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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72: 레이먼드 브라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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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2-23 ㅣ No.436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72) 레이먼드 브라운 (하)

성경 연구 헌신하며 교회 일치 운동에 한 획 그어



독일 루터교 신학자로 유명한 에른스트 케제만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브라운 신부(왼쪽). 브라운 신부는 개신교 신학자들과 함께 연구하며 교회 일치를 위해 헌신했다.


실현된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

요한 복음은 신약 성경 중에서 실현된 종말론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거나 “빛이 세상에 왔다” 같은 표현에서 드러난다.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든지 아니면 반대하든지 스스로 결정하게 한다. 참으로 그의 오심은 근본 의미에서 갈림길(crisis)이었다.

믿기를 거절하는 이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요한 3,18). 그러나 믿는 자들은 이미 영생으로 넘어갔다(요한 5,24). 공관 복음에서 영생은 최후의 심판이나 미래에 받을 무엇인가이지만 요한 복음에서는 현재적 가능성이다. 다른 한편으로, 요한 복음서에는 미래적 요소들도 많이 발견된다. 이러한 긴장은 신약 성경 저자들이 예수님 말씀에서 나타나는 자취들을 특별한 상황에 적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동시대 유다교에도 두 가지 형태의 종말론이 있었다. 쿰란의 전쟁 문서에는 하느님의 신적 개입을 고대했으나, 동시에 그들은 이미 하느님의 천상적 선물을 공유했으며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았고 천사와 함께 기쁨을 나눴다고 믿는다. 이러한 종말론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예수 안에서 받은 것들을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마지막 심판을 크게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 또는 불신의 반응이 이미 심판의 기준이 됐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재림이 가져다줄 축복들을 과도하게 소망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녀 됨과 영생이라는 두 위대한 선물이 이미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그리고 세례와 성찬례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소유가 됐기 때문이다.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들은 마지막 날과 죽은 자의 부활을 기다려야 하는 무한한 고민이 필요 없다. 그 이유는 죽음 후에도 그들이 이미 소유한 영생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음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연속이며,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친교를 구성하는 연속이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종말론의 일반적 견해도 주도적으로 실현된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이 혼합된 형태다. 브라운은 현재 상태로의 요한복음이 갖는 다양한 종말론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브라운 신부는 성경학자로서 교회에 충실했고, 그를 인정하지 않고 반대하던 이들에게도 관용을 보였다. 출처=http://raymondebrownss.weebly.com


교회 일치 운동과 교회 삶에서의 브라운의 역할

브라운은 성경 연구에도 공헌했지만, 교회 일치 운동과 교회 생활에도 폭넓게 봉사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미국의 보수적인 사람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브라운을 새롭게 발족한 교황청 성경위원회 20명 중의 최초 미국 위원으로 임명했다(1972~1978). 그만큼 그는 학문적으로 현명하고, 가톨릭 교회에 정통한 사람이라는 것을 뜻했다. 브라운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또다시 성경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미국 가톨릭 주교들은 그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중에 미국 루터교인들과 함께 신학적 대화를 하도록 했는데, 이는 루터 이후 450년 만에 미국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 신학자들이 처음으로 모인 것이다(1965). 여러 번의 모임 후,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자들은 「신약 성경에서의 베드로」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래서 브라운의 영향은 전 세계의 많은 가톨릭인들 뿐만 아니라 개신교인들에게까지 이르게 됐다.

1973년에는 루터교 신학자들과 마리아에 대해 토론하고 「신약 성경에서의 마리아」라는 책도 펴냈다(1978). 그는 25년 동안 계속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해 봉사했다. 브라운은 바티칸의 요청과 미국 가톨릭 교회의 요청으로 루터교와 장로교의 일치를 위해 일했다.

교회 삶에 대한 그의 역할 가운데 말씀 봉사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명확한 설교가였다고 한다. 그는 하느님 말씀의 문학적 의미를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의 상황에 맞게 설교하는 뛰어난 명사였다. 미국 LA대교구장을 지낸 마호니 추기경은 산상설교 산에서 브라운으로부터 설명을 들은 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브라운 신부는 그 사건을 그렇게 우아하고 명상적으로 묘사해줬다. 그가 설명을 마쳤을 때 어느 누구도 입을 열어 말하거나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거기에 앉아서 마치 처음으로 그 말씀들을 해주시는 예수님께 듣는 것 같았다.”


브라운에 대한 불공정한 비판과 박해

브라운은 일생에 많은 일을 이뤘고 성경학자로서 칭찬받을 만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제 생활과 학자적 삶에 대해 불공정한 비판과 박해를 견뎌야 했다. 그는 1970~80년대에 ‘독이 있는’(venomous) 비판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브라운은 성경엔 오류가 없다는 무오류성을 부인했다고 비판받았다. 몇몇 보수주의자들은 예수의 동정 잉태가 역사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는 브라운의 주장에 화를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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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이 루터교 신학자들과 마리아에 대해 토론하고 함께 펴낸 책.


그의 문학적 연구는 근본주의자들에게 반대를 받았다. 그의 동료 피츠마이어는 이러한 비판들이 그를 잘 아는 사제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비슷한 경우를 라그랑즈(1855~1938, 프랑스) 신부에 빗대어 이야기한다. 1900년대 초 라그랑즈 신부는 역사비평 방법이 가톨릭 성경 해석자들에게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음을 주장했다(1903). 이후 라그랑즈는 구약 성경을 가르치거나 책을 출판하지 못하도록 금지당했다. 그래서 그는 신약 성경 연구로 전향해 네 복음서에 대해 중요한 주석서를 발간하기에 이른다.

라그랑즈와 브라운 두 사람 모두 무지로부터 비롯된 불공정한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불공정한 평가는 “가톨릭 주석가들은 성경을 자유롭게 토론하고 주석할 수 있다”고 선포한 비오 12세 교황 회칙에 의해 재평가됐다. 브라운은 이 회칙을 ‘성경 발전에 있어서의 대헌장(Magna Carta)’이라고 부른다. 시대는 변하여 라그랑즈 시대에 성경 연구 방법에 있어 이단으로 평가받았던 것들이 오늘날 가톨릭 교회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데 완전하게 받아들여지게 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헌장」도 계시 진리를 탐구하는 데 있어 역사적이고 비평적인 방법의 필요성을 분명히 제시한다. 교황청 성경위원회도 1993년 “역사비평 방법은 고대 본문의 의미를 현대적으로 연구하기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방법이며, 인간의 언어로 된 하느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이 방법을 사용할 것을 허락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것이 요구된다”(교회 안의 성경 해석)고 말하고 있다. 브라운 같은 성경 주석의 도전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아직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은 상당히 다른 형태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새로운 세계를 전달하기 위해 새로운 예수님의 이야기를 형성했던 것은 요한복음이 영원한 매력을 갖게 되는 이유 중 하나다. 브라운은 성경학자로서 교회의 봉사에 충실했고 그를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들과 박해했던 사람들에게도 친절한 관용을 보여줬다. 그는 마치 요한복음이 새로운 세계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했듯이 교회 일치를 위한 중재자 역할을 했다. 브라운 신부의 하느님 말씀에 대한 헌신적인 연구는 결코 잊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평화신문, 2014년 12월 21일, 이
혜자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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