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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성당 이야기47: 로마네스크의 중심에 고딕을 - 부르고뉴와 노르망디의 고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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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3-16 ㅣ No.785

[성당 이야기] (47) 로마네스크의 중심에 고딕을


부르고뉴와 노르망디의 고딕

 

 

지금까지 알아본 초기의 고딕 성당들 곧 누와용과 라옹 그리고 파리의 노트르담 주교좌성당은 모두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일드프랑스 지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로마네스크가 융성했던 남부의 부르고뉴와 북부의 노르망디 사이에 위치한 곳에서 이렇게 새로운 양식이 발생하게 된 것은 두 지역으로부터 당대의 첨단 건축술을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성당이야기” 39회 참조). 부르고뉴의 제3 클뤼니 수도원 성당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후고 원장은 당시의 모든 건축적 역량을 집결시켜 길이 184.2미터와 높이 29.1미터에 이르는 성당을 건립하였습니다. 여기에는 고딕 성당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3단의 네이브월과 포인티드 아치가 이미 사용되었습니다(“성당이야기” 25회 참조). 노르망디 캉의 생테티엔 성당 역시 리브 그로인 볼트(6분 볼트), 다발 기둥, 네이브월 3단 구성 등 고딕 성당의 요소들이 사용되었습니다(“성당이야기” 26회 참조). 부르고뉴와 노르망디의 이러한 건축적 실험이 일드프랑스의 고딕 성당 탄생에 밑바탕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로마네스크의 발달된 건축기술이 고딕 성당에 영향을 주었다면, 부르고뉴와 노르망디에도 고딕 성당이 건립되었을지 궁금해집니다. 프랑스 전체로 보면 고딕 성당이 전역으로 퍼져나간 것은 사실입니다. 구조적 특징이 뚜렷한 고딕 성당은 비교적 통일된 양식으로 전파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숫자는 로마네스크에 비해서 월등히 적었고, 특히 위의 지역에서는 작은 성당들을 통해서나 고딕 양식이 나타날 뿐이었습니다.

 

먼저 부르고뉴 지역은 12세기에도 클뤼니회와 시토회가 여전히 주류를 이루었고, 수도회들이 선호하는 건축 형태 역시 로마네스크 양식이었기 때문에 고딕 양식이 전파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는 고딕 양식을 시작한 쉬제와 시토회 수도원장 성 베르나르도의 성당 건축에 대한 논쟁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한 예로 당시에 지어진 시토회의 퐁트네 수도원 성당은 포인티드 아치와 리브 그로인 볼트, 버트레스 등의 고딕적 요소가 종합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여전히 로마네스크 양식을 유지하고 있습니다(“성당이야기” 21회 참조). 다만 대형화를 추구했던 클뤼니회의 경우는 고딕 양식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호의적이었으며 규모의 확장에 필요한 고딕 요소들을 부분적으로 취하기도 하였습니다.

 

노르망디 지역은 고딕 양식이 발달할 즈음에는 성당 건축이 침체기를 겪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는 정치적 요인과 관련이 있는데, 정복왕 윌리엄 이후 노르망디는 오히려 잉글랜드에 예속되는 상황에서 프랑스도 아니고 영국도 아닌 지역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고딕 성당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기존의 로마네스크 성당에 고딕의 요소가 덧붙여지는 정도였습니다. 캉의 생테티엔 성당은 성가대석을 증축하면서 초기 고딕의 어휘들을 사용하여 성공을 거두기는 하였지만 이 시기의 일드프랑스 지역과 비교해보면 고딕 건축은 여전히 뒤진 상황이었습니다. 종교가 국가와 사회의 여러 상황과 무관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2021년 3월 14일 사순 제4주일 의정부주보 5면, 김승연 프란치스코 신부(수동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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