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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프란치스칸 영성16: 사람들과 세상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선과 선물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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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1-15 ㅣ No.1494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16) 사람들과 세상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선과 선물 인식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창조되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사람들과 세상을 바라보며 먼저 하느님의 선과 선물을 인식했다. 그림은 자코포 토리티, ‘이브의 창조’, 프레스크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아시시, 이탈리아.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창조되었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콜로 1,15-17)

 

요한 복음 저자 역시도 바오로 사도와 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3)

 

어찌 보면 그리스도의 육화를 통해 ‘창조의 책’과 그리스도의 ‘생명의 책’이 하나가 된 셈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육화하신 그리스도는 이 세상 자체에 하느님과 세상의 본 모습을 드러내시는 빛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육화를 통해 세상을 통해 드러나시는 당신의 얼굴을 더 환히 밝혀주셨고, 우리와 같은 모습을 취하신 대사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써 우리 인간을 하느님과 다시 이어 주셨다.

 

이렇게 육화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이 하느님을 통해, 하느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아름다움과 선성에서 뻗어 나온 것임을 밝혀주신다. 한 마디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써 그분은 세상의 가장 깊고 참된 현실을 조명해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드러내고자 하신 것은 다름 아닌 선물로서의 인간의 모습과 이 세상의 모습이다. 즉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성에서 나오고 죄 때문에 잃었던 인간의 선성을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현실을 통해 다시 회복시켜주시는 것이다. (2코린 8,9; 「1신자들에 보낸 편지」 2,5; 「2수도 규칙」 6,3; 「1첼라노」 76; 「2첼라노」 73-74).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에 이 세상에 당신의 새로운 빛을 비추어 주심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물론이고,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다시금 찾게 된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전기 작가인 토마스 첼라노는 이런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해준다.

 

“이 세상은 우리가 순례하는 유배지이기에 여기를 바삐 떠나려 했던 이 복된 나그네는 이 세상에 있는 사물들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벌써 받고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암흑세계의 지배자인 마귀와의 관계에서는 이 세상을 전쟁터로 보았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선하신 하느님의 매우 밝은 표상으로 보았다. 그는 창작가이신 그분을 찬미하였다. 피조물에게서 무엇을 발견하든 그는 그것을 창조주와 관련시켰다. 그는 주님의 손에서 빚어진 모든 작품 안에서 즐거워하였고, 유쾌한 사물들의 배후의 뜻을 살핌으로써 그 사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이성과 원인을 보았다. 그는 아름다운 사물들 안에서 아름다움 자체를 보았다. 모든 사물이 그에게는 선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만드신 분은 가장 좋으신 분입니다’라고 그에게 외쳤다. 그분의 발자국이 서려 있는 사물들을 통하여 그는 어디서나 사랑이신 그분을 따라갔다. 그는 홀로 모든 사물에서 사다리를 만들어 그 사다리를 밟고 옥좌로 올라갔다.” (「2첼라노」 165항).

 

한편 토마스 첼라노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프란치스코가 뽁기오 부스또네라는 곳에서 하느님께으로부터 자신의 지난날의 죄를 용서받는 체험을 한다고 하는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그 용서 체험 이후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런 인사를 했다고 한다. ‘Buon Giorno! Buona Gente!’(좋은 날입니다! 좋은 사람들이여!).

 

프란치스코는 이처럼 사람들과 세상을 바라보며 먼저 하느님의 선과 선물을 인식했다. 그에게 있어 이것이 바로 ‘회개’였고, ‘가난’이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시기에 그는 가난한 풍요를 살 수 있었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느님 자비 안에 머물며 하느님 선을 즐길 수 있는 여유로운 회개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잠깐이라도(앞서 언급한 대로 15초 정도만이라도) 긍정과 선, 희망에 우리 마음의 시선을 고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도 모르긴 몰라도 많은 사람이 이런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파도바와 성 안토니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수도 규칙에 담겨 있는 대로, 신학 연구로 거룩한 기도와 헌신의 영(sanctae orationis et devotionis spiritum)을 끄지 않으면, 그대가 형제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일은 나의 마음에 듭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1월 8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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