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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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지별로 살펴보는 124위 - 수원교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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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8-24 ㅣ No.701

124위 시복시성 기원 특별기획 - 이슬은 빛이 되어 (8) 순교지별로 살펴보는 124위 - 수원교구 ②


경각심 주려 고향으로 압송 후 처형

 

 

양근성지 전경 윤유오, 윤점혜, 권상문 등 순교자들의 삶의 터전이자 이들이 신앙을 증거하며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종’ 5명이 순교한 경기도 여주와 함께 양근에서도 3명이 하느님을 증거하며 쓰러졌다. 양근은 지금의 양평군으로 현재 이곳에는 ‘양근성지(경기도 양평군 오빈리 173-2)’가 자리해 양근의 슬픈 역사들을 기리고 있다.

 

 

사촌 윤유오와 윤점혜

 

윤유오(야고보)와 윤점혜(아가타)는 사촌 사이로 모두 양근에서 순교했다.

 

▲ 윤유오는 1795년 순교한 교회의 밀사 윤유일(바오로)의 동생이기도 하다. 일찍부터 형 윤유일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한 그는 고향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이웃에 교리를 전했다.

 

형이 순교한 후에는 인근에 사는 조동섬, 권상문 등을 만나 기도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면서 신심을 북돋웠던 그는 주문모 신부가 지방 순회에 나서 양근에 도착했을 때 성사를 받기도 했다.

 

윤유오는 형인 윤유일을 통해 입교한 후 고향 안근에서 교리 모임을 가지며 신앙을 지키다 체포됐다. (탁희성 작)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을 때 윤유오 또한 양근 포졸들에게 체포돼 관아로 압송됐다. 다른 순교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당하면서도 배교를 거부했다.

 

“저는 형이 가르쳐 준 십계명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실천해야할 도리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서적을 밤낮으로 외우고 익혔으며, 진실로 배교할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관장은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1801년 4월, 그는 양근 관아로부터 서쪽으로 떨어진 큰길가로 끌려나가 동료들과 참수됐다.

 

양근에서 순교한 ▲ 윤점혜는 신유박해 때 순교한 윤운혜(루치아)의 동생이다. 믿음이 깊었던 윤씨 집안에서는 윤유오와 윤점혜, 윤유일, 윤운혜 등 여러 순교자를 배출했다.

 

윤점혜는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기 위해 동정 생활을 하기로 결심했으나 당시 조선 풍속 안에서 그 결심을 지켜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그는 어머니가 마련해 둔 혼수 옷감으로 남장을 해 사촌 오빠 윤유오의 집에 숨기도 했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양으로 이주한 그는 과부처럼 행세하며 동정을 지켜나갔고 2년 후 세례를 받았다. 어머니의 사망 후에는 여회장 강완숙과 함께 생활했다.

 

윤점혜는 남장을 하거나 과부처럼 행세하며 동정을 지켰고, 믿음을 지키다 순교했다. (탁희성 작)

 

 

윤점혜 역시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체포돼 수감됐는데 포도청은 그의 고향인 양근으로 그를 압송해 처형토록 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했다. 당시 그 감옥에는 여교우 한명이 함께 수감됐었는데 그가 윤점혜에 대해 증언하길 “윤점혜는 말하는 것이나 음식을 먹는 것이 사형을 앞둔 사람 같지 않고, 태연자약하여 이 세상을 초월한 사람 같았다”고 전했다.

 

1801년 7월 그는 순교했는데 그 때 그의 목에서 흐른 피가 우윳빛이 나는 흰색이었다고 전해진다.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윤점혜·윤유오 사촌남매와 함께 ▲ 권상문(세바스티아노)도 양근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이다.

 

권상문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에 결정적 역할을 한 양반 집안 출신으로 교회 창설 주역들의 스승이자 학문으로 이름 높던 권철신(암브로시오)이 그의 큰 아버지다.

 

또 교회 창설에 참여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은 그의 아버지로 훗날 권상문은 조선의 풍습에 따라 큰아버지의 양자가 됐다.

 

권상문은 부친 권일신의 순교 후 교회 창설 주역인 큰아버지 권철신의 양자가 되었다 (탁희성 작)

 

 

일찍부터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아 열심한 신자였던 권상문은 장성한 후 이웃에 사는 윤유일 형제를 비롯한 교우들과 기도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했다.

 

1791년 신해박해로 아버지 권일신이 죽임을 당하자 권상문은 마음이 약해져 한 때 교회를 멀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로 다시 신앙을 회복해 성사를 받기 위해 한양으로 이주했다.

 

1795년 을묘박해로 주 신부가 피신 생활을 하게 되자 3일 동안 주 신부를 자신의 집에 유숙시키면서 교리를 배웠다. 1800년 양근에서 일어난 박해로 그는 동료들과 체포돼 잠시 마음이 약해진 적이 있었지만 이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무수히 가해지는 형벌을 받으며 신앙을 증거했다.

 

1802년 1월, 형조에서는 그의 최후 진술을 들은 후 다음과 같은 죄목으로 양근 형장에서 참수형을 내렸다.

 

“생부 권일신이 사망한 이후에도 천주교에 깊이 빠졌으며, 아울러 요사한 말과 글을 오로지 대중을 미혹시키는 데 이용하였다.”

 

[가톨릭신문, 2009년 8월 23일, 오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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