 이들의 참어머니’로 받아들여진다.”(‘가톨릭교회교리서’ 2618항)

 

피를 흘리는 자가 아버지이고 그 피를 중개하여 자녀에게 주는 자가 어머니입니다. 성모님은 아버지인 그리스도의 피를 받아 우리를 낳고 키우시는 어머니입니다. 살아 있는 것들의 어머니, 새 하와가 되십니다.

 

구약의 ‘에스테르기’에서 에스테르 여왕이 이 은총의 중개자요 교회의 어머니로서의 성모 마리아의 상징입니다. 크세르크세스 임금은 인도에서 에티오피아까지 이르는 백이십칠 개 주를 다스리는 엄청난 권력을 가진 왕이었습니다. 잔치 때 임금은 기분이 좋아 왕비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싶어서 신하들에게 왕비를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왕비는 임금의 분부를 받들지 않습니다. 왕과 신하들의 노리개가 된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왕은 이에 분노하였고 결국 왕비를 폐위시킵니다. 그 이유는 왕국의 모든 부녀자가 ‘남편을 공경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에스 1,20). 순종하는 아내를 원한 것입니다. 그렇게 새롭게 뽑혀 왕비가 된 이가 에스테르입니다. 에스테르는 이 이방 왕국에 몸 붙여 사는 이방인이었고 유다인이었습니다. 크세르크세스 임금은 에스테르에게 왕관을 씌우고 왕비로 삼습니다.

 

그 나라에 하만이라는 재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다인들을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꾀를 내서 왕국 백성 중 유일하게 유다인들만 하느님을 섬긴다는 명목으로 크세르크세스 왕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다고 일러바칩니다. 그들을 처단하여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것을 국고에 넣으면 왕에게 이득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왕은 그의 청을 옳게 여깁니다. 이렇게 하여 왕은 모든 유다인들을 한날한시에 처단하고 모든 재산을 몰수하도록 하는 법령을 온 나라에 반포합니다.

 

에스테르는 왕비이기 때문에 이 죽음의 법령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동족은 다 몰살당하는데 자신만 산다고 행복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사흘 동안 단식기도를 드리고 몸을 어여쁘게 단장한 다음 왕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왕이 불렀는데 나오지 않거나, 부르지 않았는데 나온다면 그것은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임금이 황금 왕홀을 내밀면 모든 것이 용서되었습니다.

 

에스테르 왕비는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갑자기 나타났지만, 왕은 황금 왕홀을 내밀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하만도 왕과 함께 있었는데 왕비는 이 모든 것이 하만의 계략이라고 말합니다. 임금은 처음에 하만을 믿었었지만, 왕비를 더 사랑했기에 왕비의 말을 믿기로 합니다. 그래서 하만이 유다 백성에게 하려던 것과 똑같이 그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의 머리를 잘라 말뚝에 매달아 백성들이 보게 합니다.

 

 

위기에 처한 자신의 민족 위해 왕 앞에 나가 은총을 중개한 에스테르

 

위기에 처한 자신의 백성을 위해 에스테르 여왕이 왕 앞에 나아가 은총을 중개한 것처럼, 카나의 혼인잔치의 성모 마리아도 신랑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목숨을 걸고 당신 자녀인 교회를 위해 포도주를 청하십니다. 예수님은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고 말했지만, 성모님은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라고 하시며 기적을 종용하셨습니다. 이는 자칫 하느님께 불순종하는 행위처럼 보일 수 있으나, 예수님은 당신 신부의 믿음과 아름다움을 보시고 당신 피의 기적을 행해주십니다. 그렇게 교회가 성모 마리아의 중개로 은총을 받아 생명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사제들이 은총의 중개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사제는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게 할 믿음이 없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서 성모님께서 이 지상의 교회를 위해 성령이 오실 수 있도록 중개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베드로적인 차원보다 마리아적인 차원이 앞선다.”(‘가톨릭교회교리서’ 773항)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믿음으로 베드로를 기반으로 하는 지상교회가 은총의 도움을 받습니다(773항 참조).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성모님의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가, 예수님의 “물독에 물을 채워라”(요한 2,7)라는 명령에 앞서듯이, 성모님의 중개가 예수님의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1코린 11,24)를 앞섭니다. 성모님은 마치 에스테르 여왕처럼 지금도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새 하와로 당신 자녀인 교회를 위해 피와 같은 은총을 중개해주고 계십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12월호, 전삼용 요셉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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