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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천주섭리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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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2-19 ㅣ No.59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천주섭리수녀회 (상)

 

 

천주섭리수녀회는 가톨릭 사회정의 운동 창시자라 불리는 독일의 임마누엘 폰 케틀러 주교에 의해 설립됐다. 원내는 케틀러 주교.

 

 

창립과 영성

 

『주님, 저희가 저마다의 재능을 다하여 책임있는 청지기로 충실히 살아감으로써 세상에 주님의 섭리가 더욱 더 드러나도록 헌신하겠나이다. 시대의 악과 불의에 용감히 직면함으로써 세상에 주님의 섭리가 더욱 더 드러나도록 헌신하겠나이다. 하느님 백성의 기쁨과 고통에 온 마음으로 동참함으로써 세상에 주님의 섭리가 더욱 더 드러나도록 헌신하겠나이다. 이땅에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고자 애쓰는 선의의 이웃들과 희망차게 협력함으로써 세상에 주님의 섭리가 더욱 더 드러나도록 헌신하겠나이다』

 

매일 매일의 성무일도 때마다 천주섭리수녀회 회원들이 바치는 이 기도문은 수녀회가 지닌 영성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천주섭리회 수녀들이 지향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지니셨던 마음(필립 2, 5참조)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 정신을 추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고자 하며 하느님 뜻을 쫓아 따르기 위해 힘쓰는 삶」이다.

 

곧 그러한 정신 안에서 섭리의 하느님에 대한 증거를 회원들의 봉사와 사명을 통해 세상에 드러내고 철저성과 인내심으로 하느님 나라를 확장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섭리 그 자체는 하느님의 의지, 지혜와 영원하고 동일하다. 비록 섭리가 실체적인 하느님 일이긴 하지만 하느님은 중간자들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시고…』라는 「섭리」에 대한 정의처럼 천주섭리수녀회 탄생은 가톨릭 사회정의 운동 창시자라 불리는 독일의 임마누엘 폰 케틀러 주교를 통해서였다. 케틀러 주교가 수녀회를 창립하던 시기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했던 사회적 배경과 맞물려 있다.

 

그는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생산 방법과 수단이 바뀐 사회 속에서 계층간 이해를 둘러싸고 빚어지는 여러가지 갈등과 혼란, 그리고 산업화가 진행돼 갈수록 심각해 지는 것은 노동자들의 비인간화라고 보았다. 노동자들이 생산 증대만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중 어린이들과 여성들의 노동력 착취에 대해 고심했다.

 

특히 어린이들의 교육 복지 및 도덕성 교육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케틀러 주교는 그 문제 해결은 교육과 간호 사업에 종사하는 수녀회가 맡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케틀러 주교는 노동자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표명하고 교회의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했고, 또 당시 교회를 위협하던 무신론에 대항, 교회와 인간의 참된 자유를 위해 투신하는 등 대사회적인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891년 교황 레오 13세의 「노동헌장」 반포는 이러한 케틀러 주교의 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한 상황 안에서 케틀러 주교는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에 대한 봉사 교육이야말로 시대적 필요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판단했고 마침내 1851년 9월 29일 독일 마인츠 휜튼에서 「천주섭리 교육 간호 수녀회」가 창설됐다.

 

천주섭리수녀회의 카리스마에는 이러한 케틀러 주교의 삶을 특징짓는 교회에 대한 충성, 사회적 관심 및 참여 그리고 참되고 올바른 것에 대한 두려움 없는 옹호를 반영코자 하는 노력이 뒤따른다. 또 초대 원장이었던 마리아 드 라 로쉬 수녀가 활동생활과 관상 정신을 조화시킨 모범과 겸손 온유 단순성 깊은 신앙과 온전한 개방성을 본받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3년 3월 2일, 이주연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천주섭리수녀회 (하)

 

 

수녀회는 봉사와 교육 등 시대적 필요에 응답하며 사도직을 시작했다.

 

 

사도직 활동

 

독일 마인즈교구 케틀러 주교에 의해 1851년 9월 29일 성미카엘 대천사 축일에 「천주섭리 교육 및 간호수녀회」 이름으로 핀튼(Finthen)에서 창립된 천주섭리수녀회는 사회적 병폐로 인해 영혼과 육신이 점점 망가져가는 사람들, 특히 사회의 소외계층들-농민, 도시빈민, 어린이들, 여자들, 그리고 병자들에 대한 봉사와 교육이야말로 시대적 필요에 응답하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응답」이라는 판단으로 수도회의 사도직을 시작했다.

 

초대원장은 프랑스인이며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마리 드 라 로쉬 수녀였고 4명의 지원자로 출발한 수녀회는 케틀러 주교 뜻에 따라 여성교육 특히 농촌지역의 여성교육에 참여했고 병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천주섭리수녀회의 모태인 첫 관구는 마인즈교구 주보성인 마르띠노 성인의 이름을 따게 되었고, 이 성마르띠노관구는 1861년에서 1871년 사이에 24개의 학교, 4개의 학원, 5개의 직업학교, 4개의 유치원, 19개의 선교직, 간호사 등 내외적으로 급속히 성장했다.

 

그러나 1872년 3월 11일 주 정부가 학교의 모든 통치 권한을 갖는다는 프러시안 학교 법이 통과되면서 많은 학교가 문을 닫았고 수녀들은 학교를 떠나는 등 파란이 일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독일 당국으로부터 추방 당해 미국서 선교활동 중이던 예수회 소속 포트가이서(Pottgeisser) 신부가 미국 진출을 제안했고 1876년 7월 7일 6명의 회원이 미국으로 출발했다.

 

독일과 미국교회에서 교육 병원위주 사도직을 펼치던 수녀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 쇄신의 바람을 갖게 됐고 다양한 사도직에 관심을 두었다.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사도직을 활발하게 전개했고 난민과 청년들을 위한 사업에도 힘을 썼다.

 

이후 페루, 푸에르토리코 등으로 사도직 활동을 넓힌 수녀회는 1964년 1월 대전교구 백남익 신부 도움으로 한국인 지원자 13명의 수련을 시작하면서 한국교회와 인연을 맺었다.

 

그 이듬해 미국 피츠버그 관구에서 빅토린 베로스키 수녀와 2명의 수녀들이 한국에 와서 언어를 배우며 본격적인 한국 진출을 준비했다.

 

1967년 로마에서 첫서원을 한 한국 수녀들 몇몇은 독일로 가서 간호교육을 받게 되었고 한국수녀원에서는 1975년도 총회에서 빅토린 수녀가 초대 성요셉 지부 지부장에 선출됐다. 한국관구 승격은 1995년 총회를 통해 이뤄졌다.

 

한국관구의 주요 활동은 무의탁 노인 양로원(애덕의 가정), 불우한 노인들, 독거노인들을 위한 사랑의 이웃집 운영, 20군데의 본당, 장애인 복지관, 시립양로원, 어린이집, 간호대학 등이다.

 

천주섭리수녀회는 1993년부터 도미니카 공화국 산타도밍고에 미국, 독일 그리고 푸에토리코 지부 회원들이 모인 국제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으며 극빈지역 및 환경오염지역 주민들을 돌보아 주고 있다. 최근에는 5∼12세에 이르는 어린이들이 마약에 손대지 않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다.

 

문화와 언어는 달라도 전 세계에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삶을 실천코자 하는 섭리회 회원들은 『아무리 목표와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높은 이념을 성취하기 위해 힘써 노력하며 사는 이 시대를 나는 사랑합니다』고 하신 창립자 정신을 가슴에 새기며 희망의 삶을 사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3년 3월 9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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