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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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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167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생애와 사상

 

 

 I. 토마스의 생애


1. 출생

 

토마스의 출생지와 출생년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토마스가 사망한 해의 나이에 관한 초기의 전기 작가들의 증언, 몬테카시노의 수도원에 들어간 나이로부터의 역산 등으로 인해 그가 1224년부터 1226년 사이에 태어난 것은 확실하다. 태어난 장소는 그에 관한 자료의 상세한 검토 결과 로마와 나폴리의 중간지점인 아퀴노의 마을 근처에 로카세카(Roccasecca 마른바위 : 몬테카시노의 아빠스인 만소네가 994년 축조)에 축조된 산성이었다. 성주인 그의 아버지 란돌포는 시칠리아 왕국과 로마 교황령이라는 두 세력이 격돌하는 지점에 있는 영지를 지켜온 무장이었고 어머니 테오도라는 나폴리 출신의 귀부인으로서 1243년경 란돌포가 사망한 후에는 1255년경 세상을 뜨기까지 로카세카에 아퀴노가의 지주로서 역할을 다한 용맹한 성품의 여성이었다. 토마스가 유년생활을 함께 했다고 생각되는 형제, 자매에 관하여 알려져 있는 사실은 조금밖에 없다. 아버지 란돌포는 먼저 세상을 뜬 아내와의 사이에 몇 명의 아이를 두었으며 테오도라와의 사이에 태어난 자녀는 남자 4명(또는 7명), 여자 5명으로 토마스는 막내아들이다. 큰 누나(장녀)는 베네딕도회의 수녀원장이 되고 그 밑의 누나 두 사람과 누이 한 사람은 각기 백작의 가문에 속하는 귀족과 결혼하였다.

 

토마스는 이 가운데 산 세베리노 백작가의 로게로와 결혼한 누나 테오도라에게 특히 친근감을 갖고 있었던 듯하며 토마스가 사망하기 몇 개월 전에도 누나를 방문한 적이 있음이 전기작가들에 의해 기록되어 있다. 토마스는 가문 가운데 로카세카 계열을 타고났다. 따라서 토마스에게 붙여진 ‘데 아퀴노(De Aquino)’라는 칭호는 일부 역사가들이 주장하듯 아퀴노 시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출신 가문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토마스는 박학하고 품위있는 귀족에 속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백작보다는 낮은 지위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형 레지날도는 1246년 카파치오에서 황제를 암살하려던 음모 때문에 프리드리히의 명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당시 신앙과 정치가 매우 혼동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을 도와 황제를 정복시킴으로써 개인적 이득을 취하려는 욕망이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려는 열정보다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퀴노 가문에서는 레지날도가 신앙과 교회의 이름으로 죽은 순교자로 간주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토마스의 생애와 저술들 속에 반영되어 있다. 그는 그리스도 세계가 말려들고 있었던 서글픈 무질서 상태에 한편으로는 이론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으로 응답했다.

 

 

2. 성장배경

 

로카세카 산성의 분위기는 전란의 거친 분위기와 귀족 생활의 우아함이 뒤섞여 있던 것으로 보인다. 날마다 무기소리와 말발굽 소리의 울림들, 동시에 눈부신 복장의 기사들의 마장 시합, 당당한 기마행렬, 음유시인들이 연주하는 음악, 강력한 성주들의 지원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한 이탈리아 노래 등의 색채풍부하고 활기찬 전경은 토마스의 혼에 깊이 새겨졌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가 탁월한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5살난 어린이와 같이 순결했다’(토마스의 동료 레지날도가 시성조사에서 증언)는 것은 로카세카의 지리적, 시대적 환경이 만들어준 결과라고 본다. 토마스가 술과 노래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았고 후에 그와 수도회를 공격하는 반대파에 대해 당당히 대응할 수 있었던 것도 어린시절 그의 주변환경의 영향이 컸으리라 본다. 

 

토마스가 5살 되었을 때 그의 생활환경은 산성에서 부모에 의해 수도원으로 바뀐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의 토마스는 성서, 교부들의 저작, 라틴어 문법, 기초수학, 음악이론 등을 배운 것으로 작가들은 적고 있다. 실제 토마스는 라틴어에서 매우 미숙하였는데 라틴어 교육의 결함이라기 보다는 토마스의 사색과 탐구에 근원적인 특징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침착했으며 말수 적은 소년으로 혼자 들어박혀 있었다고 적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많은 시간을 독서에 보낸 탓임에 틀림없다. 토마스가 어린 시절 마을에서 떨어진 산꼭대기 수도원으로 보내어져 그곳에서 그가 그 후에 전생애를 통해 지켜온 생활습관을 형성한 것이, 그의 학자 또는 연구자로서의 생활을 여러가지 의미에서 좁고 편중된 것으로 만들었다는 해석도 성립할 것이다. 그래서 몬테카시노의 주위에 펼쳐진 산들의 풍경은 토마스 안에 자라나고 있던 영적인 소망을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추진시키는 것이었음에 분명하다고 본다. 작가 발츠(A. Walz)는 “산, 고독, 그리고 수도원의 침묵 이러한 모든 것들이 그를 도와 관상에로 이끌었으며, 그는 가장 단순한 사물로부터 최고의 것으로 상승해야 할 것을 배우고 이렇게 하여 남들보다 신속하게 신의 현존을 알아본다는 것을 배웠다”고 적고 있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장은 토마스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하여 그를 나폴리의 대학으로 보내 학업을 계속케 하도록 부모에게 권장하였다고 하였지만 당시 수도원이 황제의 군대에 점령되는 등 전화에 휘말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토마스의 신변 안전을 염려한 부모에 의해 로카세카 성으로 다시 내려오게 되었다고 한다.

 

 

3. 도미니꼬회 입회

 

1239년 가을 나폴리 대학에 진학한 토마스는 인문과에서 여러 가지 자유학예(Artes Liberalis)를 공부하였는데 이는 수사학, 논리학 등이 주된 내용들이었다. 나폴리에서는, 토마스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일과 삶에 결정적인 방향을 주는 두 개의 만남이 일어났다. 하나는 그가 철학을 배우기 시작한 발단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만나게 된 것이며 다른 하나는 도미니꼬회와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모든 부분을 라틴 세계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 시도를 착실히 실행하고 후에 거인(Magnus)이라고 불릴 정도의 박학을 구가한 스승 알베르토(그는 1223년 파도바 대학에서 삭소니의 조르단의 설교에 감화되어 도미니꼬회에 입회를 결심했다)의 지도 하에서 철학과 신학을 배우게 된다.

 

토마스가 도미니꼬회에 입회할 결심을 굳힌 것은 같은 나폴리 출신의 요하네스 데 산 줄리아노 신부의 지도에 의한 것이었다고 전기작가 토코는 적고 있다(나폴리에는 1231년 도미니꼬회의 수도원이 이미 발족되었다). 그러면, 어렸을 때부터 침묵 속에 기도와 관상에 전념하는 베네딕도회의 수도생활에 끌려있던 토마스가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택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 도미니꼬회에 들어갈 것을 결의한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였을까? 첫째로 토마스에게는 (그의 생애가 보여주듯이) 권위와 명망에 대한 집착이 없고 오히려 그러한 것들은 자기가 택하려 하고 있는 길에 장애가 되고 있는 것임을 자각하고 있었으므로 세속적인 권위나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양친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또 몬테카시노는 당시 명백히 토마스가 바라고 있는 수도생활을 보내기가 불가능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약 20년 후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말은 젊은 날의 토마스의 생각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수도회의 다른 수도회에 대한 차이는 무엇보다 첫째로 목적면에서 파악되고 둘째로는 실천 면에서 파악된다. 만약 목적이 동일하다면 수도회 우월성은 2차적으로 실천의 양에서가 아니라 의도된 목적에 대한 실천의 대응에 따라 파악되는 것이다. 그러한 즉 가르친다든가 설교하는 일은 관상이 차고 넘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같은 일은 단순한 관상보다 더 우월하다. 그 까닭은 빛을 발하기만 하는 것보다도 조명하는 쪽이 더 큰 것이듯이 관상만 하는 것보다도 관상한 것을 남에게 전하는 쪽이 보다 큰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갖가지 수도회 가운데 최고의 단계를 점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회다”(신학대전 제 188문 제 6항).

 

그러나 토마스의 생각과는 달리 그의 어머니 테오도라는 토마스가 몬테카시노의 대수도원장이 됨으로써 일족의 위세와 번영에 기여하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귀족의 아퀴노가의 아들이 희사에 의존하면서 활동하는 탁발 수도회에 몸을 바치는 것은 일족의 명예를 훼손하는 용납할 수 없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졌다. 테오도라가 나폴리의 도미니꼬 수도원으로 달려갔을 때 토마스는 가족의 반대를 피하려고 총장(요하네스 빌데스하우젠)을 따라 볼로냐를 경유하여 파리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래서 테오도라는 토마스의 형 레지날도에게 사람을 보내어 토마스를 데려오도록 명하였다. 형 레지날도는 1244년 5월 초순에 로마와 피렌체의 중간에서 처음엔 설득으로 나중엔 강제로 토마스를 붙잡아 로카세카로 끌고 왔다. 토마스는 로카세카 성의 한 방에서 약 1년 동안 감금당하게 된다. 그 가운데 젊은 여자를 고용하여 유혹하려 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1245년 여름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도미니꼬회는 교황 인노첸시오 4세(1243-1254년)를 통해 토마스의 해방을 종용하고 있던 터라 가족은 토마스의 해방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의 몸이 된 토마스는 나폴리 수도원에 복귀하여 수도원의 방침에 따라 알프스를 넘는 여행길에 올랐다.

 

 

4. 활동

 

1245년 5월 토마스는 파리에 도착하여 생자크 수도원에서 거주하며 파리대학 신학교수로서 활동하고 있던 대 알베르토와 에땀프의 굴리엘무스와 만났다. 토마스는 파리대학에 와서 유럽최고의 학문적 수준을 가지고 진행되던 성서연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한복판에 서게 된 셈이다. 그곳에서 알베르토의 제자가 된 그는 침묵과 근면으로 연구에 투신하며 기도에 헌신했다. 토마스는 스승으로부터 “우리는 이 사람을 ‘벙어리 황소’라고 불렀지만 그가 앞으로 가르치게 될 때 그 소리는 세계로 울려퍼질 것이다” 라고 말했다. 알베르토는 토마스에게 오늘날로 말하면 청강하는 학생이 아니라 조교에 해당하는 역할을 부여했다. 실제 토마스는 알베르토가 행한 ‘신명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관한 강의의 기록을 했다. 토마스는 현대식으로 말하면 대학원에 걸친 7년간 알베르토의 지도를 받았다. 두 사람은 도미니꼬회의 이상에 관해서도,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그 연구를 추진할 구상에 관해서도 생애를 통해 친밀한 사제 관계로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학문탐구 방법을 보다 자세히 비교하면 자연연구나 논리학에의 관심의 강약이라는 차이 말고도 알베르토가 스스로 철학적 입장을 자각적으로 확립하지 않고 다양한 철학사를 신학 속에 끌어들이는 경향을 보였음에 비해 토마스는 존재와 인식의 근본문제에 관한 스스로의 이해를 일관한 방법으로 심화시키고자 노력하고 그로부터 얻어진 철학적 통찰에 의해 독자적인 신학적 종합을 성취했다는 인상을 준다. 전기작가들은 토마스가 쾰른에서 면학을 시작할 때 “그는 감탄할만할 정도로 말수 적고 침묵을 지키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이것은 통상 연구에의 전념과 겸손의 표시로 풀이되기도 하고 스승 알베르토와 자기 생각의 차이를 의식한 토마스가 스승의 견해에 대한 찬성을 보류하고 스스로의 견해를 쉽게 표명하지 않았던 신중성의 표출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 1250년(1251년) 사제로 서품된 토마스는 도미니꼬 총장(요하네스 빌데스하우젠)으로부터 파리대학 신학교수 후보자를 추천하도록 의뢰받은 알베르토에 의해 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1252년 가을 토마스를 맞이한 파리대학 신학과는 환영이나 우호적인 분위기와는 상당히 멀었고, 오히려 적의에 차 있었다. 반 도미니꼬회 운동의 배경에는 교구 성직자로 이루어진 교수단과 수도회(시토회, 가르멜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꼬회)간의 반목의 역사가 있다. 교구 성직자 교수들의 반발에 대해서는, 수도회 교수단들이 대학의 규칙이나 관행보다는 수도회 방침을 우선시키는 경향(파업불참)과 교황이 파리대학을 자신의 영향 아래 두려하는 것에 봉사와 협력의 자세 등이 이유로 거론된다. 이러한 상황은 급기야 수도회(도미니꼬,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대해 강좌수 제한 규정, 선서를 거부하는 교수들(수도회 소속)을 교수단으로부터 추방한다는 결정까지 나왔다. 특히 도미니꼬회에 대한 공격은 언론이나 문서로 그치지 않았고, 도미니꼬회 수사들은 교수 성직자들(생타무르기욤, 1272년 사망)과 그들을 추종하는 학생들의 폭력이 두려워서 먹을 것을 구하러 수도원 밖으로 나갈 수 없어 국왕 루이 9세가 수도자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한 때는 경비병을 주둔시켰을 정도였다.

 

1252년 토마스는 성서학 강사로 임명되어 이사야서에 관한 강의를 하였다. 토마스의 강의내용은 성서에 관한 상세한 주석을 위한 입문 또는 준비로써의 역할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며 때로는 중요한 개념에 관해 상당히 자세한 설명을 하는 일도 있었으나 오로지 성서의 자구에 관한 간단한 해설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의 예언적인 현시에 관한 강의는 훗날 ‘진리론’과 ‘신학대전’에서 상세히 고찰되고 있다. 1253년 명제론집 강사에 임명되어 1256년까지 강의를 맡았다. 토마스는 강의 때에 새로운 주제를 도입하여 해결의 새로운 방법을 찾고 해결을 뒷받침하기 위한 새로운 논증을 창출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경탄하고 면학에의 열의를 불태웠다.”고 작가들은 적고 있다.

 

그러나 파리대학에서의 수도회 교수단(특히 탁발 수도회)에 대한 반대파의 움직임은 여전히 강력했다. 그들은 탁발 수도회에게 “육체노동은 않고 희사에 의존하는 것은 복음에 따라 완전한 생활 목표를 한다는 주장과 어울리지 않으며 사회 골치거리로 전락한다”며 거세게 공격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파의 움직임은 1256년 10월 기욤이 쓴 ‘최근의 위험에 관하여’가 로마에서 단죄되어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에 의해 파리에서 추방되고 반대파들이 자기들의 패배를 인정하고 탁발 수도회에 대한 공격을 그칠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토마스와 보나벤투라를 교수 공동체에 받아들임으로써 일단락되었다.

 

1259년 6월 도미니꼬회의 방침에 따라 교수직을 물려준 토마스는 파리와 쾰른의 중간에 있는 발렌시안느에서 열린 도미니꼬회의 총회에 출석토록 지시받았다. 그 이유는 도미니꼬회 내부의 신학, 철학의 연구교육에 관한 근본 방침을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회의의 기록을 보면 도미니꼬회가 학문 연구의 수준을 높이고 유지하는 데에 얼마나 열심이었는가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예컨대, 도미니꼬회의 대학에 파견되어야 할 학생의 자격, 교수의 선정에 관한 엄격한 조건, 교수는 그 직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일체의 잡무에서 해방되어야 할 것임이 규정되어있다. 신학자 사이에서는 세속의 학문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과 불신이 보였던 당시의 전반적 상황에 비추건대, 이는 하나의 영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알베르토와 토마스의 생각이 강하게 반영되었음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1260년 9월에 나폴리에서 열린 로마 관구의 회의에 출석하기까지의 그의 행적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파리대학 교수를 그만둔 후 로마의 교황청 소재지에 있는 도미니꼬 수도원의 강사를 지내고, 교황청을 이전시킴에 따라 거처를 옮기며 교황청 신학고문으로서의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토마스는 1260년 이후, 이탈리아 각지에서 열린 관구회의에 출석할 의무가 주어졌다. 토마스는 그 생애에 걸쳐 스승 알베르토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 같으나 수도회 고문이 된 그에게는 여러 사람들(교황, 도미니꼬회 총장, 군주나 영주에서부터 동료, 기사)로부터 많은 강의 요청이 들어와 있었다. 

 

1264년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성체축일을 제정할 것을 포고함에 있어서 토마스에게 당일 미사의 전례를 포함하여 성무일도를 만들 것을 명하였다. 토마스는 1265년 아나니에서 열린 도미니꼬회 로마 관구 회의 결정에 따라 새로운 신학대학을 산타 사비나 수도원에 발족시켰다. 이 학교는 신학 외에 철학부문을 갖춘 종합적인 대학이 아니라 교수 토마스를 중심으로 로마 관구의 각 수도원으로부터 파견된 수도회자들로 이루어지는 소규모의 연수센터였다. ‘신학대전’의 제 1부를 다 썼을 즈음 토마스의 이탈리아 체제는 끝나고, 약 5년간에 걸쳐 제 2부는 파리에서, 다시 미완으로 끝난 제 3부는 나폴리에서 쓰게 된다. 애초에 초학자를 위한 신학입문서로서 쓰여진 신학대전은 16-17세기 이후는 엄청난 주석서로 쓰여졌다. 그러나 그러한 주석가들에 의해 신학대전의 기본사상이 이미 해명된 것이 아님은 오늘날 토마스 학자들 사이에 학파가 형성되어 있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보여주는 대로이다.

 

1272년 봄, 파리를 떠난 토마스는 피렌체에 도착한다. 6월 12일부터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수도원에서 열린 도미니꼬회의 총회, 로마 관구 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이다. 관구 회의는 토마스에게 새로운 대학을 설립하도록 일임했다. 당시 로마는 쇠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는데 비해 나폴리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의 도움으로써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활기 넘치고 있었으므로, 토마스는 나폴리를 대학 설립의 장소로 선택했다. 그는 1272년 9월부터 나폴리 대학에 인접한 도미니꼬 수도원에서 강의를 개시했다. (토마스 시성을 위한 조사회에서의 전한 바에 의하면) 나폴리의 거의 모든 시민이 토마스의 설교를 들으려고 운집했다고 한다.

 

1273년 부활절 끝무렵, 토마스는 다음 해 5월 7일부터 리옹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교황 그레고리오 10세 (1271-1276)로부터 공식 요청을 받았다. 이 제 14차 공의회의 주요 의제는 동방 그리스 정교회와 서방 라틴교회와의 재결합이였기 때문에 토마스는 우르바노 4세의 요청으로 저작한 ‘그리스인의 오류를 반박함’을 지참하도록 명을 받았다고 한다. 토마스는 동료 레지날도와 다른 수사들을 데리고 아픈 몸으로 여행을 나서다가 길로 나와 있던 나무가지에 머리를 강하게 부딪혀 거의 기절하여 일어설 수가 없었다. 토마스 일행은 그대로 여행을 계속하면서 몬테카시노, 아퀴노를 지나 로카세카 성에 들른 후 북쪽으로 향했다. 이 때 토마스는 쇠약과 피로가 심해져 병이 악화되고 식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작가들은 적고 있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달은 토마스는 세속의 집에서 죽음을 맞기를 바라지 않아 이전부터 초대를 받고 있었던 거기에서 가까운 시토회 수도원으로 옮겼다. 이 수도원에는 토마스가 그 생애의 마지막 10여일을 보냈다고 전해지는 객실이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서 토마스는 마지막으로 수도자들의 요청으로 구약성서의 ‘아가’ 강해를 했다고 하는데 그 사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토마스는 일요일에 대수도원장(테오바르도) 손으로부터 성체를 영하고 신앙을 고백했다. 그리고 1274년 3월 7일 수요일 이른 아침에 토마스는 숨을 거두었다.

 

 

II.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

 

토마스는 성서 가운데 난해한 곳을 만나면, 단식하고 기도하면서 그것을 이해하고자 힘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토마스의 악필은 유명하다. 그 문자에는 ‘판독 불가능’하다는 별명이 붙었을 지경이다. 그래서 이미 첫번째 파리 대학 교수 시절부터 그의 곁에는 늘 몇 사람의 필기자가 딸려 있어서, 그의 저작 활동을 돕고 있었음이 알려져 있다. 도미니꼬회는 일찍이 ‘동료’라는 제도를 두고서, 교수나 연구에 종사하는 이들이 잡무에서 가급적 해방되도록 조치했던 것이다.

 

 

1. 토론

 

토론에는 통상의 수업의 일환으로서 행해지는 ‘정기 토론(또는 정규 토론)’과 성탄절과 부활절 전주에 일반 공개로 행해지는 ‘임의 토론(또는 자유 토론)’의 두 가지가 있었다.

 

 

2. 진리론

 

이 「진리론」은 “진리에 관하여”라는 제 1문제로부터 시작되는데, 이어서 신의 앎, 이데아, ‘말’, 천사의 인식, (인간) 정신 등, 주로 인식에 관계되는 문제가 제 20문제 “그리스도의 영혼의 앎”까지 언급되어 있다. 제 21문제 “선에 관하여”의 다음에는 주로 욕구에 관한 문제가 제 26문제 “영혼의 정념에 관하여”까지 고찰되며, 최후의 세 문제(제 27-29문제)에서는 은총의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 하느님으로부터 만물의 발원, 만물의 정점인 이성적 피조물의 하느님에의 귀환, 이 회귀의 ‘길’로서의 그리스도라고 하는 구상에 기하여 배치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여기서 토마스는 진리의 개념을 가장 중요한 줄거리로 삼았다고 말할 수 있고, 이는 나중에 ‘신학대전’에서 성숙한 형태를 띠게 된다. 여기서는 그의 독자적인 신학적 종합의 구상을 미리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3. 교사론

 

토마스는 인간에 의한 새로운 지식의 획득은, 모든 확실한 지식의 기초인 자명한 제 1원리가 그것에 의해 인식되는 이성의 빛이 신에 의해 우리 안에 심어져 있다는 것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며, 인간에 의한 모든 교수 활동은 이 빛 덕분에 유효한 것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 의미에서는 신만이 ‘내적으로, 그리고 주로’ 가르치는 자인 한에서, 아우구스티노의 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신만이 가르친다고 하는 아우구스티노의 말은 인간이 ‘외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며, 신만이 ‘내적’으로 가르친다는 의미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토마스는 지적한다.

 

 

4. 페트루스의 108개 명제

 

총장(요하네스)으로부터 동료의 ‘이단적’ 견해를 검토하라는 명을 받은 토마스는 이 108개의 명제 하나하나에 관하여 엄정히 그리고 주의 깊게 논평한다. 전체를 통하여 토마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확실히 페트루스에게는 개념 규정의 불명확성과 용어상의 혼란은 있으나 그러한 것들을 ‘이단적’이라고 고발하는 것은 오히려 고발자측의 이해의 부족과 악의를 나타내는 것이며, 중상의 의도가 빤하다는 것이다.

 

 

5. 대 이교도 대전

 

토마스 자신은 이 책의 제 1권의 제 1장에서, 지혜있는 이의 직무는 최고의 의미에서 진리인 신적 진리에 관해 숙고하고 진술하는 것, 그리고 진리에 대립하는 오류와 싸우는 것이라고 서술한 후, 제 2장에서 인간이 종사하는 모든 탐구 가운데 지혜의 탐구야말로 가장 완전, 고귀, 유익하고 즐거운 것이라고 하며 지혜의 탐구를 찬미한다. 이 책의 집필에 나선 것은 라이문도의 요청이었을지도 모르나 이 책 속에서 토마스는 여러가지 형이상학, 인간학, 윤리학적 문제에 관하여 다른 어떤 저작에서도 볼 수 없을 만큼 상세히 철학적 논의를 소개하고 있으며, 그것이 이 책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체로서 「대 이교도 대전」은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진리를 해명하고, 이론을 반박한다는 호교적 색채가 강한 신학적 저작이라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6. 신학대전

 

제1부 거룩한 가르침, 유일한 신, 삼위 일체인 신, 창조(악의 고찰을 포함), 천사, 인간, (만물의) 통치. 

제2부(제1편) 인간의 궁극 목적 및 지복, 인간적 행위, 정념, 습관과 덕, 악덕과 죄, 법, 은총. 

제2부(제2편) 대신덕(신덕, 망덕, 애덕), 윤리덕(지혜, 정의, 용기, 절제), 예언, 관상적 생활과 실천적 생활, 직무와 신분. 

제3부 그리스도, 성사(제 90문제, 고해 성사의 중도까지).

 

‘신학대전’은 모두 512개의 문제를 포함하는데, 주목할 말한 것은 토마스 자신이 ‘윤리적인 사항’을 논하는 부분이라 하고 있는 제 2부가 303개의 문제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토마스가 제 3부를 예정대로 썼다고 해도, 양적으로 ‘신학대전’의 절반을 차지하게 된다. 중세 고딕 대성당이 오늘날도 늘 새로운 찬미와 경이의 원천이듯이 ‘신학대전’도 허다한 새로운 발견의 가능성을 감추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7. 아베로에스파와의 논쟁

 

‘아베로에스파’라는 명칭은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태어난 이슬람 사상가 이븐 루시드(1126-1198) - 라틴세계에서는 아베로에스(Averroes)로서 알려져 있다 - 의 해석을 최상의 것으로 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이해하는 데 열중했던 데서 생겨난 것이다. 토마스가 아베로에스파 내지 그들이 해석한 한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하여 격렬하게 반대한 것은 당연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1) 모든 인간에게는 단 하나의 지성밖엔 존재하지 않는다(따라서 개개의 인간이 스스로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2) 의지는 필연성에 의해 지배된다, (3) 세계는 영원하다, (4) 개개의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 아니다, (5) 신의 섭리는 개개 인간에게는 미치지 않는다는 등 신앙의 진리와 정면에서 대립하는 명제를 철학적으로 논증된 사항 - 그들은 그것을 ‘진리’라고는 부르지 않았지만 - 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아베로에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왜곡자’라 부르는 게 적합한 것이다.

 

 

8. 아우구스티노파와의 논쟁

 

아우구스티노파와의 논쟁 속에서 토마스는 ‘세계의 영원성에 관하여’라고 제목을 붙인 논쟁적 저작을 발표하였다. 이 저작에는 “투덜거리는 이들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것이 보통인데, 실상 토마스의 논점은 미묘하기는 하나 극히 단순하며, 어떤 것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과, 그것이 늘 존재했다고(그 의미에서 영원하다고) 하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다고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토마스는 신앙과 신학을 철학의 우쭐대는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는 가장 탁월한 방법으로 스스로 철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9. 토마스의 설교

 

그리스도 신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 첫째로, 믿음으로 영혼은 하느님과 맺어지게 됩니다. 그 까닭은 믿음으로 영혼은 말하자면 하느님과 결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둘째로, 신앙으로 우리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다름 아닌 하느님을 아는 것이므로, 주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그들이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요한 17, 3)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 셋째로, 믿음은 현재의 생활을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착하게 살려면 착하게 사는 데 필요한 것을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 넷째로, 믿음으로 우리는 유혹에 이길 수 있기 대문입니다. 히브리서(11, 33)에도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여러 나라를 정복했다”고 합니다. 유혹은 악마, ‘세속’이나 ‘육신’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악마는 형제 자매 여러분들이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을 지지하지 않도록 유혹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으로 배제됩니다.

 

 

10. 저작의 중단

 

12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오 축일은 수요일에 해당하였는데, 이 날 아침 토마스는 여느 때처럼 성 니콜라오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러나 미사 도중 “이상한 변화를 느끼고”(카푸아의 바르톨로메오의 증언), 미사 후 토마스는 쓰는 것도 구술하는 것도 일체 그만두고 말았다. 제 90문제 제 4항으로 영영 붓을 놓아 버린 것이다. 토마스는 동료 레지날도의 “예의를 망각한 많은 힐책에” 대해,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은 결코 입밖에 내지 말 것을 서약시킨 후에, “내가 보고, 내게 계시된 사항에 비하면 내가 쓴 것은 모두가 나에게는 지푸라기처럼 보인단 말이네” 하고 답하였다는 것이다. “지푸라기” - 그것은 성서의 자구적인 의미를 가리키는 데 쓰였다고 한다 - 라는 말은 확실히 하느님의 신비를 탐구해 마지않는 인간의 숙명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탐구 노력이 그 궁극의 갚음(즉 신비의 직시)을 얻었을 때, 신비에로 이끌었던 말(그 때까지 탐구에 의해 생명과 힘이 불어넣어진 말)이 힘 없는 것이고 한낱 말에 불과하며, 지푸라기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III. 결론

 

토마스의 장례는 수도원 대성당에서 치러졌으며, 테라치나의 주교, 베네딕토회 · 도미니꼬회 · 프란치스코회의 수도자들, 그리고 캄파냐 지방의 많은 영주들이 참석하였다. 대성당 중앙 제단 곁에 토마스의 유해가 매장된 후, 레지날도 수사는 주위의 권유로 추도 설교를 하였다. “토마스에게 성인칭호를”이라는 운동이 정식으로 시작된 것은 1294년, 도미니꼬회의 시칠리아 관구가 로마 관구로부터 독립한 해이며, 제 1차 증인조사는 1319년 7월 21일부터 9월 18일까지 나폴리의 대주교관에서, 제 2차는 1322년 11월 10일부터 20일까지 포사누오바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있었다. 이른바 ‘악마의 대리인’이 제출한 시성 반대의 논거는 토마스가 생전에 행한 기적 수가 적다는 점이었는데, 교황 요한 22세는 “토마스는 그가 교수로서 해결한 문제의 수만큼 기적을 행한 것이다.”라고 말해 이 반대론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와 같이 시성을 위한 절차가 모두 끝나, 토마스가 교회의 성인이라고 공식으로 선언된 것은 1322년 7월 18일 아비뇽의 노트르담 데 돔 교회에서였다.

 

오늘날 우리 생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존재관과 인식관은 중세 스콜라 학의 다양한 입장 가운데 하나에서 유래하는 것이며, 더욱이 그러한 입장이 근대, 현대 사상으로 받아들여짐에 있어서, 그 이전의 오랜 지적 · 정신적 전통을 뛰어난 방법으로 종합한 토마스의 사상은 거의 완전히 망각되었다. 그리고 이제 이와 같은 실수에서 출발한 근대 사상의 답보 상태에 직면하여, 또 하나의 선택지로서의 토마스 사상에 눈길을 돌리는 데는 뭔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아니한가? 

 

 

참고문헌 

 

- 와이스헤이플, OP., “토마스 아퀴나스 수사(생애, 작품, 사상)”, 성바오로 출판사 1998. 

- 이나가키 료오스케, “토마스 아퀴나스”, 도서출판 새남, 1995. 

- 요셉 피퍼, “토마스 아퀴나스. 그는 누구인가”, 분도출판사, 1995. 

- 코플스톤 F.C., “토마스 아퀴나스”, 성바오로 출판사, 1993.

 

 

추천 사이트 

 

* 토마스 아퀴나스 : www.op.org/DomCentral/study/TA.htm  

* Aquinas : www.aquinas-multimedia.com  

* Theology on line : www.op.org/aquinas/theology.htm  

* Theological library : www.mcgill.pvt.k12.al.us/jerryd/cathmob.htm  

* Religious studies : www.religion.ucsb.edu/resource/othrdept.html  

* The Eckhart Society : http://www.op.org/eckhart  

* Rosary Center : http://teleport.com/~rosary

 

[출처 : 도미니코 수도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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