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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터키의 바오로 사도 유적: 바오로 사도로부터 시작된 교회, 요한 묵시록의 도시 에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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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5-23 ㅣ No.635

세계 교회 신앙유산 순례 - 터키의 바오로 사도 유적


바오로 사도로부터 시작된 교회, 요한 묵시록의 도시 에페소

 

 

터키의 지방도시 셀축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불불 산, 그리스어로는 크리소스 산이라고 부르는 해발 400m의 언덕에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이 만나 이루어낸 에페소 유적지가 있다. 넓은 지역에 펼쳐진 웅장하고 화려한 고대 문명의 도시 에페소.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사도행전에 쓰인 바오로 사도의 행적은 물론 성경의 여백에 적힌 바오로 사도의 마음을 만날 수 있는 중요한 순례지이기도 하다.

 

 

최대 규모의 로마 유적지

 

에페소의 역사는 기원전 1500-1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설화에 따르면 당시 아테네 왕자 안드로클로스와 함께 아나톨리아에 정착한 그리스 이주민들에 의해 고대도시가 형성되었으나 기원전 7세기경 키메르인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뒤 기원전 6세기경 에페소는 리디아왕국의 군주 크로이소스의 지배를 받다가 페르시아의 속국이 되었고 알렉산더 대왕의 치하에서 크게 번영을 누렸다. 이후 리시마쿠스가 현재의 장소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요새화했는데 오늘날 볼 수 있는 유적들은 대부분 이 당시의 것들이다. 기원전 88년 당시 아시아에서 제일 큰 무역항이기도 했던 에페소는 아우구스투스 황제(BC 27-14년) 때 로마의 아시아 속주의 수도, 정치와 상업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다. 한때 25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던 대도시 에페소는 서기 17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970년 이후 오스트리아 발굴 팀에 의해 옛날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발굴된 유적은 전체 유적의 삼분의 일 정도라는데 최대 규모의 로마 유적지로 알려진다.

 

크리소스 산 언덕에 펼쳐진 고대 에페소의 시가지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언덕 위에서 첼수스 도서관까지 뻗은 직선도로는 어림잡아도 1km가 넘을 것 같다. 마찻길은 대리석 포장이 되어있고 인도는 정교한 모자이크 장식이 깔려있다. 그리고 시민들이 비를 맞지 않도록 지붕까지 있었다고 한다. 큐레테스 거리로 불리는 이 길은 신전을 드나드는 왕족이나 귀족들이 주로 이용하던 길이었다. 아치형의 고급 상가터가 늘어서 있는 왼쪽 뒤편으로는 귀족들이 살던 주택의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금세라도 어디선가 로마 시대 의상을 걸친 남녀들이 나타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른편에 있는 많은 유적들 가운데 기원후 138년에 건축된 하드리아누스 신전입구가 시선을 끈다. 신전 입구 안쪽에 있는 코린토 양식의 아치 위에 메두사의 얼굴이 새겨져있다. 에페소에는 공중목욕탕과 화장실, 트라야누스 샘터, 첼수스 도서관, 실내극장 오데온과 스타디움, 정원같은 시민들을 위한 공공시설 유적들이 가득하다. 당시 세계 최고의 도서관으로 장서가 1만 2천 권이 넘었다는 첼수스 도서관 정면에는 학문의 네 가지 덕목을 지닌 여신상이 서있다. 도서관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아치형 문을 지나면 주랑이 끝없이 늘어선 서민들의 장터가 나타난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번화한 시장터 어디선가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전하려는 열망으로 눈을 빛내며 빠른 걸음으로 나타날 것만 같다. 그만큼 에페소는 순례자와 여행자들을 성경이 살아 숨 쉬는 고대의 현장으로 이끄는 매력이 가득하다.

 

 

유적의 여백에 숨 쉬는 바오로 사도의 정신

 

요한 묵시록에서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잃은 교회”(묵시 2,4)로 지목되는 에페소는 90년경에 사도 요한이 성모님을 모시고 정착하여 요한 묵시록을 쓴 지역으로 전해진다. 묵시록의 일곱 교회 가운데 하나이며 요한계 문헌의 전승지로 알려진 에페소에는 로마 유적과 더불어 사도 요한의 무덤이 있는 성 요한 대성당 유적이 있다. 성 요한 대성당에서 내려다보는 평야 늪지에 기둥 하나만 남은 아르테미스 신전터가 있다. 원래는 웅장한 180여 개의 대리석 기둥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신전이었는데 그리스도교가 번성하던 시대에 성 요한 대성당과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을 지으려고 기둥과 자재를 가져가 지금처럼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에페소에는 또 431년 에페소 공의회를 연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유적이 있는데, 이 공의회는 공식적으로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그밖에도 에페소에는 성모님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사셨다는 집이 있다. 이처럼 사도 요한시대에 에페소에서 그리스도교가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오로 사도의 왕성한 선교활동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를 통하여 에페소는 그리스도교를 소아시아에 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1코린 3,6).

 

바오로 사도는 수많은 이교 신전과 환락의 분위기가 넘치는 에페소에서 놀라운 선교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설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이교 신들과 관련한 신상과 책들을 불살랐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바오로 사도의 선교로 그리스도교인이 되자 아르테미스 신상을 만들어 팔던 은장이들의 수입이 줄어들었다. 화가 난 그들은 피온 산 아래에 있는 원형극장으로 몰려가 소동을 일으켰다(사도 19,1-40). 이 사건으로 바오로 사도가 옥고를 치르기도 한 야외극장은 로마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만들어졌다. 2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극장은 지금도 가끔 공연장소로 사용된다고 한다. 에페소의 이곳저곳을 걷다보면 사도행전의 여백에 숨은 바오로 사도의 선교 상황과 그의 복음을 전해들은 시민들의 반응과 반대자들의 행태가 긴장감 있게 그려진다.

 

에페소에 넘치는 활력과 지적인 분위기, 자유로운 사상과 상업활동은 바오로에게 고향 타르수스를 떠올리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바오로 사도는 3차 선교여행 기간 중 2년 3개월여를 에페소에 머물면서 자기가 세운 교회들에 편지를 써 보내기도 했다(1 ? 2테살, 2코린).

 

그는 다른 지역으로 선교여행을 다니면서도 자주 에페소에 들렀다. 학문과 경제, 출세 같은 세속적인 것들이 우선되는 에페소에서 “자신에게 이로움을 주던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고한 가치를”(필리 3,7-8 참조) 전한 사도의 가르침은, 경제논리가 도덕과 윤리보다 우선하며 보이는 것에만 가치를 두도록 부추기는 오늘의 세상에서 더욱 크게 외쳐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다가온다.

 

[경향잡지, 2008년 8월호, 글 김인순 가브리엘라(성 바오로 딸 수도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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