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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마중물로 던져진 가톨릭성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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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2-08 ㅣ No.732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하느님을 읽는다 나를 읽는다’ - 마중물로 던져진 가톨릭성서모임

 

 

우리 교구에서는 2015년 올 1년 동안 대구주보에 성서사도직 담당 박상용 신부가 ‘우리 모두가 함께 하는 성경통독’이란 난을 마련하여 ‘명쾌한 요약’과 함께 매일 읽을 성경을 안내해 왔다. 혹시 천주교 신자들은 성경을 잘 읽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말씀에 기반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성경을 읽지 않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읽는 스타일의 시대와 장소, 형태, 내용이 달랐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시대적 흐름과 변화를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말로 성큼 다가선 하느님

우리나라 신자들은 책으로 신앙을 배우고 또 책으로 신앙을 지켰다. 그리고 성서운동은 1970년대 들어 본당 속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5년 이래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을 ‘성서주간’으로 정하여 성서운동을 공식화하고 성숙하도록 의도했다. 또 같은 맥락에서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에서도 1991년에 ‘성서사도직협의회’를 설치하여 ‘세계성서연합’ 같은 기관과 연대해서 교구단위로 성서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청년성서모임, 성소못자리나 성서100주간, 사이버성경학교 등과 같은 성경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수도회 주도의 우리성서모임, 여정 등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물론 성경공부를 위한 교재 혹은 길라잡이도 「말씀 온돌에서 아흐레 지지기」 등 20 종류가 넘는다.

이러한 성경운동의 확산 기류에 힘입어 『성서와 함께』(1973 창간, 1984 혁신 창간), 『생활성서』(1983), 『야곱의 우물』(1994) 등 성경운동 관련 잡지들이 창간, 발매되고 있다. 1980년대에 들어 전 신자를 대상으로 성경읽기, 성경쓰기를 시행하는 본당이 크게 늘었으며, 실제로 성경을 통독하거나 완독하는 신자 비율도 늘고 있다. 대구에서도 각 본당, 어르신 대학 등에서 성경통독을 활발히 하고 있다. 그중 30년을 넘겨 졸업생 6,000여 명을 헤아리는 대구가톨릭어버이성경학교도 있다.

대구가톨릭어버이성경학교는 현재 경산에 있다. 이는 툿찡포교베네딕도회 대구수녀원에서 지역 선교 및 신자 재교육의 일환으로 소박하게 시작한 모임이었다. 툿징포교베네딕도 수녀원에서는 파티마병원을 개원하면서 수녀들이 병원 직원을 대상으로 성경학교를 열었다. 마침 오경란 수녀는 젊은 직장인 10명이 매주 1회 가졌던 ‘성령기도모임’에 함께 하면서, 1982년 초부터는 그들의 요청에 따라 성경 해설을 하기 시작했다. 이 강의가 바탕이 되어 수녀원에서는 ‘어머니성경모임’을 열기로 결정했다. 1983년 첫 입학생을 모집했다. 이 모임은 창립된 지 2년 후 ‘어버이성경학교’로 개명하고 교구 신심단체로 공식 인가받았다. 어버이성경학교의 제2대 책임자로 김수조 수녀가 재임하던 시기에 대구 시내뿐 아니라 성주, 선산, 포항 등 장거리를 통학하는 신자들이 생겨났다. 성경모임의 입학생은 증가 일로에 있었다. 1989년에는 2년 과정의 신약성경반을 증설했을 때는 전체 수강생이 1,200명이 넘었다. 다행히 당시는 본원이 사수동으로 이전되면서 파티마병원 내에는 여유 공간이 있었다. 그러다가 병원 증축계획 때문에 대구가톨릭어버이성경학교는 새로운 공간을 찾아야했다. 그래서 수녀회에서는 1968년부터 1983년까지 농장분원이었던 경산 분원을 재개원하고 이곳에 성서교육관을 신축했다. 1995년 성경학교를 신암동에서 경산 중방동으로 이전하여 수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교육관이 경산으로 이전되자 교통문제로 신입생 수가 감소했다. 이외 어버이성경학교 졸업 후 교육과정인 ‘심화반’, ‘거룩한 독서반’ 등이 있다. 강사 수녀들은 각자 교재를 만드는데, 이명자 수녀는 성경학교 전 교육과정에 맞추어 『모세오경』,『전기예언서』 등 5권을 엮어냈다. 1986년 이 학교는 다시 ‘대구가톨릭어버이성경학교’로 바꾸었다.

물론 학교의 졸업생들간의 유대도 깊었다. 일단 성경학교를 졸업한 사람 중에서 봉사자가 되어 다음기의 학생들 토론을 도왔다. 또 수강생들은 체육대회, 성지순례, 성서의 찾는 유럽여행 등을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또한 학생들이 편집위원이 되어 교지 『길손』을 발간하고 수강생 연계를 도왔다. 『길손』은 1991년 김봉자 수녀가 창간하여 매년 발간하고 있다. 대구가톨릭어버이성경학교 역대 지도 사제는 이홍근, 이용길, 최홍덕, 이성우, 이재수, 송재준, 심탁, 박석재, 박상용 신부이다. 또 대구가톨릭어버이성경학교 역대 책임 수녀는 오경란, 김수조, 김종자, 김인희, 오경란, 이명자, 전영순, 황경순 수녀이다. 성경학교는 대구대교구 3대리구(월성), 5대리구(구미), 김천 평화동성당, 성주성당(2013년 폐교), 창원 파티마병원 등에 개원되었다. 그밖에 미국 LA 베네딕도 성서관과 브라질 상파울로 한인성당에서도 성경학교가 열리고 있다.


성서생활화를 불지핀 ‘가톨릭성서모임’

한편, 이러한 거대한 운동도 교회의 필요를 제대로 짚은 한 마음이 이룬 불씨이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의 조화선 수녀였다. 그는 한국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히 잡아내었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무(無)에서 경계를 가리지 않고 배우러 다녔다. 자신의 수녀원과 젊은이들, 교구가 이에 공명하게 됐다. 그리고 필요성을 절감한 많은 이들이 도움을 얻었다. 결국 그것은 세계에도 반향을 일으켰다. 성경읽기에 멍석을 핀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였다. 공의회에서는 많은 것이 새롭게 조명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성경이었다. 전례헌장은 “성서는 전례거행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따라서 거룩한 전례의 쇄신과 발전과 적응을 촉진하려면, 동방과 서방예법들의 전통이 증명하는 대로, 성서에 대한 감미롭고 생생한 애정을 증진하여야 한다.”(전례헌장 24항)고 공포했다. 또한 성경의 중요한 부분들이 더 백성에게 봉독되어야 하고(전례헌장 50항), 성경을 번역하여 쉽게 하기를 권했다. 한국교회는 성서와 전례를 연결시키며, 성서의 생활화를 위한 성서모임이 시급하게 되었다. 마침 이때 개신교와 가톨릭의 공동작업에 의한 공동번역성서가 출간되어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처음으로 성서 완역본을 사용하게 되었다. 사제, 수도자들은 성서공부에 몰입하게 되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가 결국 이 시기에 불을 댕겼다. 1970년 초에 조화선 수녀는 “개신교와 달리 가톨릭 학생은 성경연구모임이 없다.”는 점을 주목했다. 이에 그는 성서를 배워 가톨릭에 적용시키고자 개신교에서 운영하는 대학생 성경읽기선교회에 나갔다. 그때 그는 회원 300여 명 중에 절반 이상이 가톨릭신자인 걸 보고 젊은이들이 성경공부에 목말라 하는 현실을 절감했다. 조 수녀는 우리 신앙 전통에서 방법을 찾았다. 그는 성서 본문을 읽고, 풀이하고, 묵상과 생활로 옮기는 형식은 한국천주교회 초기 최창현이 한글로 번역한 『성경직해』의 기본 틀을 차용했다. 『성경직해』는 초기 신자들이 주일의 공소모임에서는 전례서로, 개인적으로는 자주 읽고 묵상함으로써 일용할 양식으로 삼았던 책이었으며, 실제로 최고 규범으로 적용됐던 책이었다. 이 책은 매주일의 성서 본문(聖經), 풀이, 잠(箴), 의행지덕(宜行之德), 당무지구(當務之求) 등의 순서로 되어 있다. 즉 먼저 제시된 성서본문을 읽고, 그 본문에 대한 설명으로 바르게 이해한 뒤, 신앙생활과 연결한 강론형 해설을 읽고, 그날 말씀에 따라 실천할 내용을 파악하고, 기도로써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는 다섯 단계로 짜여있다. 여러 사람이 조화선 수녀를 도왔다. 사회에서의 필요성을 공감한 이들의 협업 형태였다고 하겠다. 가톨릭성서모임은 마른가지에 불을 당긴 것처럼 빠르게 성장하고 확산되었다. 성서모임은 시작된 지 1년 후부터 대구, 안동, 부산, 청주, 충주, 공주, 춘천, 강릉 등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73년 대구에서 서울로 가톨릭성서모임 3박4일 피정에 참여한 박석돈 등 6명은 창세기만 끝내고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토마스성당에서 김경환 신부의 지도로 출애굽기를 공부하게 되었다. 이때 관심을 가진 지역의 수녀들이 이 모임에 참여했고, 그것이 씨앗이 되어 성경공부가 퍼져나가게 되었다.

가톨릭성서모임은 ‘가톨릭대학생성서모임’으로 출발했다가 직장인, 어버이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면서 1974년부터 ‘가톨릭성서모임’으로 변경되었다. 또 구성원간의 의사소통과 묵상 나눔을 위해 『성서와 함께』를 펴냈다. 1973년 3월, 먹지에 철필로 써서 등사한 프린트물 60면짜리 창간호가 대학생들의 작업으로 나왔다. 이 잡지는 1984년 10월 103호부터 ‘가톨릭성서모임’의 소식지 성격에서 벗어나 월간지로 재창간되었다. 조화선 수녀의 또 하나의 독특한 구상은 젊은이 계약공동체인 ‘아나뷤’의 발족이었다. 그는 청년 성서모임이 활성화 되려면 종전의 프로그램을 심화하는 젊은이 공동체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몇몇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젊은이 계약공동체를 만들었다. 조 수녀는 이로써 청년성서모임이 보다 활성화되고, 성서사도직을 카리스마로 하는 수도회에 활기를 더해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시작한 성서모임이 10년을 지나오면서 그들의 제한된 시간의 봉사와 매학기별로 봉사자가 대폭 바뀌는 한계성을 벗어나 전적으로 말씀봉사에 헌신할 봉사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 계약공동체는 구약성서에 ‘야훼의 가난한 이들, 남은 자들’을 뜻하는 ‘아나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말씀이 더 널리 선포되도록 노력했다. 이 공동체에 속한 젊은이들의 일과는 매일 성서공부와 봉사, 찬양과 율동을 함께하는 활기찬 기도, 깊은 심령의 기도 등으로 짜여졌다. 이들은 교회가 요구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성서말씀과 온몸으로 바치는 찬양과 율동, 생활체험의 나눔 등으로 복음을 선포하고자 했다. ‘아나뷤’ 공동체의 최종목표는 미래 열릴 라디오, TV, 인공위성을 통한 복음선포였다. 이를 대비하여 복음선포의 내용과 이를 위한 최첨단기술을 익히며 준비했다. 조 수녀는 ‘아나뷤’ 공동체의 핵심멤버들을 로마의 ‘국제가톨릭 청소년 복음화 훈련과정’에 보내기도 했다. 한편 조 수녀는 1988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성서모임을 시작하였고 그 이후 미주지역 성서모임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성경생활화 운동은 사회에 여러 가지 비전을 제시했다. 『성서와 함께』는 1986년 11월 성서주간 동안 교보문고에서 ‘하느님이 우리말을 하시다.’라는 주제로 우리말 성경전시회를 열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개신교의 주요 교파들, 성공회, 성서공회의 공동협력으로 이루어진 이 전시회에서는 필사본 『성경직해』등 희귀본 초기 한국어 번역성서 60여 권과 관계자료가 전시되었다. 전시회는 비신자들에게 가톨릭교회의 성서에 대한 오해를 시정하고, 가톨릭의 성서생활화운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했다. 또 1978년 말타섬에서 열렸던 세계성서사도직 제2차 총회에서는 한국의 성서생활화 운동에 주목했다. 당시 소그룹으로 성서를 통해 평신도 지도자를 양성하는 방법은 가톨릭성서모임이 유일했기 때문에 세계각국대표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가톨릭성서모임은 성서40주간, 엠마오대화 등 끊임없이 수정, 개발하는 성서생활화 운동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전통문화 안에서 필요한 부분을 찾아내고 우리에 맞는 새 틀을 세우려는 노력이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공감을 일으키는 생명체로 살아있는 것 같다. 이 성서주간, 자신에게 맞는 성서읽기 형태를 발견하면 좋겠다. 성서가 주님이 내게 주신 편지라면 그것은 다 각각의 사연을 담았을 것이다. 지금은 통독의 시기일지 모른다. 그저 성서를 통째 조용히 읽는 방법이다.

[월간빛, 2015년 12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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