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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가톨릭 문화산책: 가톨릭 문학 (4) 한평생 학생이었던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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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6-08 ㅣ No.167

[가톨릭 문화산책] <20> 문학 (4)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원했던 시인 - 한평생 학생이었던 윤동주


수치심, 죄의식의 십자가에서 피어난 불멸의 시

 

 

광복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이었다. 동녘이 터오기 전인 새벽 3시 36분, 윤동주는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 형무소 독방에서 불현듯 몸을 일으켰다. 한겨울인데 몸은 불덩이였다. 아! 외마디 비명을 높이 지르고는 벌렁 뒤로 나자빠졌다. 바로 그 순간 숨이 멎었다. 만 29세, 이제 막 봉오리를 맺은 한 송이 꽃을 일제는 뚝 분질렀고, 화장터에서 몇 줌의 뼛가루로 만들었다. 용정의 묘지에 묻혀 있는 것은 후쿠오카 화장터에서 윤동주 아버지 윤영석씨가 건네받은 유골함이다.

 

 

광복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이었다. 동녘이 터오기 전인 새벽 3시 36분, 윤동주는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 형무소 독방에서 불현듯 몸을 일으켰다. 한겨울인데 몸은 불덩이였다. 아! 외마디 비명을 높이 지르고는 벌렁 뒤로 나자빠졌다. 바로 그 순간 숨이 멎었다. 만 29세, 이제 막 봉오리를 맺은 한 송이 꽃을 일제는 뚝 분질렀고, 화장터에서 몇 줌의 뼛가루로 만들었다. 용정의 묘지에 묻혀 있는 것은 후쿠오카 화장터에서 윤동주 아버지 윤영석씨가 건네받은 유골함이다.

 

필자가 윤동주의 발자취를 더듬어 중국의 명동과 용정 등지를 찾아본 것은 1999년이었다. 이때 그의 묘소를 못 보고 와서 다시 가서 보고 온 것이 2003년이었다. 두 번의 답사를 회상하면서 시인의 생애와 시 세계를 더듬어본다.

 

 

한ㆍ중ㆍ일 세 나라에서 기리는 시인

 

대한민국 사람치고 윤동주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본의 고등학교 검인정 교과서에 1990년부터 윤동주의 '서시'가 실려 일본인들도 상당수 알고 있는 시인이다. 일본에는 윤동주 시를 연구하는 학회와 민간인 단체 수가 한국보다 많다고 한다. 오오무라 마스오 같은 일본인 학자는 우리가 중국과 수교하기 전인 1985년, 북간도 용정에 윤동주의 묘와 비문이 있음을 한국 언론계와 학계에 처음 소개했고, 「윤동주와 한국문학」 같은 책도 펴낸 바 있다. 윤동주의 성장기와 행적을 중심으로 한 연구는 중국 연길의 연변대학을 중심으로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등이 발족돼 윤동주문학상을 제정하는 등 여러 가지 사업을 하고 있다. 작년에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윤동주문학관이 세워졌다. 윤동주는 연희전문(연세대학의 전신)에 다니고 있을 때 소설가 김송의 집에 하숙했는데 바로 인왕산 근처였다. 하숙한 기간은 4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별 헤는 밤'과 '자화상' 등을 썼기에 문학관과 함께 '윤동주 시인의 언덕'도 조성돼 있다.

 

일본인 학자 오오무라 교수가 북간도 용정에서 발견한 윤동주의 묘.

 


늘 자신을 부끄러워했던 시인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아홉 살 때 명동소학교에 입학한 이래 많은 학교를 다녔다. 일본경찰에 체포될 무렵 교토 도시샤(同志社)대 영문과 학생이었는데 명동소학교 → 은진중학교 → 평양 숭실중학교 →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 연희전문 문과 → 동경 릿쿄(立敎)대 영문과 → 도시샤대 영문과를 다녔으니 3개국 7개 학교를 다닌, 평생 학생이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왜 그토록 자신을 부끄러워했던 것일까.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또 태초의 아침), "쳐다보면 하늘이 부끄럽게 푸릅니다"(길),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별 헤는 밤),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서시),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참회록),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사랑스런 추억)…. 수치심이야말로 윤동주의 가장 기본적인 심성이었다. 일본 유학시절인 1942년 6월 3일에 쓴 '쉽게 씌어진 시'에서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가기 위해 히라누마 도오슈(平沼東柱)라고 창씨개명을 했는데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학병과 징용으로 끌려가 죽을 고비를 넘기거나 죽어가고 있을 때 본인은 이름까지 고쳐가며 일본 유학을 가서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아 / 대학 노-트를 끼고 /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가고 있으니 몹시 부끄러웠을 것이다. 핍박받는 민족을 위해 떨쳐 일어나지 않는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고, 하느님 앞에 죄인이라는 죄의식도 뿌리칠 수 없었다. 개신교 장로교의 유아세례를 받은 윤동주의 '십자가'를 보자.

 

"쫓아오던 햇빛인데 / 지금 교회당 꼭대기 /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 전문)

 

총을 들고 독립운동에 자진해서 뛰어들지 못하고 있었지만 자기 나름대로는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시에서 묘사한 예수는 '괴로웠던 사나이'다. 전지전능한, 엄벌을 내리는 신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고뇌하는 한 명 지식인의 초상으로서 예수를 그려내고 있다. 윤동주는 인간에 대한 연민 때문에 괴로워한 예수를 따르겠다는 뜻으로 이 시를 쓴 게 아닐까. 시장에서 물건을 엎으며 가난한 사람과 함께했던 예수는 어찌 보면 혁명가였다. 예수는 자기 욕망대로만 살면 안 된다고 군중을 향해 맹렬히 꾸짖었던 사람인데, 그런 예수가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고 있다. 이 시에는 예수가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 나 또한 가겠다는 각오가 담겨 있다. 십자가상, 혹은 예수의 최후에 대한 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졌던 십자가를 나도 지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윤동주가 다닌 일본 도시샤대 교정에 세워져 있는 시비 앞에 선 필자.

 

 

윤동주와 송몽규의 죽음

 

윤동주보다 석 달 먼저 태어난 고종사촌 송몽규는 은진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중국 락양군관학교를 자기 발로 찾아간 애국지사였다. 도쿄로 유학 간 윤동주가 교토제국대 서양사학과에 다니던 송몽규의 "여기서 같이 공부하자"라는 말에 응해 교토로 가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비운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를 옮긴 뒤 요시찰 인물인 송몽규와 함께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자 일본경찰은 미행과 감시를 했고, 결국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다. 

 

두 사람 모두 독방에 갇혔다. 매끼 식사가 꽁보리밥 한 덩어리에 단무지 몇 조각과 묽은 된장국이 전부였다. 그런데 윤동주의 죽음이 생체실험용 주사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윤동주의 아버지와 같이 형무소에 가서 유해를 가져왔던 당숙 윤영춘은 '명동촌에서 후쿠오카까지'라는 수기를 발표한 적이 있다.

 

"몽규가 반쯤 깨진 안경을 눈에 걸친 채 내게로 달려온다. 피골이 상접하여 처음에는 얼른 알아보지 못하였다. 어떻게 용케도 이렇게 찾아왔느냐고 여쭙는 인사의 목소리조차 저세상에서 들려오는 꿈같은 소리였다. 입으로 무어라고 중얼거리나 잘 들리지 않아서 왜 그 모양이냐고 물었더니,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 하고 말소리가 흐려졌다." 

 

송몽규도 얼마 뒤인 3월 10일 형무소에서 의문의 죽음을 한다. 윤동주와 같은 시기에 같은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던 또 한 명의 독립유공자 김흥술이라는 분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5~10cc의 주사를 일주일 이상 맞으면서 암산 능력을 테스트 받았다고 한다. 간수가 수인번호를 부르면 큰 목소리로 복창을 해야 했는데 윤동주는 너무 가냘픈 목소리로 대답해 윤동주의 수인번호를 기억할 수 없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국의 차가운 독방에서 윤동주는 크게 부르짖고는 운명했다. 이 세상에 27년 2개월을 산 한 청년이 일본 형무소에서, 그것도 한겨울에.

 

 

윤동주의 생가와 묘소

 

윤동주 고향집 안쪽에는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비문의 표제가 '윤동주 생가 옛터'다.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1932년 4월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자 그의 조부는 솔가하여 룡정으로 이사하고 이 집은 매도되어 다른 사람이 살다가 1981년 허물어졌다. 1994년 룡정촌은 그 력사적 의의와 유래를 고려하여 룡정시 정부에서 관광점으로 지정하였다. 이에 지신향 정부와 룡정시 문련은 연변대학 조선연구중심의 주선으로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지원을 받고 국내외 여러 인사들의 정성에 힘입어 1994년 8월 력사적 유물로서 윤동주 생가를 복원하였다." 

 

생가는 이미 허물어졌고, 이후 생가와 흡사하게 생긴 집을 여기다 옮겨놓은 것이라 했다. 생가 터에서 볼 만한 것은 낡은 우물이었다. 우물 정자 모양의 나무로 되어 있는 데다 깊이가 상당해 시인의 '자화상'에서 본 그 우물과는 거리가 있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의 우물은 물이 거울처럼 보이는 우물이어야 하는데 윤동주 생가 터의 우물은 달과 구름이 비치기에는 너무 깊었다.

 

용정의 묘소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공원묘지를 한참 헤매다 '詩人尹東柱之墓'라는 비석을 발견했다. 일행 중 누군가 "술을 가지고 올걸"하고 말했지만 죽는 날까지 학생이었던 윤동주의 묘에 술을 뿌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모두 고개 숙여 묵념을 했다. 시인의 묘지가 수백 기 이국인 묘와 함께 공동묘지에 있는 것이 가슴 아팠다. 하지만 윤동주는 사후에 영광을 누리고 있고, 그 영광은 한국 시문학사와 더불어 영원할 것이다. 

 

[평화신문, 2013년 6월 9일, 이승하 교수(프란치스코, 중앙대 문예창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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