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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동정성모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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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2-15 ㅣ No.53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동정성모회 (상)

 

 

1964년 6월 김포공항에 도착한 한국인 수녀 5명과 독일수녀 4명. 이들은 독일 뮌헨에서 교육받고 처음으로 한국에 진출한 동정성모회원들이다.

 

 

창립과 영성

 

동정성모회는 영국 출신 메리 워드(1585~1645)가 1609년 프랑스 생토메에서 하느님 사랑의 이상을 실천하고자 모여든 젊은 여성들과 함께 창설한 최초의 여자 활동 수도회다.

 

메리 워드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비추심은 영성사의 전환점이 된 은사였다. 곧 활동을 보조적 수단이 아니라 수도생활의 양식으로 도입해 사도적 여자 활동 수녀회가 탄생된 것. 따라서 동정성모회는 교횡직속 수도회로서 세상사람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체험을 세상 사람들과 나눔으로써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 투신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동정성모회는 메리워드가 창설 당시 예수회가 채택하고 있던 이냐시오 성인의 회헌을 따르라는 헌시를 받음으로써 「예수회」로 이름지었으나 당시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못해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친근한 벗, 동반자가 된다는 의미에서 「동정성모회」로 명명하게 됐다.

 

17세기 당시 영국 가톨릭 교회는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왕권에 의해 국교로 선포된 성공회가 부흥함으로써 수난과 박해에 직면하게 된 가톨릭 교회는 지하로 숨어들었고, 많은 교회 단체와 수도회가 폐쇄당했다.

 

메리 워드는 21세 되던 1606년 예수회 홀트비 신부의 소개장을 가지고 당시 스페인령 플랑드르의 작은 도시 생토메로 갔다. 그곳은 영국인들이 가톨릭 신앙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해협을 건너 대륙으로 이주했던 영국인 가톨릭 신자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유럽 대륙의 여러 도시들 중 하나였다. 가장 엄격한 수도생활을 원한 메리는 관상 글라라회에 입회했으나 이 봉쇄 수도원에 살면서 하느님의 현시를 받고 수도원의 문을 나서게 된다.

 

메리 워드가 받은 새로운 성소의 빛은 수도생활의 「거룩함」이 세상 안의 「활동」으로 실현되는 것이었다. 즉 여자 수도자들도 봉쇄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 속에서의 활동을 통해 세상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삶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구현시켜 나간다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그 여성들은 수도자라고 지칭하고 있으나 전통적인 의미의 수도자이기를 원하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메리 워드와 초창기 회원들이 기소 당한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동정성모회는 당시까지는 수도생활의 일반적인 형태로 받아들여진 봉쇄 관상생활 보다는 내적 관상 결과로 교회에 봉사하는 사도직 활동을 부여받았다. 따라서 수도회 회원들은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봉사하기 위한 영적인 자유, 진실(성실), 정의를 내적인 자질로 갖추도록 불림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메리 워드의 이러한 성소의 빛은 수도원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수도자의 호칭을 받을 수 없다는, 오로지 관상과 봉쇄만을 인정하던 당시 교회법에 크게 위배돼 결국 1631년 교황청은 이 수도원을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인고의 세월을 감내해오던 동정성모회는 메리 워드 사후에 새로이 부활됐고 신앙의 옹호와 전파를 수도회의 기본 목표로 설정, 특히 여성들의 교육에 매진하고 있다. 유럽 지역에서 최초로 여성들을 위한 근대식 학교 교육을 시작한 이 수도회는 여성교육의 전통을 확립하는 한편 전교활동과 의료사업 등 세계 곳곳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파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2년 11월 24일, 마승열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동정성모회 (하)

 

 

동정성모회 수련자들이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사도직 활동

 

수도회 창설 당시에는 「자선」과 「교육」 영국에서는 신앙 수호를 위해 「성사생활로 인도하는 것」이 주요한 활동이었다. 

 

초창기 회원들은 혼란된 가치관과 종교 분열로 인해 신앙을 저버린 이들을 성사 생활로 인도하며,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힌 이들을 방문하고 용기를 북돋았다.

 

특히 로마를 비롯해 유럽 여러 곳에서 교육 역사상 최초로 현대식 교육과정의 학교를 세우고 어린이들과 젊은 여성들에게 흔들림 없는 신앙인으로서 책임감 있는 사회인이 되도록 가르쳤다. 이후 약 380여년동안 전세계 곳곳으로 확장하며 점차 「교육 수도회」로 알려지게 됐다.

 

현재 한국 관구가 속한 로마 총원의 여러 관구들은 6개 대륙에서 그 지역 사회에 적합한 활동을 펴고 있으며, 법률로써 그리스도교로 개종이 금지된 네팔과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전세계 200여 수녀원에 약 2500여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동정성모회의 한국 진출은 1952년 독일에서 유학중이던 예수회 박고영 신부가 이 수도회의 독일 뮌헨 분원이 전개하고 있는 교육 사업을 보고 한국 진출을 요청한데서 비롯됐다. 이후 동정성모회는 창설된 지 365년, 한국인이 입회한 후 9년째되던 해인 1964년 5명의 한국인 수녀들과 2명의 독일인 수녀들이 창립회원으로 한국에 첫 발을 내디뎠다.

 

1966년 4월 당시 대전교구청과 인접한 대흥동 520번지에 본원 건물을 신축하고 대전교구장 황민성 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가진 한국 관구는 1965년 3월에 대전 성모초등학교와 성모여자중학교를 개교함으로써 본격적인 사도직 활동을 시작했다.

 

적극적인 사도직 활동을 통해 꾸준한 발전을 거듭해온 한국 동정성모회는 진출 9년 후인 1973년 10월 21일 독립된 관구로 승격, 초대 관구장으로 박기주 수녀가 취임했다.

 

특징적인 것은 진출 시작부터 수련장, 학교장, 원장 등 모든 주요한 책임을 젊은 한국인에게 맡겼을 뿐 아니라 초대 관구장으로 박수녀를 선임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각 나라의 문화 풍토를 존중하는 토착화 정신과 본국인에게 책임을 맡기는 자율적 운영이라는 동정성모회의 특성을 잘 보여는 부분이다.

 

또한 1993년 박기주 수녀가 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한 국제 수도회 역사상 유례없이 총장으로 선출되는 경사를 맞기도 했다. 한국인 회원만으로 구성된 한국관구는 본부를 대전에 두고, 수련소는 서울에 두어 양성과 영성의 중심지로 삼고 있다.

 

218명의 회원이 있는 한국 동정성모회는 이곳 진출의 동기가 교육이었던 만큼 국내외 정규 학교는 물론 교구의 교육국 및 지역에 따라 사회교육 시설에서 교육 활동을 하며 더불어 의료, 사회 복지, 특수 지역 선교에 투신하고 있다.

 

한국관구는 교육 사도직을 위해 대전 성모초등학교, 대전 성모여자고등학교, 서울 성모유치원, 청주교구 보은 성모유치원, 전주교구 연합회?서강대학교 학생사목 등 여러 곳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밖에도 나환자 정착촌인 익산시 왕궁면 남촌마을 공소, 무의탁자들을 위한 무료급식소인 「대전 성모의 집」 「수원 메리 워드 공부방」 등을 각각 운영하고 있으며, 대전교구청을 비롯한 8개 교구 22개 본당에 수녀들을 파견, 선교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2년 12월 1일, 마승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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