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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철학 에세이: 정의와 우애는 어떻게 행복과 관련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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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0-21 ㅣ No.128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10]

정의와 우애는 어떻게 행복과 관련되는 것일까요?


“정의는 가끔 모든 덕 가운데 가장 큰 덕이라 생각되며, 저녁의 별이나 새벽별도 그만큼 놀라운 것은 못 된다. 그래서 ‘정의 속에 모든 덕이 다 들어있다.’는 속담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한 덕의 활용이기 때문에 충만한 의미에서 완전한 덕이다. 그것이 완전한 까닭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그 덕을 자기 자신 속에서만 아니라, 자기 이웃 사람에 대해서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5권에서).

네가 우울하고 힘들어서
애정 어린 관심이 필요하고
아무것도 제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눈을 감고 나를 생각해 봐
그러면 곧 내가 가서 너의 어두운 밤을 밝혀줄 테니까
그저 내 이름만 불러봐
그러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네게 달려와서 널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어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때건 넌 날 부르기만 하면 돼
그럼 내가 달려갈게
너에겐 친구가 있잖아(캐롤 킹, ‘너에겐 친구가 있잖아’).


함께 이루어가는 좋은 삶 - 정의와 우애가 만나는 자리

정의와 개인의 행복이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정의가 행복을 이루는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핵심적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 좋은 삶이 행복의 내용이며, 이는 덕의 습득과 발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행복을 정의하는 데 동의할 때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에서 행복을 철학적으로 이해할 때 왜 ‘좋은 삶’의 진면목을 먼저 성찰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5권에서, 정의가 덕 가운데서도 각별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매우 인상적으로 강조하고 있고 또 이런 논지를 그의 다른 중요한 작품 「정치학」에서도 이어갑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는 정치의 원리입니다. 이런 입장은 오늘날 우리가 체험하는 현실정치에 비추어보면 너무 이상적으로 들리지만 오히려 우리가 왜 온전한 의미에서 ‘정치적’이 되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는 공동체에 정의가 살아있게 하고 각 개인이 그 안에서 정의의 덕을 익히고 실행하여 ‘행복’해지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정의’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타인을 위한 덕’이라는 사실은 행복에 대한 본질적인 통찰을 줍니다.

독일어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전체를 해설하는 가장 정평 있는 저서를 쓴 고전학자 잉마르 두링은 ‘윤리학’과 ‘정치학’을 해설하는 대목에서 ‘인간적으로 함께하는 삶을 위한 철학’이라는 소제목을 붙여놓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윤리와 정치는 그 본디 정신에 따르면, 서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한 현명한 길을 모색하는 공통점을 가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함께 행복하기 위한 길 위에서 정의와 우애가 내적으로 연결되었다고 본 것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확신인데, 이는 사실 우리가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서 보는 내용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점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한 대목을, 바오로 6세 교황의 회칙인 「민족들의 발전」 반포 20주년을 맞아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발표한 회칙 「사회적 관심」에서 보게 됩니다. 여기서 교황님은 비오 12세의 유명한 좌우명을 인용해서 정의와 함께 우애의 다른 표현이라 할 연대성이야말로 행복의 다른 이름이라 할 평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십니다.

“본인의 존경하올 선임자 비오 12세의 교황직 좌우명이 ‘평화는 정의의 열매(Opus justitiae pax)’였다. 오늘에도 성서적 영감에서 오는 똑같은 의미와 똑같은 어조(이사 32,17; 야고 3,18 참조)로, ‘평화는 연대성의 열매(Opus solidaritatis pax)’라고 단언할 수 있다”(「사회적 관심」, 39항).


행복의 길, 우애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사랑

정의와 우애는 행복, 또는 평화라는 같은 대상을 향하고 있지만 분명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정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우애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의 공동체적 삶의 행복이 만개하게 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애와 행복의 관계를 곰곰이 성찰하면서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는 인간의 참된 행복은 분명 타인의 이목, 재화, 명예 등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자족성’에서 시작되지만, 이 사실이 우애를 통해 행복이 더해지고 충만해지는 것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제2의 나’라고 할 수 있는 벗에게 자신을 비추어보고 통교하면서 진정한 행복을 얻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한편으로 정의 없는 우애는 항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사실 진정한 우애가, 곧 함께하는 행복한 삶을 이끄는 우애는 무엇인가를 성찰할 필요가 있음을 뜻합니다.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고전적인 구분을 내리고 있습니다. 곧 진정한 우애는 단순히 애착이나 유용성에 의해서 어울리는 것과는 구분되며, 덕 안에서 서로 덕스러워지며 나누는 삶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부부 사이에는 정서적 애착만이 아니라 덕을 나누는 우정 역시 생겨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로 우정을 꼽는 것은 분명히 올바른 것이지만, 그것을 위해 정의를 비롯한 덕을 갈구하고 그것을 익혀가는 삶의 길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점은 고대 그리스 문화보다도 오히려 그리스도교적 정신문화의 근간이 형성된 중세시대에 더욱 분명히 인식되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덕을 갈고 닦는 수도자들 사이에 아름답게 꽃핀 우애에서 우리는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잘 배우게 됩니다.

날카로운 문명비평가였던 이반 일리치는 아마도 그의 가장 아름다운 저서라고 할 수 있을 「텍스트의 포도밭」에서, 중세시대 이러한 수도사들의 행복한 참된 우정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편지(대학자 빅토르의 휴가 동료 수사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중세의 우애(amicitia)의 개념이 현대의 왜곡된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교정할 가능성이 있음을 봅니다.

“사랑(caritas)은 끝이 없어라! 내가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도, 나는 이 말이 참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네. 그러나 친애하는 형제여, 이제 나는 비로소 나의 충만한 체험 안에서 이 말이 참되다는 것을 안다네. 왜냐하면 나는 이방인이었고 낯선 땅에서 그대들을 만났건만, 내가 그대들 안에서 친구를 발견했기에 나는 진정 이방인이 아니었다네. 내가 먼저 친구를 만들었는지, 친구가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애덕 안에서 우애를 발견했고 그것을 사랑했다네. 그리고 이렇게 내 마음을 채운 것이 감미롭고 싫증나지 않았다네….”

우리는 이 편지에서 휴가 우애를 표현하며 사랑, 곧 애덕인 까리따스를 말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사랑이 행복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지만 한편으로 ‘정념으로서의 사랑’이 주는 행복이 얼마나 유약하고 덧없는 것인지도 체험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항구한 우애마저도 품고 있는 고귀한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 철학이 미처 몰랐던, 그리스도교 철학만이 밝히는 행복의 비밀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 최대환 세례자 요한 - 의정부교구 신부. 정발산본당 주임으로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과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연재하는 동안 행복에 대한 독자들의 견해와 질문을 열린 마음으로 기다린다(theophile@catholic.or.kr).

[경향잡지, 2012년 10월호, 최대환 세례자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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