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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그리스의 바오로 사도 유적: 신화의 나라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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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5-23 ㅣ No.634

세계 교회 신앙유산 순례 - 그리스의 바오로 사도 유적


신화의 나라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수천 년을 이어오는 신화의 나라이며 서양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 서양의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그리스는 바오로 사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오늘날 인구의 98%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나라가 되었다. 바오로 사도와 관련된 그리스의 성지는 많지만 그중 유럽 최초의 필리피 교회유적지와, 바오로 사도가 선교의 실패를 맛본 아테네, 그리고 아레오파고스의 기억을 함께 나누고 싶다.

 

 

유럽의 첫 교회, 첫 그리스도인 성녀 리디아의 도시 필리피

 

성령의 인도에 따라 카발라(현재의 네아폴리스) 항구를 거쳐 마케도니아 지방에 첫발을 내딛은 바오로는 에냐시아 국도를 따라 20km 정도 떨어져있는 필리피 지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유다인들의 기도처를 찾아 성문 밖 강가에 이르러 그곳에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는데, 그 가운데 리디아라는 여자가 바오로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사도 16,11-15). 리디아는 소라고둥에서 채취한 물감으로 염색하는 자색 옷감의 생산지로 유명한 티아디라 출신의 상인이었다.

 

바오로 사도의 협력자인 성녀 리디아를 기념하는 경당은 늪지와 평야로 이루어진 들판 위에 있었다. 전통적인 그리스 정교회 모양의 아담한 경당 안으로 들어가니 입구에 큰 세례대가 놓여있고 제대를 향해 신자석이 둥글게 배치된 것이 특이했다. 제대 뒤에 성녀 리디아의 초상이 모셔져있다. 오른손을 펼쳐 들고 똑바로 앞을 향한 시선과 야물게 다문 입매에서 확신을 지닌 여장부의 풍모가 느껴졌다. 강가에서바오로 사도가 전하는 복음을 들은 많은 사람 중에 리디아만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신앙을 받아들였고 유럽의 첫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다. 자신을 그리스도께 인도한 바오로 사도를 돕고자 모든 것을 기꺼이 내놓은 리디아의 관대한 헌신은 성경에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경당에서 나와 들판으로 잠시 걸어가면 그 옛날 리디아와 많은 사람들이 오가던 지각티스 강변이 시내가 되어 흐르는 자리에 물고기 모양으로 지은 리디아의 세례터가 있다. 그곳에서 순례자들은 끊임없이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미사를 드린다. 냇가 옆으로 검은 흙이 아주 기름져 보이는 평야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리디아 경당에서 2km 정도 떨어진 평야에 기원전 358-354년경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 필리포스 2세가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붙인 필리피 도시 유적지가 있다. 바오로 사도가 활동하던 기원후 50년경의 필리피는 로마의 속주인 마케도니아의 도시로 인구가 20-30만 정도나 되었다고 한다. 유적은 대부분 로마 시대 또는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 대표적인 건물로는 디오니시우스 신전 터와 바오로 기념성당 터가 있다.

 

미완성에 그친 첫 번째 주교좌성당인 바오로 기념성당 터에는 당시의 건물 규모를 짐작케 하는 기둥과 회랑들이 있다. 제대 터 바닥에는 다양하고 정교한 문양이 선명하다. 하트 모양으로 깎아놓은 기둥 아랫단은 코린토 1서 13장 사랑의 찬가를 떠올리게 한다. 로마인들이 만든 고속도로인 에냐시아 돌길에는 마차 바퀴자국이 남아있다. 우리는 복음을 가슴에 품고 길을 걸었던 바오로 사도를 그리며 그 길을 걸었다. 에냐시아 길 위편에 있는 현재의 국도를 건너면 바오로와 실라스가 갇혀있었다는 감옥 터가 나온다. 성경을 보면 무척 큰 규모였으리라고 상상되는데 지금은 작은 토굴이 남아있을 뿐이다(사도 16,10 이하). 그 옆으로 3세기에 지은 반원형 노천극장이 복원되어 있다. 이곳은 박해시대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굶주린 맹수에 먹혀 순교한 장소이기도 하다.

 

유럽의 첫 교회인 필리피 교회의 신도들은 바오로에게 첫아이와도 같았다. 그는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필리피 신자들을 기억하며 애정과 격려, 충고가 절절이 우러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필리피에서 우리는 2천 년의 시간을 넘어 주님께 바친 바오로 사도의 변함없는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말로는 하느님의 지혜를 선포할 수 없다, 아테네와 아레오파고스

 

서양문명의 발상지이며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 시내의 교통은 혼잡했다. 보이는 건물이나 보이지 않는 땅속까지 모든 것이 유적이어서 쉽게 도로를 내거나 건물을 개축하거나 새로 지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크로폴리스는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 문화유산 1호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곳으로, 낮은 바위언덕인 아레오파고스에 올라서면 아크로폴리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전쟁의 신 아레스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여 살인죄를 벗어난 데서 유래했다는 아레오파고스는 자신의 견해를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이들이 설교대로 사용하던 장소였다. 바오로 또한 이곳에서 자신이 믿는 하느님을 아테네 시민들에게 설파하였다.

 

필리피에서 성공적으로 교회를 세운 바오로는 테살로니카와 베로이아를 거쳐 아테네에 도착하였다. 당시 아테네는 이교문화와 다신교 신앙이 지배하는 신화의 나라였다. 때문에 유일신 하느님을 섬기는 바오로가 보기에 아테네는 구원이 필요한 곳이었다. 바오로는 논쟁과 철학적 사유로 시간을 보내던 그리스인들 못지않은 학식과 수사학적 변증을 동원하여 복음을 선포하려 했다.

 

그리스 학자들은 “저 떠버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이방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군.” 하고 일말의 관심을 보였고, 바오로는 그리스 시인 아라토스의 시 ‘현상 5’에 나오는 “우리도 그의 자녀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그리스 시민들이 예배드리는 ‘알지 못하는 신’이 바로 자신이 전하는 하느님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몇 사람만 관심을 보였을 뿐, 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사도 17,16-34).

 

비록 박해는 받았지만 그때까지 성공적인 선교활동을 이어오던 바오로에게 아테네에서의 실패는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결국 바오로는 인간적인 능력을 내세워 주님을 전하려 했던 자신의 행동을 뼈아프게 돌이켜 보면서 코린토로 떠났다고 한다. 아테네의 경험은 그에게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 하지 않는다.”(1코린 2,1)는 깨달음을 주었을 것이다. 그 깨달음은 오늘 인간적인 방법으로 쉽게 주님을 전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나에게도 좋은 가르침이 되고 있다.

 

아레오파고스로 오르는 층계 옆에는 바오로 사도의 연설문(사도 17장)을 새긴 동판이 있다. 거기에서 바오로 사도의 아테네 선교와 그 결과를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방법과 인간의 방법이 얼마나 다른지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바오로 사도의 설교 장소에서 성경(사도 17,16-21)을 읽을 때 내 머리 위에는 두 마리 비둘기가 맴돌고 있었다. 그날의 묵상이 내게는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시어 선물로 주신 깨달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경향잡지, 2008년 7월호, 글 김인순 가브리엘라(성 바오로 딸 수도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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