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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03위 성인들의 아버지,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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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1 ㅣ No.666

124위 시복시성 기원 특별기획 - 이슬은 빛이 되어 (2) 103위 성인들의 아버지 · 어머니 (상)


한국 교회 신앙의 싹 틔운 선구자들

 

 

'솔뫼성지' 모습.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부터 김대건 신부까지 4대가 생활한 곳으로 김대건 신부 가족의 신앙 유산이 살아 숨쉬는 곳이라 할 수 있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이라는 말처럼, 순교자들의 피가 떨어져 한국 교회에 씨앗을 뿌린 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발판으로 얼마나 많은 싹을 튼실하게 틔웠을까.

 

현재 시복이 추진되고 있는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는 자랑스러운 ‘103위 성인’에 이어 한국 교회가 틔워야 하는 또 하나의 싹이다. 우리의 조상이며 103위 성인의 신앙선조가 되는 124위, 지금부터 그들의 삶을 하나씩 돌아본다.

 

 

김대건 성인의 증조부와 작은 할아버지

 

124위 중 103위 성인들과 관계를 가진 순교자들로서는 우선 성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 작은 할아버지인 김종한 순교자를 꼽을 수 있다.

 

김대건 성인의 증조부, ▲ 김진후(비오) 순교자는 처음부터 천주교 교리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고 전한다. 세상의 권세와 쾌락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감사 밑에 작은 관직 하나를 얻게 되자 자식들의 권유를 강하게 물리쳤다.

 

하지만 부친을 설득하기 위한 자식들의 권유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는 점점 천주교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1791년 신해박해, 1801년 신유박해 등 몇 차례 체포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거듭 풀려난 그는 1805년 다시 체포돼 해미로 압송됐다.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옥중생활을 한 그는 결국 1814년 당시 7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만다.

 

김대건 성인의 작은 할아버지, ▲ 김종한(안드레아) 순교자는 앞서 언급된 김진후 순교자의 아들이다. 아버지인 김진후 순교자가 계속되는 옥중생활을 하는 동안 그와 그의 형제들은 안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뿔뿔이 흩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가족들과 함께 경상도 영양의 우련밭으로 가서 오랫동안 숨어살았다.

 

교회 창설 초기 공동체인 명례방 모습. 경기도 광주의 유명 학자 집안 출신인 정약종은 천주교에 눈을 뜬 후 자주 한양으로 올라와 성사를 받았고, 교회의 주축이었던 이벽 · 권일신 · 이승훈 등과 함께 명례방에서 공부했다. (김태 作)

 

 

그는 낮에는 천주교 서적을 필사해 교우들에게 나눠주었고, 밤에는 신자들을 자신의 집에 모아놓고 가르치며 새 신자들을 찾아 입교에도 노력했다. 하지만 1815년 을해박해 때 체포됐으며 그는 옥중에서 2통의 편지를 형에게 보내고, 교우들에게도 1통의 편지를 보냈다.

 

“저는 순교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며, 감히 이 마지막 은혜를 바라기까지 합니다.(중략) 무엇보다도 먼저 천주님의 은총을 바라고, 다음으로는 여러 교우들의 기도를 믿습니다.”

 

임금의 사형 윤허가 떨어진 1816년 그는 지도층 신자로 지목돼 제일 먼저 칼을 받고 순교한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됐다가 이듬해 3월,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적당한 곳에 안장됐다.

 

 

정하상 성인의 아버지, 정약종 순교자

 

124위 중 몇몇 순교자들은 103위 중 여러 성인들과 가족관계를 이루고 있다. 대표적인 순교자로는 유소사(체칠리아)의 남편이자 정하상(바오로)과 정정혜(엘리사벳), 정철상(가롤로) 성인의 아버지인 ▲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순교자를 꼽을 수 있다.

 

1760년 경기도 광주 마재에 있는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786년 형으로부터 교리를 배우며 천주교에 눈을 뜬다. 이후 천주교 교리를 이해하게 된 그는 양근 분원으로 이주해 신앙생활을 이어간다.

 

1794년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그는 자주 한양으로 올라가 성사를 받았고 신부와 교우들을 도와 교회 일을 처리하기도 했다. 또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 2권을 완성했으며 ‘명도회’의 초대회장이 되기도 했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체포됐으며 체포된 지 15일 만에 서소문밖에서 참수됐다. 그가 참수되기 전,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며 죽는 것이 낫다”라며 하늘을 바라보고 순교한 사실은 유명하다.

 

이밖에도 정철상 성인의 장인인 ▲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순교자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사돈 정약종의 책 상자를 자신의 집에 숨겨두다가 발각돼 체포됐으며, 그의 아들 ▲ 홍인(레오) 순교자 또한 44세의 나이로 아버지와 함께 체포돼 참수됐다. [가톨릭신문, 2009년 6월 14일, 오혜민 기자]

 

 

124위 시복시성 기원 특별기획 - 이슬은 빛이 되어 (3) 103위 성인들의 아버지 · 어머니 (하)


“두려움 잊은 그 모습 따르겠습니다”

 

 

- 현계흠 순교자(탁희성 작). 1979년 동래에 정박해 있던 영국 함선에 올라가 "이와 같은 배 한 척만으로도 조선의 전함 백 척은 격파하겠다"고 말했다 전해진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중 103위 성인과 가족관계를 맺고 있는 순교자는 김대건 성인의 증조부 김진후와 작은 할아버지 김종한, 정하상 성인의 아버지 정약종 순교자 외에도 여러 명을 찾을 수 있다.

 

가톨릭신문은 103위 성인들의 아버지 · 어머니(상)편에 이어 ‘참 신앙의 모범’이 되어 성인들이 목숨을 내놓고 순교할 수 있도록 이끌었던 124위 순교자들에 대해 알아본다.

 

한국 교회의 뿌리, 103위 성인들의 생활의 표양이 됐던 그들을 기억하고 이제 시복시성 추진에 더욱 온 마음을 쏟아야 할 때다.

 

 

현석문 · 현경련 성인의 아버지 현계흠 바오로

 

현계흠 순교자는 성 현석문(가롤로)과 성 현경련(베네딕타)의 아버지다. 집안 대대로 많은 역관들을 배출했지만 그는 역관의 길을 택하지 않고 약국을 운영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일찍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교리를 실천하며 살던 그는 1791년 신해박해 당시 체포돼 석방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품으로 돌아와 이후 더욱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동료 신자들과 열심히 교회 일에 참석한 그는 자주 신앙집회를 가졌고 신입 교우들을 인도하거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하부조직이자 비밀 집회소였던 ‘6회’에 그의 집을 장소로 제공했을 만큼 그의 신앙생활은 적극적이었다.

 

최경환 성인의 유해를 모신 '수리산 성지' 모습. 최경환 성인 · 이성례 순교자가 박해를 피해 숨었다가 이곳에서 체포됐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가 온 일가친척들이 시달림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4월 경 스스로 포도청에 자수했다. 여러 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교회에 해가 되는 일은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았던 그는 1801년 12월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이 때 그의 나이 38세였다.

 

 

최경환 성인의 아내 이성례 마리아

 

이성례 마리아는 최경환 성인의 아내로,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아들 최양업 신부는 ‘땀의 순교자’로서 현재 124위와 함께 시복시성 추진되고 있어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의 신앙적 삶이 눈길을 끄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성례 순교자는 본래 충청도 내포 지역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집안의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씩씩했던 그는 17살 때 최경환 성인과 혼인, 1821년 장남 최양업 신부를 낳는다.

 

가족과 함께 한양으로 이주한 후 박해의 위험이 있자 강원도를 거쳐 경기도 부평, 수리산 뒤뜸이로 이주하는 동안, 아들 최양업은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떠난다.

 

이성례 순교자가 참수당한 곳에 조성된 '당고개 성지'. 많은 이들과 함께 치명해 순교자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한다.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 칭얼거리면 그는 요셉과 성모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 가시던 이야기나 예수께서 십자가를 진 이야기 등을 들려주며 인내심을 갖도록 했다. 또 남편을 도와 교우촌을 일구는 데도 노력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후 포졸들은 수리산 교우촌으로 들이닥쳐 그를 포도청으로 압송했다. 그는 남편이나 다른 자식들과 격리돼 젖먹이 스테파노와 함께 여인들의 감옥에 수감됐다.

 

하지만 그의 젖은 나오지 않았고, 먹일 것이 없어 한 살밖에 되지 않는 스테파노는 더러운 감옥 바닥에서 굶어 죽어갔다. 그것을 보며 그의 마음은 흔들렸고 결국 석방돼 집으로 돌아갔지만 다시 체포돼 그는 형조에서 이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순교를 원했다.

 

그는 어머니가 걱정돼 감옥으로 찾아온 자식들에게 자신의 마음이 약해질 것을 우려, ‘형장에는 오지 말라’고 당부하고 유언을 남겼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님과 성모 마리아님을 잊지 말아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1840년 그는 39세의 나이로 당고개에서 참수됐으며 순교 당시까지 안온하고 평화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밖에도 1839년 ‘제가 지금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의 목숨을 보존하려고 한다면, 제 영혼은 영원히 죽을 것이므로 주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순교한 최해성(요한)은 최경환 성인의 먼 친척뻘이 된다. [가톨릭신문, 2009년 6월 21일, 오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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